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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한국경제 비화 ㊶]율산실업 신선호 사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율산(栗山)의 젊은이들’

 

1975년 6월 17일, 율산그룹의 모체인 율산실업은 신선호(申善浩·당시 27세) 씨와 그의 경기고교 동창들에 의해 설립됐다.

 

자본금은 고작 100만원.

율산의 창립초기에는 시멘트 등의 중동수출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점은 율산보다 뒤늦게 설립됐다가 더 빨리 물거품처럼 사라졌던 제세산업(制世産業), 원기업(元企業) 등과 맥을 같이 한다.

 

신선호 씨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시멘트수출로 큰 재미를 볼 수 있었던 데는 물리학박사인 맏형 은호(殷浩) 씨와 친한 사우디 왕자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얘기도 있고, 원기업(元企業)의 원길남(元吉男) 씨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율산이 재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신진(新進)알미늄을 인수하고부터였다.

 

곧이어 금용해운(金龍海運), 동원건설(東源建設)을 잇달아 인수하고 1976년 4300만 달러, 1977년 1억6500만 달러를 수출,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했다.

 

1977년 12월 5일에는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연리 9%의 저리수출금융 10억원을 대출 받아 자기돈 한 푼 안들이고 기존기업 하나를 인수하여 율산해운을 탄생시켰다.

 

율산실업을 비롯 율산건설, 율산알미늄, 광성피혁(光星皮革), 경흥물산(京興物産), 율산전자, 율산해운, 율산중공, 호텔내장산, 율산제화, 유신관광(有信觀光), 동아공업 등 14개 회사를 거느려 외형상 ‘그룹’의 형태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율산그룹의 경영진은 우리나라의 모든 재벌기업이 다 그렇듯이 창업자와의 학연, 지연 등으로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기획본부장인 정문수(丁文秀·창업당시 25세) 씨는 신선호 씨의 경기고 1년 후배이고, 자금담당이사 경흥물산 전무인 강동원(姜東元·창업당시 26세) 씨는 광주서중 동창이면서 율산그룹의 모체가 된 오퍼상 시절부터 신 씨와 함께 고락을 함께 해온 창업동지이다.

 

강 씨와 함께 율산실업의 신태승(申泰升), 최안준(崔晏準) 씨도 모두 창업멤버다. 이중 최 씨도 광주서중 동기동창생. 신 사장의 장인인 부완혁(夫琓爀·회장) 씨와 상공부차관보를 지낸 이문홍(李文弘·부사장) 씨 등은 율산이 재벌의 면모를 갖추고 난 뒤 참여한 멤버들이지만 신 사장의 경기고교 선배들이다.

 

부완혁 회장과 이문홍 부사장 등은 표면상 율산의 수뇌부에 속해 있었지만 회사 내에서의 영향력에 있어서는 정문수, 강동원 씨 등 직제상의 하급 경영자들보다 크게 뒤처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경영층 내부의 불협화음이 가끔 회사 밖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며 이것이 율산호의 침몰을 가속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어쨌든 부완혁 씨와 이문홍 씨는 율산사건이 신 사장의 구속으로 확대되기 전에 사실상 율산을 떠났다.

 

임원진 중에 경기고나 서울대 출신으로 신 사장과 동문관계에 있는 경영자가 절반선에 육박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 같은 경영진의 인적구성은 다같이 경기고교와 서울공대를 나온 제세산업의 이창우(李彰雨) 씨와 마찬가지로 신 사장이 지연보다 학벌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고경영자가 젊은 창업자이거나 2세일수록 강한 학벌위주는 50대 이상의 기업인이 이끄는 경영진의 지연중심과 대조적인 것이다.

 

그러나 뿌리가 깊지 않은 율산에게는 웬만한 비바람이 불어와도 뿌리째 흔들리게 마련이다.

율산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제세산업이 도산하기 훨씬 전인 1978년 7월경부터였다.

 

율산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단자회사와 사채업자들 사이에 나돌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자금사정의 악화가 표면화되었다. 이 같은 풍문은 율산이 외국인의 도소매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내법을 어겼기 때문에 비롯됐다.

 

율산 관계자들은, “현지직원 1명이 사우디아라비아 관리들 함정단속에 걸려들었기 때문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경미한 사건에 불과하다”고 해명하고 다녔지만, 소문이 돌면서 1978년 8월이후 단자회사의 어음할인한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벌금을 내는 것으로 완결되었던 이 사건이 없었다면 율산의 자금사정이 그토록 급하게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처럼 급하게 몰락의 길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자회사와 사채시장에서 자금융통이 막히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부동산 붐이 8·8투기억제조치로 급격하게 식기 시작했다는 것도 율산에게는 불운이었다.

