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대마도(쓰시마섬)는 일본 본토보다 한국(한반도)에 훨씬 더 가깝다. 지리적으로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지만, 거리상으로는 한국과 더 인접해 있다.
한국(부산)과의 거리는 약 49.5km이고, 일본 본토(후쿠오카)와의 거리는 약 132km로, 부산까지가 일본 후쿠오카까지보다 약 2.7배 가까운 셈이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고속선을 타면 약 1시간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면적은 제주도의 38% 정도이고 거제도의 약 1.8배이며, 2025~2026년 기준 대마도(쓰시마시)의 인구는 약 25,000명 ~ 27,000명 사이이고, 대부분 일본인이지만, 한국인이 약 100명 안팎 사는 거로 알려져 있다.
고대~고려 시대에 대마도는 대부분 산악으로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안되고 경작지가 겨우 3% 정도밖에 안 되어 식량 확보를 위해 한국(고려)과의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초기에는 고려와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으나,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이들의 근거지가 되어 고려 연안을 약탈했다. 고려·조선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389년(창왕), 1396년(태조) 등에 박위 등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구 근거지를 소탕했다.
고려 중기부터(*11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간) 대마도는 고려의 영향력 아래에서 조공 성격의 공무역 관리 체제를 유지했다. 당시 고려는 스스로를 동아시아의 중심(천자국)으로 여기는 외왕내제(外王內帝)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주변국이나 지방 세력이 보내오는 무역선을 대등한 상거래가 아니라, 하위 세력이 고려 국왕에게 특산품을 헌납(진봉)하고 국왕이 이에 대한 답례로 회사품(回賜品, 답례 물품)을 내려주는 조공과 하사(진헌 하사)의 격식으로 규정지었다.
이 격식에 맞춰 대마도에서 고려로 보낸 무역선을 공식적으로 '진봉선'이라 불렀다. 진봉선(進奉船)이란, 나아갈 진(進), 받들 봉(奉), 배 선(船)으로, '지방의 특산물(예물)을 받들어 올리기 위해 파견한 배'라는 뜻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조정은 "매년 한 번 진봉을 행하되, 배는 한 번에 두 척(진봉선 2척)으로 제한한다"는 식의 약조를 맺어 해마다 보내는 무역선의 규모를 통제했다(실리적인 교역 통제 제도).
대마도인들이 진봉이라는 형식상 굴욕을 감수하고 고려 왕에게 토산물을 바친 것은 실리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 정부는 상국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대마도가 가져온 물건 가치의 몇 배에 달하는 쌀, 옷감, 공예품 등을 답례(회사)로 듬뿍 얹어주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 남는 장사였다(높은 경제적 이익).
이러한 진봉선 체제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마도를 고려의 통제와 영향력 아래에 있는 번속(藩屬, 제후국이나 신하 나라)으로 보아 사대(事大) 관계의 틀로 인식했다.
일본 중앙 조정(가마쿠라 막부)은 이 무역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대마도 지방 세력이 독자적으로 생존과 경제적 수익을 위해 '진봉'이라는 외교적 형식을 빌려 주체적으로 교역을 수행한 실리적 무역이었다. 이 상호 실리적인 조공·하사식 무역체제는 훗날 조선 시대의 '세견선(歲遣船) 제도'로 이어지는 모태가 된다.
또한, 고려 정부는 대마도주에게 '구당관'이나 '만호' 같은 고려의 관직을 주어 정치·경제적으로 포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과의 무역은 대마도의 생존 줄이었으므로, 고려 말 원나라의 일본 원정과 내부 혼란으로 교역이 끊기자, 생계가 막막해진 대마도인들이 해적(왜구)으로 돌변해 고려 연안을 습격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무역이 활발할 때는 평화로웠으나, 무역이 통제되면 왜구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 고려 조정은 박위 등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1389년 등)하여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무역을 조건으로 왜구를 회유하려 했다.
