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국세기본법에 ‘납세자의 권리’가 명문화된 지 30년을 맞았지만, 과세관청의 처분에 맞서 납세자가 활용할 수 있는 사전 권리구제 제도의 실효성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특히 세금이 고지되기 전 과세의 적정성을 다투는 과세전적부심사의 인용률이 20%대에 머물면서 2심제 도입과 납세자보호위원회의 독립성 강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세무사회와 한국납세자연합회는 지난 12일 한국세무사회관 6층 대강당에서 ‘2026년 제2회 납세자포럼’을 열고 납세자 권리보장제도의 시행 현황과 한계, 개선방안을 논의했다.
이번 포럼은 1996년 국세기본법에 ‘납세자의 권리’ 규정이 신설된 지 30년을 맞아 그간의 제도 운영 성과를 점검하고 실질적인 납세자 권익 보호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납세자권리보장제도는 지난 30년간 네 차례 개정을 거치며 7개 조항에서 16개 조항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과세전적부심사와 권리보호요청 등 주요 권리구제 수단이 납세자가 체감할 정도로 실효성을 확보했는지를 놓고 여전히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발제자인 나성길 세무사(법학박사)는 “국세청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재정수입 확보이지만, 공평과세와 적법절차, 납세자 권익 보호가 균형 있게 작동해야 한다”며 “입법·집행·사법이라는 세 축이 균형 있게 돌아가야 진정한 납세자 권리 보장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 “과세전적부심 2심제로 사전 권리구제 강화해야”
나 박사는 ‘납세자 권리보장제도의 시행 현황 분석과 개선방안’ 발표를 통해 과세전적부심사의 낮은 인용률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 2심 구조 도입을 제안했다.
세무서나 지방국세청 단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과세전적부심사 사건을 국세청 본청에서 한 차례 더 심리하도록 해 과세 처분 이전 단계에서 납세자의 권리구제 기회를 확대하자는 취지다.
나 박사는 “과세전적부심사는 고지서가 나가기 전, 즉 과세 처분이 있기 전에 한 번 더 검토 단계를 거치는 좋은 제도”라며 “2심제를 도입하면 가산세 부담 없이 신속하게 권리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고충민원과 권리보호요청 등 실무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제도의 상당 부분이 행정규칙인 훈령에 근거하고 있어 법적 안정성이 충분하지 않다며 법률적 근거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과세전적부심사에서 과세관청의 업무 지연으로 인한 부과제척기간 임박 과세 폐단도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최근 대법원 판례(2016두49228, 2025두31960) 및 조세심판원 결정(2023서7901)에서는 제척기간 임박을 이유로 과세예고통지나 적부심을 생략하는 행위를 납세자의 사전 권리구제 기회를 박탈한 '절차적 권리의 중대한 침해'로 보고, 과세처분 무효·위법 판결을 잇따라 내리고 있다.
나 박사는 "양도소득세 등에서 반복되는 이 같은 문제는 2020년 이후 국정감사에서도 매년 지적되어 왔다"며, 조기 결정 시스템 구축과 신고내용 확인 대상 확대 등 구체적인 방안을 주문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조세행정의 핵심을 ‘국가와 납세자의 대등관계’와 ‘적법절차’에 두고, 납세자 권리보장이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리구제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나 박사가 제안한 5가지 개선방안은 세제 2건 세무행정 3건으로 ▲과세전적부심사 2심제 도입 ▲고충민원·권리보호요청 국세기본법 법제화 ▲현장에 '대등관계 명문화' ▲간추린 개정세법 입법취지 상세화 ▲제척기간 임박 지연처리 개선 등이다.
그는 특히 현행 세무 헌장은 절차적 권리를 나열할 뿐 납세자와 과세관청의 '법적 지위'에 대한 선언이 없기 때문에 "납세자와 과세관청은 조세법률관계에서 대등한 법적 지위를 가지며, 세무공무원은 이를 존중하며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헌장에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는 세무행정의 지향점을 '대등관계'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납세자권리헌장의 권리보장 수준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이다.
◆ “2심제 부작용 따져야”…독립성 강화·국선대리인 확대 제안
2심제 도입을 둘러싼 보완 필요성도 제기됐다.
지정 토론에 나선 박재혁 세무사(세무학 박사)는 2심제 도입으로 심리 절차가 길어질 경우 국세부과제척기간 만료가 임박한 사건에서 사전 구제 절차가 사실상 생략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 세무사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영세 납세자를 위한 국선세무대리인 제도의 적용 세목을 양도소득세와 상속·증여세 등으로 확대하고, 대리인의 전문성 공개와 영상 진술 시스템 도입 등을 통해 소액 사건에 대한 납세자의 대응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선세무대리인 제도는 지식 기부에 의존하고 있는데, 사건 난이도를 고려해 정액 보수를 지급해야 한다”며 “과세전적부심 단계에서 열람·교부 범위와 최신 심판례 등을 정리해 제공하는 기능을 직능단체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허원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2심제 도입에 앞서 부과제척기간과의 관계를 명확히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심사·심판청구와 행정소송 등 사후 불복 절차와 달리 과세전적부심사는 과세처분 이전 단계에서 이뤄지는 만큼, 2심제를 도입할 경우 심리 기간 연장에 따른 부과제척기간 문제를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2심제 도입 시 기존 제척기간 관련 규정을 준용할 것인지, 아니면 과세전적부심사에 적용되는 별도의 특례를 신설할 것인지를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새로운 심리 단계를 추가하기보다는 현행 제도 아래에서 납세자보호위원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거나 재심의 대상과 권한을 확대하는 방식으로도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제언했다.
