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바나나는 마트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이다. 향긋하고 달콤해 아이들도 좋아하고, 가격 부담도 크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바나나를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해도 바나나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제주도의 뜨거운 비닐하우스에서 막대한 화석연료를 사용해 키워낸 귀한 몸이었고, 서민들에게는 특별한 날에나 허락되는 ‘부의 상징’에 가까웠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당시 바나나 한 송이 가격은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결국 우리는 바나나 본질의 가격 뿐 아니라, 우리나라 기후에 맞지 않는 작물을 억지로 길러내기 위한 비효율 비용을 함께 지불하고 있었던 셈이다.
1991년의 바나나 수입 자유화는 한국 사회가 자유무역의 달콤함을 본격적으로 경험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현실 속에서 그대로 작동했다. 필리핀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자연스럽게 자란 바나나를 수입하고, 우리는 우리가 더 잘 만드는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파는 것이다. 각자가 더 잘할 수 있는 산업에 집중해 교역하자는 비교우위론은 고전무역이론의 출발점이자, 오랫동안 세계 자유무역 질서를 떠받쳐온 기본 원리였다.
실제 결과도 강력했다. 비싸고 귀했던 바나나는 가격이 크게 떨어지며 대중적인 과일로 자리 잡았다. 소비자는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상품을 누릴 수 있게 됐고, 기업들은 생산비를 줄이며 세계 곳곳으로 공급망을 넓혀갔다. 우리가 지난 30여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글로벌 가치사슬(GVC)의 출발점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모두가 웃었던 것은 아니다. 제주 농가에는 구조조정의 아픔도 남겼다. 하지만 당시 무역 교과서는 이를 자유무역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진통 정도로 설명했다. 경쟁력을 잃은 산업은 사라지고, 새로운 산업이 더 큰 부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강했다. 세계는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돼 갔고, 기업들은 가장 싼 곳에서 생산해 가장 빠르게 공급하는 ‘적기 생산(Just-in-Time)’ 체제를 효율의 상징처럼 받아들였다.
가장 싼 값보다 믿을 수 있는 편을 찾는 시대
그러나 2026년의 국제통상 질서는 리카도의 비교우위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교우위론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계화의 안정성', '자유무역 체제에 대한 신뢰', '예측 가능한 물류 환경'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그 전제들이 곳곳에서 흔들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의 전쟁, 미·중 패권 경쟁으로 촉발된 공급망의 블록화는 무역의 최우선 순위를 '효율'에서 '안보'로 강제 이동시켰다. 과거에는 가장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할 수 있는 나라가 최고의 파트너였다면, 이제는 '정치적 신뢰를 공유하는 나라'인가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소위 프렌드쇼어링1)(Friend-shoring)과 니어쇼어링2)(Near-shoring)의 등장은 경제적 비교우위가 지정학적 리스크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정치적 가치와 신뢰를 공유하는 우방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해 안보 리스크를 관리하는 전략
2)물류 비용을 낮추고 대응 속도를 높이기 위해 생산 거점을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로 옮기는 전략
기업들도 달라지고 있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공급망을 여러 나라로 분산하고 재고를 쌓아두는 ‘만약의 사태 대비(Just-in-Case)’ 전략으로 움직이고 있다. 반도체, 핵심 광물, 에너지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가의 생사를 결정짓는 안보 자산이 되었다.
과거 바나나 수입 제한이 국내 농가를 보호하기 위한 유치산업 보호론적 성격이었다면, 지금의 수출입 통제는 상대국을 압박하고 자국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무역이 점점 ‘무기’가 되고 있는 셈이다. 리카도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경제 안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리스크 조정 비용'과 무역 공식의 변화
전통적인 무역학은 생산 비용이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상품이 이동한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무역 공식에는 여기에 하나의 변수가 더 추가돼야 한다. 바로 ‘지정학적 리스크 비용(R)’이다.