왜구는 1350년을 시작으로 고려를 침입하며 극성을 부렸다.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은 1389년까지 이어졌고 고려에서는 회유와 무력(대마도 정벌)을 통해 왜구를 통제하였다. 이 시기의 왜구는 정확한 지휘 계통을 갖춘 정규군과 다름없었던지라 고려군으로서는 왜구에 대한 대응이 쉽지 않았다.
이 시기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여 고려의 해군력을 증강한 인물이 바로 최무선이었고, 고려 말 왜구 토벌 과정에서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대표적인 인물이 훗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였다.
대마도주는 매년 조공품을 우마에 싣고 상경하여 더 많은 하사품을 받는 것을 낙으로 여겼으며, 조선 조정에서는 그들이 너무 자주 조공품을 가져오면 하사품이 늘어날 것을 우려해서 수년에 한번씩 오라고 권했다고 한다.
이렇듯 대마도주는 조선왕의 신하이면서 일본 막부의 다이묘(大名)로 조선에 양속관계(兩屬關係)를 유지하며 조일무역의 중개를 했다. 즉, 대마도주는 조선의 조공속국으로 행세하며 많은 호의를 받았지만, 일본 쇼군의 이익을 대변하는 창구 기능을 아울러 수행했다.
조선 태종~세종 때, 왜구의 약탈이 극에 달하자 세종 1년 이종무를 보내 대마도를 대대적으로 정벌했다(1419). 당시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땅'으로 인식하고, 역사적으로 한국 땅임을 문적을 통해 상고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정벌 후 조선은 대마도주(소 씨)의 항복을 받고, 대마도 측의 거듭된 통교 간청 끝에 삼포(부산포, 내이포/제포, 염포)를 개항하여 제한적인 무역을 허용했다(1426). 이는 왜구를 회유하여 농업적 생존을 보장하고 조선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함이었다.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된 곳’으로 보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일본의 일부분으로 인정하면서 대마도주에게 정기적인 무역을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대마도주에게 무역 증명서인 문인(文引)을 발급하여 정해진 수의 세견선(歲遣船)만 부산포 등에서 무역하도록 통제했다. 이를 통해 대마도는 조선의 쌀, 콩, 면포 등을 가져가고 일본의 유황, 향료 등을 수출하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
조선 시대 대마도를 비롯한 일본의 지방 세력들이 무역과 교류를 위해 조선에 매년 정기적으로 보내온 무역선(통교선)을 '세견선(歲遣船)'이라고 하며, 세(歲): 해 세(매년, 해마다), 견(遣): 보낼 견(파견하다), 선(船): 배 선(선박)으로 즉, "해마다 (조선으로) 보내는 배"라는 뜻이다.
고려 시대의 대일 무역선이 ‘진봉선(진상을 올리는 배)’이라 불렸다면, 조선은 이를 체계적으로 법제화하여 '세견선'이라는 제도로 확립했다.
세견선을 타고 온 왜인들은 약속된 삼포(부산포, 제포/내이포, 염포)나 왜관에 머물며 교역을 진행했다. 조선 정부는 이들이 가져온 물품을 사들이고, 그 답례이자 생계 지원의 뜻으로 '세사미두(歲賜米豆, 매년 하사하는 쌀과 콩)'를 비롯한 다양한 식량과 옷감 등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러한 일본과의 교역 규모를 공식적으로 제한하고 통제하기 위한 성문법적 기틀이 조선 세종 때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 이예가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체결한(1443년) 계해약조이다. 계해약조의 내용은, 첫째, 조선은 대마도주에게 매년 200석의 쌀과 콩을 하사한다.
둘째, 대마도주는 조선에 매년 50척의 배를 보낼 수 있고, 부득이하게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정해진 숫자 외에 특송선(特送船)을 보낼 수 있다. 이 두 항목이 계해약조의 핵심이었다. 이는 조선 정부가 식량이 부족한 대마도의 생존을 돕는 동시에, 그들을 조선의 통제권 아래 두려는 회유책이었다.