 

1979년 1월 25일, 이상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오 2시 30분쯤 경제기획원(지금의 광화문 앞) 정문 앞에서 모고위기관을 사칭한 20대 괴한 3명에게 승용차로 납치당했다가 55분 만에 경부고속도로 양재 톨게이트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소문이 무성했다. 사업자금난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모면하려는 자작극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때로부터 신 사장은 하향길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1979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金正濂) 씨가 10년 만에 청와대를 떠나 주일대사로 나갔다. 그리고 남덕우(南悳祐) 경제기획원장과 김용환(金龍煥) 재무부장관까지 경질되어 3명의 경제팀이 교체된 셈이다.

 

그 즈음에 청와대 사정당국자에게 이상한 첩보가 날아들었다.

“신선호의 처 부정애(夫貞愛) 씨가 거액 도박을 한다. 강남에 있는 수억원대 호화주택이 그의 것이다.”

 

당시 청와대 사정당국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우선 치안본부에 특수수사대를 편성케 하여 장악한 수사력과 국세청을 동원한 탈세조사, 그리고 은행감독원 검사원을 이용한 은행계좌 즉, 자금추적을 지휘하고, 검찰의 지원까지 받는 등 권력이 무소불위(無所不爲)였다.

 

즉각 수사팀이 구성되고 국세청 조사원이 투입되어 첩보내용을 중심으로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정애가 도박을 한 사실도 인지된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주택도 그리 호화스럽지도 않다는 후문이다. 국세청 조사원도 이렇다 할 탈세사실을 적발하지 못했다.

 

어쨌든 청와대사정당국자는 율산그룹 처리에 몰두하게 된다. 이미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은행의 감리단이 파견되었고, 경영부실이 국민의 눈에 비치고 있는데 물러설 수는 없었다.

 

특수수사대는 3월 20일 신선호 사장을 불러 드렸다. 이에 앞서 율산그룹의 장부도 압수했으며, 융자해준 시중은행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신선호 사장을 구속수사를 함으로써 율산그룹으로부터 손을 떼게 하고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의지가 사정당국자에게 있었는지 모른다. 사정당국자에 의해서 작성된 율산사건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대책의 하나로서 신선호 사장을 구속한다는 내신이 담겨 있었다.

 

4월 3일.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어온 주광일, 심재윤 두 검사는 율산그룹 총수 신선호 사장을 업무상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 구치소에 구속 수감하게 된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1975년 6월 17일 100만원의 자본금으로 율산 실업을 세운 이래 1978년 말까지 총자본금 100억원에 이르는 14개 계열회사와 37개 해외지사에 8300여명의 회사원을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오는 과정에서 일반융자금, 수출융자금 해외공사선수금 등을 그룹산하 계열사에 제대로 입금시키지 않고 가지급금 형식으로 변태지출, 다른 회사를 잇달아 흡수합병, 인수하거나 증자하는데 사용하는 방법으로 지난 3년 동안 134차례에 걸쳐 회삿돈 15억여원을 빼돌려 회사자본금의 89%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만들었다.

 

또 그룹산하 회사원들의 해외출장비를 실제 지급액보다 10% 정도 많게 책정, 그 차액인 73000여 달러를 빼돌린 다음 이를 금융기관 등에 보관하거나 등록하지 않고 자신의 사무실에 보관했다.’

 

신선호의 구속으로 특혜금융의 문제 되짚다

 

율산그룹의 총수 신선호(申善浩) 씨가 구속됐다는 기사가 신문, 방송을 타고 퍼져 나갔다. 한때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의 구속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성쇠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해묵은 고질적인 기업풍토와 특혜금융의 문제점을 또 드러낸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여론은 율산의 도덕적 해이냐 정부권력층의 구조적 과오냐 두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다.

먼저 주간조선 논설위원 김성두(金成斗) 씨가 쓴 ‘누가 율산을 욕할 것인가?’를 보자.

 

“원리적으로 따져 기업인이 애국애족하며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기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오해이다. 기업인들은 산업훈장을 타기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고 수출목표달성을 위해 기업 활동에 전념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인이 기업하는 목적은 하나에서 열까지 돈을 벌자는데 있다. 돈벌이가 가능한 한에 있어서 수단방법의 윤리성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렇다. 당초부터 반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인 업종을 택해 출발하는 기업들도 우리 주변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다.

