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금융정책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부동산·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을 끊어내는 ‘생산적 금융’이고, 또 하나는 저신용·취약 계층을 지원하는 ‘포용 금융’이다.
이에 화답하듯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금융지주는 오는 2030년까지 총 508조원을 생산적·포용 금융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가운데 생산적 금융이 441조원, 포용 금융이 67조원이다.
핵심 축은 정부 주도의 ‘국민성장펀드’다. 국민성장펀드는 향후 5년간 인공지능, 반도체, 바이오, 백신, 로봇, 수소,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미래차, 방산 등 첨단전략산업과 관련 기업을 대상으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첨단전략산업기금 75조원과 민간·국민·금융권 자금 75조원 등 총 150조원 규모로 조성된다.
5대 금융지주는 해당 펀드에 각 10조원씩 총 50조원을 출자한다. 민간·국민·금융권에서 마련하는 75조원 중 3분의 2 이상을 금융지주가 책임지는 구조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번 구상은 과거 정부가 단순이 재원을 모으는 데 그쳤던 것과 방식, 결이 다르다”며 “금융지주들 입장에서도 국민성장펀드나 자체 펀드를 통해 성과 기반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 있다. 향후 운용 전략이나 시장 상황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으나 정부가 제시한 기본 설계는 일정 부분 합리성을 갖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 입장에서 정책과 민간 수익이 동시에 가능한 판을 깔았고, 금융지주 입장에서는 정권 코드에 맞추면서도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새 먹거리가 확보됐다는 시각이다.
다만 문제는 이 거대한 판 위에서 각 금융지주가 얼마나 차별화된 전략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지속 가능한 모델을 만들 수 있는지다.
‘508조원 구상’은 출자 계획까지 포함해 5대 금융지주가 모두 참여하는 그림이지만, 실제 시장에서 건전성과 전략 차이를 가르는 핵심 축은 비은행 포트폴리오 구조가 유사한 4대 금융지주(KB·신한·하나·우리)다. 따라서 이후 분석은 4대 금융 중심으로 이어간다.
◇ 겉으로는 비슷, 안은 미묘한 차이
4대 금융지주의 생산적 금융 전략은 표면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모두 AI, 반도체, 바이오, 에너지, 인프라 등 이른바 ‘첨단전략산업’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 금융지주의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먼저 KB금융은 생산적 금융 93조원, 포용 금융 17조원으로 총 110조원을 공급한다.
생산적 금융 92조원은 투자 25조원, 전략산업 중심 기업대출 68조원으로 나뉜다. 투자 25조원에는 국민성장펀드 10조원과 그룹 자체투자 15조원이 포함됐다.
KB금융은 정부의 ‘5극 3특 전략’에 맞춘 지역 성장 프로젝트를 적극 추진한다. 5대 초광역권(수도권·동남권·대경권·중부권·호남권)과 3대 특별자치도(제주·강원·전북) 등에서 인프라, 신재생에너지, 데이터, AI센터, 물류, 항만 프로젝트를 발굴해 지역 맞춤형 전략산업 금융주선을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계열사 내부에서는 부동산 금융 영업조직을 축소하고, 기업·인프라금융 조직을 확대하는 조직개편도 검토 중이다.
신한금융은 생산적 금융에 93~98조원, 포용 금융에 12~17조원으로 총 110조원을 투입한다. 국민성장펀드에 10조원을 공급하고 초혁신경제 15대 프로젝트를 겨냥해 자체 투자자금 10~15조원을 별도로 조성한다.
눈에 띄는 점은 이미 집행 중인 ‘메가딜’을 전면에 내세운 점이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교통·용수 인프라와 광역급행철도(CTX) 등 10조원 규모 파이낸싱을 선제적으로 진행 중이며, 데이터센터센터·신재생에너지 관련 펀드도 조성했다.
신한금융은 이를 위해 그룹 차원의 ‘생산적 금융 PMO’를 꾸리고 자회사별 과제와 자본 영향도를 격월 단위로 점검하는 관리 체계를 도입했다. ‘실행력 중심’ 원칙이 선언적 표현을 넘어 실제 운영 방식에 반영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하나금융은 생산적 금융 84조원, 포용적 금융 16조원으로 총 100조원을 투입한다. 생산적 금융 84조원은 국민성장펀드(10조원), 국가전략산업 대출(64조원), 투자(10조원)로 구성된다.
하나금융은 하나벤처스를 앞세운 ‘민간 모펀드 운용 노하우’를 차별점으로 내세웠다. 민간 모펀드를 추가 결성해 총 4조원 규모 자펀드 조성에 기여하겠다는 계획이다. 전략 키워드는 ABCDE(AI, Bio, Culture, Defense&Space, Energy Transition)로써 정부의 첨단전략산업 프레임과 궤를 같이하면서, 투자와 대출 포트폴리오를 동시에 키우는 구조다.
우리금융은 생산적 금융에 74조원, 포용적 금융에 7조원 총 80조원을 투입한다. 핵심은 K-Tech 프로그램에 19조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AI, 바이오, 방산 등 첨단전략산업에서 대표 핵심 기업 1곳을 중심으로 중견·중소·벤처기업까지 연결하는 밸류체틴을 묶어 지원하는 방식이다.