이 계해약조를 주도했던 인물은 이예(李藝, 1373~1445)로 오늘날 외교부에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할 만큼 조선 역사상 가장 독보적이고 위대한 전문 외교관이다. 신분적 한계를 오직 실력과 충성심으로 극복하며 태종과 세종 대의 대일 외교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예는 본래 울산군의 아전(하급 관리)으로 양반이 아닌 중인 계급이었다. 하지만 1397년(태조 6년), 울산에 왜구가 침입해 군수 이은(李殷)을 인질로 잡고 일본으로 끌고 갔다. 다른 관원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이예는 군수를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왜구의 배에 동승해 일본까지 따라갔다. 일본에서 끝까지 군수를 모시며 정성을 다했고, 이듬해 조선 사신단과 함께 군수를 무사히 모시고 귀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정식 관직[* 종5품 무관 관직인 '부사직(副司直)']을 주었다.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최종적으로 종2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까지 올랐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왜구에게 붙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해 낸 것이다.그는 평생 동안 목숨을 건 험난한 바닷길을 뚫고 대마도, 규슈, 일기수(이키섬), 혼슈, 심지어 멀리 오키나와(유구국)까지 40여 차례나 오갔다.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해 무려 667명의 조선인 피랍민을 귀환시켰다.
당시 한반도 남해안은 왜구(일본 해적)의 노략질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일본으로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 갔다.
가장 뱃길이 멀고 험난했던 유구국(오키나와)까지 태종의 명을 받고 파견되어, 그곳에 노예로 팔려가 있던 조선인 44명을 직접 데리고 돌아왔다. 이예는 8세 때 왜구에 의해 어머니가 납치되는 슬픔을 겪었다. 비록 평생 어머니를 다시 찾지는 못했지만, 타국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군사적으로 왜구를 소탕하는 한편, 평화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어 이들이 해적질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교린(交隣) 정책'을 폈다. 이예는 대마도주를 설득하여 무역선의 규모를 통제하는 약조(세견선 규정 등)를 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왜구들이 해적질을 멈추고 조선이 지정한 삼포(부산포, 제포/내이포, 염포)에서 정식으로 교역하도록 유도하여 남해안의 평화를 가져왔다.
그가 71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대마도에 가서 체결한 인생의 마지막 역작이 바로 계해약조이다. 이예는 대마도주와 치열한 밀당 끝에 무역량의 상한선(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을 규정함으로써, 왜구들의 약탈 본능을 '합법적인 무역 체제' 안으로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 약조 덕분에 이후 약 70년간 영남 지방은 왜구의 대규모 침략 없이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예는 대마도나 규슈 같은 지방 세력뿐만 아니라,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조선 국왕의 공식 사신(통신사)으로 여러 차례 임명되었다. 조선의 불교 경전(대장경 등)을 전달하는 대가로 조선인 포로를 돌려받는 문화 외교를 펼쳤다.
사신으로 파견 갈 때마다 일본 내부의 권력 변동과 정치 상황, 군사력 수준 등을 정밀하게 관찰하여 조선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국가 안보에 크게 기여했다. 사탕수수 종자 도입, 일본식 조선 기술(배 만드는 기술) 및 광물 제련법 등을 조선에 도입해 실용적인 기술 교류에도 앞장섰다.

[프로필 ] 이대복 한국세관역사연구회 회장
• 경영학 박사
• 2021.1. 15 ∼ 관세법판례연구회 고문
• 2010.06~2011.07 관세청 차장
• 2008.09~2010.05 인천공항 본부세관장
• 2006.~2007. 미국 관세청(CBP) 파견근무
• 2002.~2003. 미국 관세/무역전문 로펌(Sandler, Travis &Rosenberg, P.A.) 고문
• 2005년 홍조근정훈장 수상
• 1994년 세계관세기구(WCO) 사무총장상 수상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총장상 수상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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