허 교수는 또 “법률에서는 권리구제의 기본 원칙과 신청 범위를 규정하고 구체적인 대상과 절차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에 위임하는 방식이 현실적”이라며 제척기간이 임박한 과세의 경우 과세관청의 귀책사유 여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억울하면 심판소 가라?”…현장선 위원회 독립성 문제 제기
토론 이후 현장에서는 과세전적부심사위원회 등 납세자 권리구제 기구의 독립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50년 경력의 송춘달 세무사는 과세전적부심사위원회나 이의신청위원회의 위원장을 부과권자인 세무서장이 맡는 구조에서는 납세자의 반론이 충분히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며 외부 전문가를 위원장으로 위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송 세무사는 자신의 과세전적부심 참석 경험을 전하며 “과세전적부심사위원회나 이의신청위원회의 위원장을 부과권자인 세무서장이 맡다 보니, 납세자 측의 정당한 반론에도 ‘억울하면 심판소 가라’는 식의 파행적 운영이 일어난다”며 “지방자치단체 사례처럼 위원장을 반드시 외부 전문가로 위촉해야 객관적인 심의가 가능하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세무조사 과정에서 조사범위가 사실상 확대되는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세무사회 조세제도연구위원장인 이광호 세무사는 “특정 조사대상 연도를 정해 조사를 시작했음에도 전년도 동일 이슈를 이유로 과거 5년 치 전체에 대한 수정신고를 요구하는 관행이 여전하다”며 조사범위 확대 제한 원칙이 현장에서 철저하게 준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세무사는 조세심판 과정에서 납세자에게 충분한 의견 진술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도 냈다.
그는 “조세심판원에 의견 진술을 가면 업무가 많다 보니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사흘이 걸려 준비한 문제를 심리하는 만큼 충분한 진술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 과세전적부심 인용 10건 중 2건…사후 불복보다 낮아
이날 제시된 통계에서도 사전 권리구제 제도의 실효성 문제가 드러났다.
과세전적부심사의 인용률은 2017년부터 2024년까지 8년간 평균 21.5%로 집계됐다. 납세자가 과세에 이의를 제기한 사건 10건 가운데 약 2건만 과세 전 단계에서 주장이 받아들여진 셈이다.
이는 사후 불복 절차인 조세심판원 심판청구의 인용률보다 낮은 수준으로, 과세 처분 이전에 납세자의 권리를 구제한다는 제도 취지를 살리기 위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같은 기간 고충민원 제도의 평균 인용률은 70.6%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권리보호요청 제도의 세무조사 분야 시정률은 32% 수준으로 제시됐다.
과세전적부심사 제도는 1996년 ‘과세적부심사사무처리규정’을 통해 도입된 뒤 1999년 국세기본법에 명문화돼 2000년부터 법률에 근거한 사전 권리구제 제도로 시행됐다.
납세자는 세무조사 결과 통지나 과세예고통지를 받은 날부터 일정 기간 내 과세전적부심사를 청구할 수 있으며, 주장이 받아들여지면 세금이 고지되기 전에 과세 내용을 바로잡을 수 있다.
정부가 발표한 ‘2026년 세제개편안’에는 과세전적부심사 결정이 지연될 경우 납부지연가산세 감면을 확대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으며, 2027년 1월 1일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 “납세자는 국가 재정의 기여자…절차적 정당성 지켜져야”
좌장을 맡은 오문성 한국조세정책학회 이사장은 납세자 권리보장의 핵심으로 절차적 정당성을 꼽았다.
오 이사장은 “납세자는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확실한 기여자이자 소비자”라며 “조세 불복 과정에서 실체적 진실 규명 못지않게 절차적 정당성이 엄격히 지켜져야 진정한 납세자 권리 보호가 완성된다”고 총평했다.
그는 “세법의 소급 적용에 대해 무덤덤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며 “최근에는 경과 규정을 적용할 수 있는 기간이 너무 짧아 시혜를 주는 것처럼 보고 있는데, 이는 납세자 권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지적했다.
나성길 박사는 마무리 발언에서 “오늘 제시된 지정 토론자들과 현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보완해 논문의 완결성을 높이겠다”며 “납세자의 권리 보장은 국세청뿐만 아니라 입법부, 사법부, 그리고 세무사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 유기적으로 협력할 때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고 밝혔다.
허 교수 등이 제기한 2심제 도입과 부과제척기간 간 충돌 가능성에 대해서는 “과세전적부심사 2심제 도입 시 제척기간 충돌 문제는 운용으로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며 “대개 5년 이내, 그중에서도 3년 안에 있는 사건이 많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포럼을 공동 주최한 최원석 한국납세자연합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1996년 국세기본법에 납세자의 권리 규정이 제정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집행 현황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며 “앞으로도 조세 정의 실현과 납세자 권익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구재이 한국세무사회 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정부는 세무행정에서 납세자 권리가 남용될 정도로 보장된다고 생각하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권리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온도 차가 존재한다”며 “국민 생활과 기업 활동 현장에서 세무사가 납세자의 권익을 제대로 지켜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과 제도 개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구 회장은 최근 정부가 발표한 ‘2026년 세제개편안’을 언급하며 “국민이 원하는 세금제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국회의 충실한 입법을 촉구한 바 있다”며 “세금제도의 주인은 바로 납세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진 제2주제에서는 김상술 세무사(세무학 박사)가 ‘상속·증여세 등 감정평가제도의 법적 쟁점과 입법적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문예영 배화여대 교수와 안만식 세무사(세무법인 센트릭)가 토론자로 나서 상속·증여세 부담과 감정평가제도를 둘러싼 주요 쟁점과 개선방안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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