 

그 ‘왕성한 기업의욕’을 사회경제의 발전을 위해 소망스러운 방향으로 유도하고 반사회적인 해악을 배제하도록 하는 것은 사회제도가 할 일이요, 정치권력이 담당해야 할 과제이다. 율산사건은 이 권력(權力)이 담당해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얼마나 소홀히 하고 허술하게 수행해 온 것인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믿고 귀중한 국가 재산을 집중 공급한 위에 그렇게 허술하게 내맡겨 둔 것인지는 몰라도 기업인의 사회적 책임을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지 기업인이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국회재무위에서 신상우(辛相佑) 위원의 발언을 보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 보면 재미있는 얘기가 한 구절 있습니다.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이나 빵집의 자비심을 믿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돌볼 것이라는 그 믿음 때문에 우리가 저녁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체제가 갖는 그 나름대로의 하나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곧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부가 된다는 뜻이올시다. 때문에 이번 율산사건을 계기로 보면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체제하의 하나의 그러한 구실을 빙자해 가지고 권력만 가지면 돈을 버는 것은 막연하나마 나라의 부(富)로서 연결된다고 하는 이런 추상적인 관념만 가지고 권력의 보호 속에서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오만불손한 생각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신탁은행장 홍윤섭 행장 구속…이대로 ‘꼬리자르기?’

 

김치열 검찰총장에 의해서 율산그룹 간부, 과다 융자한 시중은행, 이를 묵과한 여신관리당국인 은행감독원, 금융정책당국인 재무부를 비롯한 정부관계부처 등 관련자에 대한 전면수사로 확대하게 된다.

 

그래서 서울지검 특수부를 중심으로 수사지휘권을 확보하였고, 강달수 서울지검 제3차장 등 4명이 맡고 있는 수사본부를 보강해 7명의 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그리고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는 윤종수 특수1부장검사를 비롯, 보강된 홍함표, 이건개, 이종찬, 이상현 검사가 파견된다.

 

한편 사정당국의 지휘를 받던 각 기관의 요원들도 이에 편성시켰다. 4월 12일 오후, 1주일 동안 수사를 진행한 검찰은 중간보고서를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보고 받은 대통령은 금융부조리의 진상과 실태에 대해 크게 노했고, 이 자리에 참석했던 고위관계자들이 관련자들에 대한 단호한 문책 방침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재무장관은 12시에 은행집회소에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격려를 했는데, 2시에 청와대에 갔다가 5시에 돌아와 조진희(趙晉熙) 은행감독원에게 정부의 방침을 전달, 전격적으로 홍윤섭(洪允燮) 주거래 서울신탁은행장, 김정호(金正浩) 부거래 한일은행장, 홍승환(洪承煥) 제일은행장 등 3명의 사표를 전격 수리하였다.

 

대한민국 주식회사 사장인 대통령이 재채기하니, 재무부장관은 감기 걸리고, 하수인 은행장은 앓아눕는 격이다. 율산그룹에 대한 부정대출의 책임자를 구속한다는 방침을 굳힌 검찰은 4월 13일 오전, 상업은행장을 제외한 4개 시중은행장을 한꺼번에 소환, 12시간에 걸쳐 마라톤 심문을 했다.

 

누가 구속되느냐? 국민의 초유의 관심은 검찰에 모였고, 서소문 검찰청사 15층 조사실에는 불이 밤새도록 환하게 밝혀졌다. 그리고 수많은 사진기자는 15층 입구 철문 앞 복도에서 밤을 맞고 있었다.

 

특수수사대에 파견되었던 홍함표, 이종찬, 이건개, 이상현 검사가 4개 시중은행장을 각각 맡아 심문하였다. 홍종수 부장검사와 홍함표 검사가 홍윤섭 행장을 구속하려 한다고 ‘세 홍 씨 시리즈’라고 우스갯 소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홍윤섭 행장에 대한 심문은 이상현 검사가 맡았다.

이 검사는 상업은행 출신으로 검사 중 가장 금융에 밝았다. 본래 그가 접근하는 방법은 기업분석기법이었다. 4월 14일 12시 40분. 서울신탁은행장 홍윤섭 씨는 업무상 배임혐의로, 율산그룹의 창업멤버이며 종합기획본부장인 정문수 씨를 외환관리법위반 및 업무상횡령혐의로 각각 구속하였다.