또한 우리금융은 우리은행 내 첨단전략산업 심사 조직을 신설하고, 그룹 신용평가모형 고도화를 통해 ‘투자형 리스크 심사 역량’을 키우겠다는 방침이다.
◇ 한정된 타깃, 몰리는 자금
4대 금융지주의 전략을 나열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모두 AI를 중심축으로 삼고 바이오, 에너지, 인프라, 방산, 콘텐츠를 곁들이는 형태다.
이는 곧 국민성장펀드의 투자 대상의 정의와 맞물린다. 국민성장펀드는 AI, 반도체, 바이오, 백신, 로봇, 수소, 2차전지, 디스플레이, 미래차, 방산 등 첨단 산업과 그 밸류체인을 주요 지원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지주가 추진하는 생산적 금융 중 산업 부문 투자 상당 부문이 국민성장펀드를 경유해 집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유망 분야에 집중 투자해야 하는 구조인 만큼 투자 대상 범위가 무작정 넓어지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이 ‘좁은 타깃’을 향해 정부·금융지주·기존 정책펀드가 한꺼번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I 섹터의 경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AI 혁신펀드’, 바이오 섹터는 복건복지부의 ‘K-글로벌백신펀드’와 투자 대상이 크게 겹친다.
이미 각 부처 산하 정책펀드와 모태펀드 자펀드들이 첨단산업을 향해 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성장펀드와 금융지주 계획까지 얹어지면 특정 기업과 특정 섹터에 정책금융과 민간 자금이 중복 투입되는 구조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와 관련 국회예산정책처는 정무위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국민성장펀드 조성에 따라 금융위원회가 정책펀드 간 투자 대상이 중복되지 않도록 방안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다양한 정책펀드가 개별적으로 조성됨에 따라 정책펀드 간 중복 문제 해소 방안이 필요하며 펀드 운용현황 공개 및 성과평가 강화, 회수재원 국고반환 원칙화 등이 검토돼야 한다”고 보강방안을 제시했다.
◇ RWA·CET1·NPL이 좌우하는 지속 가능성
투자 대상이 한정된 상황에서 자금 쏠림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금융지주가 실제로 ‘얼마나 오래 버틸 건전성 여력’을 갖추고 있는지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생산적 금융을 확대할수록 자본은 빠르게 소모되고, 부실 위험은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508조원 규모의 생산적·포용 금융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제약은 결국 ‘자본’이다.
최근 두 달 사이 급등한 환율이 은행의 위험가중자산(RWA)을 밀어 올리며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깎아내렸는데, 부실채권(NPL)·연체율·커버리지비율 등 기초 체력 지표는 이미 약해지고 있다.
여기에 내년부터 강화될 규제(RWA 하한선 상향)까지 더해지면 금융지주들이 실제 감당할 수 있는 자본비율의 하락 폭과 부실 흡수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가 정책 추진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즉 고위험, 고변동성 산업으로 대출과 투자를 확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금융지주들이 건전성 부담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는지가 생산적 금융의 속도와 지속 가능성을 결정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은행연구실장은 “본격적인 생산적 금융으로의 전환 기조에서 기업대출 확대와 재무안정성 유지 간 균형이 우선 과제로 부상했다”며 “은행의 기업대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생산적 금융을 공격적으로 확대할 경우 적정 연체율과 자본비율 등 재무안정성도 확보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은행 자본적정성의 경우에는 RWA 하한 규제가 올해 60%에서 2026년 초부터 65%로 상향 적용될 것으로 예고돼 자기자본비율 하락 압력이 심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선별·분담·수익모델 전환이 관건
5대 금융지주가 제시한 508조원 규모의 생산적·포용 금융 계획은 전례 없는 규모인데,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정권 코드 맞추기식 경쟁’이라는 의구심도 존재한다.
정부 기조에 따라 자금 공급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단기적으로는 대손비용 증가로 인한 수익성 저하, 장기적으로는 건전성 악화 가능성이 거론된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정부 기조에 맞추려는 분위기 속에서 금융지주들이 앞다퉈 공급 계획을 키운 상황이고, 그만큼 자본 부담과 리스크 압력도 커지고 있다”면서 “지속 가능한 추진력을 확보하려면 은행 외 부문의 이익 기반 확대와 보다 정교한 리스크 관리 체계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실제 은행권의 1~3개월 연체된 대출(요주의여신)과 NPL 규모는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고, NPL 커버리지비율은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 고환율과 RWA 규제 강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처리 등 외부 변수도 자본비율의 하방 압력을 키우고 있다.
결국 508조원 규모의 생산적·포용 금융이 선언에 그치지 않기 위해선 고위험 영역에 대해 정부가 부분보증이나 손실을 분담하는 장치를 마련해 민간 부담을 완화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또 금융지주 차원에선 성장 가능성이 검증된 기업을 선별해 집중 지원하고, 예대마진 의존도를 낮추면서 자산관리, IB, 보험 등 비이자 부문 수익 강화를 통해 충당금 증가와 규제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
정부의 설계와 금융지주의 운용력, 그리고 건전성 위험 통제 능력이 생산적·포용 금융 성패를 최종 결정할 것이라는 데 업계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