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김필주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주요 국가간 AI 경쟁, 글로벌 에너지 문제, 저출산 상황 등에 대응하기 위해 ‘한·일 경제연대’가 필요하다고 또 다시 강조했다.
최태원 회장은 그간 양국이 마주한 각종 불확실성을 ‘한·일 경제연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최 회장은 작년 9월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도 “완만한 경제 연대가 아닌 EU(유럽연합)와 같은 완전한 경제 통합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어 같은해 11월 ‘도쿄포럼 2025’ 비즈니스 리더 세션에서도 그는 “한·일 양국이 에너지 협력, 상호 인정 제도에 따른 의료·요양 서비스 공유, 스타트업 협력 등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며 양국간 경제연대의 필요성도 언급했다.
9일 SK그룹에 따르면 이날 최태원 회장은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한일특별세션’에 참석해 양국 정·재계 인사들과 ‘한·일 경제연대’ 실현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최태원 회장은 “한·일 협력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하고 실행력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기반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며 “(한·일 경제연대는)한국과 일본이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는 ‘룰 메이커(Rule Maker)’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은 구체적으로 에너지, AI, 저출산 문제를 두 나라가 공동 대응할 수 있는 대표적인 협력 분야로 제시했다.
그는 “양국은 중동 이외 지역의 에너지 공동개발과 첨단소재, 대체 배터리 공동연구는 물론, 소형모듈원전(SMR) 등 미래 에너지 분야에 함께 진출해 국제 표준 형성을 선도해야 한다”면서 “AI 분야의 경우 미국·중국 기술 패권 속에서 한국·일본이 규모의 경제와 협상력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 공유와 공동 인프라 개발, 규범 표준화로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한·일 양국은 민간 차원에서 육아 환경과 기업 문화, 노동시장 구조 등을 함께 연구하고 신속히 실천 모델을 만들어가자”며 “두 나라 정부가 기업·학계·청년 등 다방면의 협력 의제를 하나로 모으는 상설 플랫폼을 만들고 여기서 한·일 협력 추진의 어려운 점을 선제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협력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관련 제도를 정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태원 회장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양국 정·재계 인사들도 공감했다.
먼저 기시다 후미오 전 일본 총리는 “미래 지향적이고 안정적인 두 나라 관계를 위해 공급망, 에너지, AI 등의 분야에서 경제교류를 강화해야 한다”며 “양국이 함께 겪고 있는 수도권 집중, 고령화 등의 사회문제를 푸는데도 양국간 협력은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화답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시장경제,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은 세계적 격변기에 서로의 손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민석 국무총리 역시 영상 축사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는 양국 국민 모두가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도쿠라 마사카즈 스미토모화학 고문(전 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장)은 “두 나라 공통 과제인 에너지 자급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SMR 등 차세대 혁신 원전 개발에서 협력해야 한다”고 호응했다.
이날 행사는 ‘견고한 한·일 관계를 뒷받침하는 다각적 경제협력’을 주제로 일본 유력 경제일간지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주최하고 SK와 최종현학술원이 기획했다. 행사에는 최태원 회장, 도쿠라 고문 등을 포함해 양국 정·재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했다.
‘닛케이포럼’은 닛케이가 아시아 공동체의 공존·발전을 모색하고자 ‘아시아의 미래’를 주제로 내걸고 지난 1995년부터 시작한 행사다. 올해 행사는 최태원 회장의 ‘한·일 경제연대’ 구상에 공감해 처음으로 한·일 특별세션이 마련됐다.
◇ 학계 “한·일 협력, 양국간 상생 기회로 작용”…재계 “신뢰에 기반한 협력 필요”
한편 학계에서는 한·일 협력을 통해 양국이 보유한 자원과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결합하면 글로벌 불확실성에 대응해 양국이 상생 발전하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서울대학교 국가미래전략원이 지난 2024년 12월 발표한 ‘글로벌 대한민국의 새로운 한·일 협력’ 보고서에서는 한·일 협력의 목적을 ▲공동의 위험경감(Co-hedging) ▲협력적 경쟁(Co-opetition) ▲공동 발전(Co-development) ▲공동 책임(Co-responsibility)으로 정의했다.
먼저 보고서는 한·일 양국이 공동 대응을 통해 지정학적 변화와 글로벌 공급망 분절 등에 따른 위험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북한·중국·러시아 중 두 국가 혹은 세 국가의 연합된 행동, 러-우 전쟁 및 중동 전쟁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국지적 분쟁, 기후변화나 팬데믹이 글로벌 공급망에 미치는 영향, 미국 등 초강대국에서 발생하는 혼란 등을 한·일이 공동 대비·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양국간 협력적 경쟁에도 주목했다. 예를 들어 중간재와 최종재를 동시 생산하는 기업과 이 기업으로부터 중간재를 수입해 동일한 최종재를 만드는 다른 기업은 최종재 시장에서는 서로 경쟁하지만 중간재 시장에서는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고서는 한·일 양국이 전통적인 제로섬(zero sum) 경쟁 대신 양국 정부·기업 간 협력적 경쟁 과정에서 경쟁을 보완하거나 그 효과를 높일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유사 제품을 생산하는 한·일 기업이 제3국 기업으로부터 원자재를 공동구매하거나 상대 기업의 유휴 생산시설을 활용하도록 협력하는 방안이 그 예다.
보고서는 한·일간 공동 발전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술적 측면에서는 양자·신재생에너지·인공지능 등의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이 각자 우위에 있는 기술력을 활용해 공동개발이 가능하다.
또 경제 분야에서는 한·일간 스타트업 기업을 공동 지원함으로써 기업생태계를 활성화하고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 더불어 양국간 안보협력은 지정학적 위기와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부정적 충격을 예방하거나 이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 두 나라 공동 발전에 도움이 된다.
이외에도 보고서는 한·일 협력 목적에 공동책임의 중요성도 지목했다. 보고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면서 세계 5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한국과 세계 3위 경제력과 세계 6~7위권 군사력의 일본이 아시아 경제와 정치 발전, 인권, 그리고 역내 안전과 평화에 기여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재계는 ‘한·일 경제연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한 재계 관계자는 “EU와 같이 양국이 하나의 경제 블록으로 묶인다면 인구수 약 1억7000여만명, 세계 4위 수준인 총 GDP 약 6조달러의 대규모 단일 내수 시장이 탄생한다”며 “이는 보호무역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글로벌 불확실성을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일례로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정밀 기계, 기초 과학 등 원천 기술에 압도적인 강점을 지닌 일본과 메모리 반도체, 배터리, IT 응용 기기 등 대규모 양산과 상용화에 경쟁력을 갖춘 한국의 협력이 현실화된다면 이른바 ‘설계-소재-부품-장비-양산’으로 이어지는 세계 최대 첨단 산업 밸류체인(가치사슬 : 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일련의 활동)이 완성된다”고 부연했다.
다만 그는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 과거 일본 소부장 업체의 한국 수출 금지, 네이버 라인 지분 매각 강요 사태 등 일본 정부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신뢰성 결여는 양국간 협력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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