 

구속사유는 이렇다.

“은행장 홍윤섭은 1978년 9월 율산그룹이 극도의 자금압박을 받아 도산 위기에 처했을 때 한일은행 김정호 행장, 조흥은행 이동수 행장, 제일은행 홍승환 행장 등을 모아 구제금융회의를 열고 무담보로 특혜금융 1차 30억원, 2차 40억원, 도합 7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 회의과정에서 홍 행장은 율산이 사우디아라비아 주택성(MOH)과 계약한 3억 달러 공사가 취소된 줄 알면서도 앞의 세 은행장에게 마치 이 사실이 있는 것 같이 이야기했고, 또 율산이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양호하다고 기만했다.”

 

은행에 손실을 끼쳤다는 내용은 없다. 도산을 알고도 대출해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은행장 하나를 속죄양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셈이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 그리고 율산, 종지부를 찍다

 

4월 27일, 국회가 폐회한지 10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재무위가 갑작스럽게 소집되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여야 총무회담이 있었고, 2일간 상임위를 개최하도록 합의하는 과정이 있기는 했지만.

 

재무위 위원 21명 전원이, 재무위원 아닌 의원도 20명이나 출석하였다. 또 이 자리에는 재무부 장관 김원기(金元基) 씨를 비롯한 국장급 이상 전원, 국세청장 김수학(金壽鶴) 씨와 간부전원, 그리고 신병현(申秉鉉) 한은 총재와 조진희 은행감독원장이 출석하였다.

 

그런데 재무위 초두부터 말만 무성했지 무엇 하나 풀리는 것이 없었다. 이 사건을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한 특혜부조리로 간주하여 정치문제화 시키려던 야당과 단순한 금융제도상의 모순에서 야기된 사건으로 다루려는 여당의 입장은 처음 출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야당이 개회벽두부터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김원기 재무장관 외에 남덕우 전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김용환 전재무장관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을 증인으로 출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도 바로 금융에 대한 권력의 개입여부를 캐기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여야의 팽팽한 주장은 증인출석을 둘러싼 문제에서부터 첫 대결을 벌였다.

 

김승목(金承穆) 위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은행장 임의대로 이 막대한 돈이 대출될 수 있었는지 전 경제 팀이 국회에 나와서 증언을 해주어야 하다고 주장했다.

 

“이 율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성격상으로 규정짓는다면 저는 이 문제가 건국 이래 유래 없는 중대한 부정사건임과 동시에 국민적 공분을 사는 사건이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치금융체제하에서 은행이 자율기능을 잃은 지 오래인데 이 율산에 대한 변칙금융이 있을 수 있는 것이 결과를 금융인에게만 뒤집어 씌어 가지고 금융인을 제물로 삼는 것은 정책당국자는 시정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 이면을 가려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은행장 뒤에서 이것을 시켜서 한 것이 있다 이거예요.”

 

이에 대하여 공화당의 구범모(具範模) 위원은, 율산사건의 본질은 수출주도형의 경제성장정책에 의해 빚어진 것으로 권력이 작용했거나 장관이 개입한 것이 아니라며 종합무역상사나 기업이 악용만 하려 든다면 이 같은 사태는 언제든지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같은 제도적 허점을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급선무라고 말했다.

 

결국 여야의 찬반토론 끝에 이 출석요구 안은 여당의 반대로 찬성 7, 반대 12, 기권 1로 부결되고 말았다.

 

호남출신 일부 위원들은 질문과정에서 율산이 호남인의 기업이기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냐는 항간의 오해가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담양, 곡성, 화순 출신 신민당 고재청(高在淸) 위원의 발언내용.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정치권력의 소지관계로 인해서 그러는지 또는 세간에 말하고 있는 금융인맥상에 있어서 여기에서 그러한 비운을 맛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거니와 또한 율산기업이 많은 세상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는 전라도 기업이기 때문에 이렇게 구제금융을 받지 못하고 침몰 파산했다는 많은 항간의 얘기에 대해서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가?”

 

한편 해남, 진도출신 민정회 임영득(任煐得) 위원.

“율산실업은 분명히 호남인의 기업이었습니다. 때문에 지금이 재무위원회에서 따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우리 호남지역에 가면 왜 하필이면 율산실업이 얻어맞아야 되느냐 많은 종합상사들이 그러한 수출금융을 악용하고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율산만이 얻어맞아야 되느냐고 어떤 의미에서는 분개하고 있는 그런 일부의 여론이 있습니다.”

