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2021년 7월 11일, 페루에서 출발한 건조녹두가 한국행 배에 실렸다. 그런데 이 녹두를 재배했다는 일부 농민의 경작진술서에는 수확 시기가 같은 해 9월로 적혀 있었다. 서류대로라면 아직 밭에 남아 있어야 할 녹두가 두 달 먼저 배에 오른 것이다.
단순한 날짜 착오로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이 녹두가 페루에서 전부 재배·수확된 것으로 인정되면 한·페루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관세율 0%가 적용된다. 반면 원산지를 입증하지 못하면 607.5%의 고율 관세를 물어야 한다. 파종과 수확 시기의 차이가 사실상 ‘무관세냐, 고율 관세냐’를 가르는 구조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한 수입업체는 2021년 9월 6일 페루 소재 수출업체로부터 건조녹두를 들여오며 한·페루 FTA 협정관세율 0%로 신고했다. 거래는 ‘현지 농민→수집상→중간상→수출업체→국내 수입업체’의 단계를 거쳤다. 최종적으로 제출된 자료에는 쟁점 물량을 생산한 농민이 4명으로 기재됐다.
하지만 통관 약 1년 뒤 인천세관이 원산지 서면조사에 착수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세관은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생산 농민과 경작 과정, 수집·판매로 이어지는 거래 흐름을 확인하기 어렵다고 봤다.
세관은 2023년 9월 협정관세 적용이 부적정하다고 통지한 뒤 같은 해 12월 관세와 가산세를 과세전통지했다. 수입업체가 과세전적부심사를 청구하자 관세청은 2024년 3월 페루 관세당국의 검증지원 정보와 원산지 자료를 다시 살펴보라고 결정했다. 페루 측은 같은 해 6월 1차 자료를 보냈지만, 세관은 8월 일부 물량의 FTA 적용을 배제해 관세를 부과했다.
그런데 과세 이후인 2024년 10월 16일 페루 관세당국이 토지등록증, 임대차계약서, 임차료 지급 영수증, 경작진술서, 거래영수증 등을 추가로 보내왔다. 페루 측은 이 자료를 통해 쟁점 녹두가 한·페루 FTA상 원산지 상품임을 입증할 충분한 정보를 확보했다는 취지로 회신했다.
수입업체는 조세심판원에 심판을 청구했다. 심판원은 2025년 5월 페루 측의 추가 자료를 토대로 원산지 기준 충족 여부를 재조사하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세관은 앞서 제출된 자료와 내용이 크게 달라 믿기 어렵다며 기존 처분을 유지했고, 수입업체는 다시 심판을 청구했다.
한·페루 FTA는 페루 영역 내에서 전적으로 재배하고 수확한 식물에만 원산지를 인정하는 ‘완전생산기준’을 적용한다. 단순히 현지에서 선적됐다는 사실을 넘어 실제 경작과 수확 사실이 증빙으로 확인돼야 한다. 심판원이 판단한 핵심 쟁점은 세 가지다.
① 생산자 8명→4명…뒤바뀐 자료와 당국 회신의 한계
수입업체는 페루 관세당국이 현지 조사를 거쳐 원산지 상품임을 입증할 충분한 정보를 확보했다고 공식 회신한 만큼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 농민과 토지 임대인 등이 기업이 아닌 일반인이고, 페루의 FTA 검증 경험도 많지 않아 최초 자료에 오류가 있거나 뒤늦게 새로운 사실이 확인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세관은 2024년 6월과 10월 자료의 사실관계가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생산자는 8명에서 4명으로, 수집상은 3곳에서 2곳으로 바뀌었다. 일부 농민의 수확일과 거래일은 선적일보다 늦었고, 수집상과 중간상 사이를 이어줄 거래 증빙도 없었다.
심판원은 페루 당국의 최종 회신만으로 전체 물량의 원산지가 곧바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회신에 첨부된 토지·경작·거래 자료가 실제 생산 과정과 맞아떨어지는지를 농민별로 따져야 한다는 취지다.
② 1월 파종·5월 수확은 인정…‘선적 후 수확’ 2명은 배제
농민 4명의 소명 자료는 신빙성에 따라 둘로 나뉘었다. 농민 2명의 자료는 시점과 거래 흐름이 일치했다. 정부기관 토지등록증과 함께 2021년 1월부터 5월까지의 임대차계약서, 임차료 영수증이 제출됐고, 경작진술서에도 1월 파종·5월 수확으로 기재돼 7월 선적일 전에 생산이 완료된 사실이 확인됐다. 심판원은 이들 2명이 공급한 물량은 페루산 완전생산물품으로 인정했다.
반면 나머지 농민 2명의 서류는 모순을 드러냈다. 경작진술서와 계약서에 ‘5월 파종·9월 수확’으로 적혀 있어 7월 선적 시점과 맞지 않았다. 수집상 운송증에 적힌 수취지역 역시 생산지에서 380㎞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업체는 재조사 과정에서 파종·수확일을 1월과 5월로 수정한 새 진술서를 냈으나, 심판원은 사후에 핵심 일자를 번복한 서류만으로는 앞선 자료의 불일치가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해당 물량을 원산지 인정 대상에서 제외했다.
③ 재조사 후 동일 처분…‘기속력 위반’ 주장 배척
수입업체는 세관이 앞선 재조사 결정을 따르지 않고 기존 과세 처분을 유지한 것이 기속력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심판원의 판단은 달랐다. 재조사 결정은 제시된 기준에 따라 증빙을 다시 실질 검토하라는 취지이지, 반드시 기존 처분을 취소하라는 명령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실제 세관은 페루 당국이 2024년 10월 보낸 검증지원 정보와 수입업체가 2025년 5월 추가로 낸 경작진술서 등을 검토했다. 심판원은 재조사 결과가 이전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앞선 결정의 기속력을 위반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심판원은 전체 물량을 일괄 과세하거나 전액 면세하는 방식은 타당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증빙의 신빙성이 인정된 농민 2명의 판매량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만큼만 0% 협정관세를 적용해 과세표준과 세액을 다시 경정하도록 결정하고, 나머지 청구는 기각했다.
[참고 심판례: 2025관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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