특정 국가의 인건비와 물류비가 아무리 낮더라도, 통상 관계가 단절되거나 공급망이 정치적 보복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결국 기업은 단순한 생산 비용(C)이 아니라, 리스크 비용(R)까지 함께 계산(C+R)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외 생산비용보다 국내 생산비용이 오히려 더 안정적일 수도 있다. 최근 제주를 넘어 전남 지역까지 바나나와 아열대 작물 재배가 확산되는 현상을 단순히 기후 변화에 따른 적응으로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식량 안보라는 보이지 않는 리스크 비용이 이미 반영돼 있다.
물류비 역시 더 이상 예측 가능한 고정값이 아니다. 홍해 사태와 같은 항로의 불안정성은 비교우위에 기반한 글로벌 분업 구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에너지 가격의 급등락도 제조 원가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린다.
결국 기업들은 비용이 더 들더라도 통제 가능한 지역 안으로 생산기지를 다시 옮기는 리쇼어링(Reshoring)에 눈을 돌리고 있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외주화했던 리스크들이 이제는 통제 불능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다시 쓰는 무역 교과서
이 같은 변화 앞에서 대학과 현장의 통상 전문가들도 더 이상 과거의 방식만 반복할 수는 없다. 우리가 가르쳐온 무역학과 실제 기업 컨설팅의 기준 역시 달라져야 한다.
첫째, 비교우위 개념부터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이제는 단순히 노동과 자본을 얼마나 적게 투입해 더 많이 생산하느냐만으로 경쟁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앞으로는 공급망의 회복력(Resilience) 자체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 학생들에게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을 가르치되, 그것이 안정적인 세계화 시대를 전제로 한 이론이었다는 점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동시에 전시나 준전시(Gray zone) 상황에서 공급망과 전략물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함께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FTA를 '시장 개방의 도구'에서 '가치 동맹의 네트워크'로 재정의해야 한다.
과거 FTA 컨설팅이 관세 절감(Duty Savings)에 집중됐다면, 앞으로는 공급망 안정성과 비관세 장벽 대응까지 함께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IPEF(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나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처럼 안보·환경·인권이 결합된 새로운 통상 규범도 이제는 무역학 교육과 기업 전략 안에서 함께 다뤄질 수밖에 없다.
셋째, 관세사와 통상 전문가의 역할을 '공급망 설계자'로 전환해야 한다.
단순 통관 업무는 AI와 자동화 시스템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공급망 데이터 분석이나 국가별 통상 리스크 예측 역시 AI의 역할이 점점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지정학과 기업 전략, 현장의 이해관계까지 함께 고려해 최종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에 가깝다. AI는 공급망 데이터를 분석할 수는 있어도, 어디까지 리스크를 감수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이제 관세사와 통상 전문가는 단순히 세율과 통관 절차를 다루는 역할을 넘어, 기업의 생산기지와 조달 구조를 전략적으로 설계하는 ‘공급망 설계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AEO(수출입안전관리우수업체) 인증 역시 단순한 통관 혜택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 안에서 신뢰할 수 있는 기업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일종의 ‘안보 인증’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있다.
효율과 안보의 위태로운 균형 위에서
1991년의 바나나는 우리에게 '개방의 달콤함'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2026년의 국제 정세는 우리에게 '고립의 위험'과 '안보의 비용'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자유무역이 가져다준 풍요를 포기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안보 리스크를 외면한 채 효율성만을 쫓을 수도 없는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다.
이제 무역은 더 이상 단순한 비용 계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역이 됐다. 그것은 정치이자 외교이며, 국가 생존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대학 강단에서는 리카도가 얘기했던 자유무역의 원리는 계승하되, 변화한 국제 질서 속에서 그 전제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도 함께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장에서도 기업들이 급변하는 통상 환경 속에서 공급망과 조달 전략을 다시 설계할 수 있도록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바나나 한 송이의 가격에 투영되었던 우리 경제의 성장사는 이제 ‘안보’라는 새로운 변수와 함께 다시 쓰이고 있다. 효율성이 이끌던 무역학의 시대를 지나, 이제 세계는 전략과 안보를 함께 계산하는 새로운 통상 질서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새로운 비교우위를 만들어내는 일이 앞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될 것이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월드클래스 300, NCS워킹그룹 심의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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