 

국민의 비상한 관심 속에 율산금융부정사건을 다루기 위해 소집된 국회재무위는 국민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지 못한 채 아쉬운 이틀간의 회기를 모두 끝냈다.

 

거액의 금융특혜이면을 샅샅이 파헤쳐보겠다던 야당의 으름장은 증인출두요구와 특별위원회의 구성요구결의안이 모두 부결돼 버림으로써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했다. 율산사건에 관련된 공직자가 수백 명이 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제102회 제4차 국회본회의 질의 내용에 대한 답변.

한병채(韓柄寀) 의원은 율산실업에 관련해서 수뢰한 공무원 150명의 처리결과를 밝히라고 질의했다. 이에 대한 김치열(金致烈) 법무장관의 답변을 들어보자.

 

“국무총리에게 질의하신 사실을 제가 답변 드리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50명의 공무원이 수뢰했다 하는 근거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율산실업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그 규모가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검찰로서는 수사 또는 비밀계좌의 유무 각 방면의 수사를 다 했습니다. 그 결과 관련 공무원이 11명 있었습니다. 수사는 20여명이 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 밝혀진 것이 11명인데 그 사람들이 받은 돈은 5만원 내지 50만원입니다.

그것이 명절에 지극히 의례적인 성격의 것으로 판단하고 공무원축정원칙에 따라서 각 해당 부서에 통보함으로써 면직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실채권과 채권보전대책은 어떠했는가?

국회재무위에서의 이용만 재무부재정차관보 브리핑내용을 들어보자.

 

“1979년 3월 말 현재 형태별로 본 여신현황을 말씀드리자면 대출금 597억원, 선수출환어음매입 344억원, 지급보증이 391억원 합계 1332억원입니다. 은행 측 추정으로서의 채권회수가능액은 기업체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731억원, 그리고 부동산 처분에 따른 회수추정이 10억원, 장부상의 해외자산 480억원 중에서 회수가능부분을 최대한 관리 처분하여 회수한다고 볼 때 약 24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종합 터미널의 고가매각 추정인데 시가기준으로는 190억원이고 장기상환기준으로는 400억원 이렇게 해서 대체로 1171억원 내지 1381억원의 회수가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족채권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담보가액은 물론 재무당국이 부풀린 액수이겠지만 오늘날 대우채권 사태로 온 국민이 예금원리금 피해를 보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우량기업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 홍윤섭 행장 재판결과를 보자.

서울형사지법은 1979년 8월 31일 율산그룹 부정사건과 관련, 구속 기소된 전 서울은행장 홍윤섭 씨에게 업무상배임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율산그룹의 주거래은행장이었던 홍윤섭 피고인은 율산계열기업의 재무구조가 지극히 나쁘고 사업전망이 어두워 대출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 그룹에 여신행위를 계속해 준 것은 앞의 은행에 손해를 발생시킬 목적은 없다 하더라도 손해발생을 충분히 예견하고 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음이 인정된다’ 지적하면서 ‘이 같은 여신행위가 감독관청인 재무부의 지시에 따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은행장은 소속은행의 이익을 위해 경영해야 되고 설사 감독관청의 부당한 지시에 따랐다 해서 위법행위가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판시했다.

 

베일 속의 관치금융은 이렇게 젊은 기업인을 강타하고 율산을 침몰시킨 뒤 우리 곁을 떠났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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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 권역별 회원 교육에 초점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지난해 6월 총회 선임으로 회장직을 맡은 후 이제 취임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 회장은 회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서 서울 전역을 권역별로 구분해 인근 지역세무사회를 묶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회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 6월에 치러질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선거 이전에 관련 규정 개정으로 임기를 조정해 본회인 한국세무사회는 물론 다른 모든 지방세무사회와 임기를 맞춰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물론 임원의 임기 조정을 위해서는 규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임기 조정이라는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고 있다. 임채수 회장을 만나 지난 임기 중의 성과와 함께 앞으로 서울지방세무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Q. 회장님께서 국세청과 세무사로서의 길을 걸어오셨고 지난 1년 동안 서울지방세무사회장으로서 활약하셨는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죠. A. 저는 1957년에 경남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듯이 저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때의 배고픈 기억에 지금도 밥을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