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안종명 기자) 한국납세자연대(남우진)가 정부가 추진 중인 이른바 ‘주가누르기 방지법’에 대해 실효성이 부족하다며 제도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대주주가 상속·증여 과정에서 주가를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해 세 부담을 줄이는 행위를 막겠다는 입법 취지와 달리, 현재 정부안은 대주주에게 사실상 회피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납세자연대(이하 연대)는 지난 12일 성명서를 내고 “‘주가누르기 방지법’을 ‘주가누르기 면죄부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며 “재정경제부는 기득권의 탈출구가 아닌 실효성 있는 주가누르기 방지책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연대는 기업의 실질가치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경영권 승계 등을 앞두고 주가가 장기간 저평가된 상태로 유지될 경우 피해가 대주주에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주가 상승을 기대하고 투자한 소액주주의 재산가치가 훼손되고, 기업의 성장과 주주환원도 제약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속·증여세 부담은 낮아지는 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은 다수의 일반 투자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연대는 주장했다. 조세제도가 이러한 결과를 사실상 방치한다면 단순한 세금 계산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공평과세 원칙과 자본시장 공정성이 함께 훼손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상속·증여재산을 평가할 때 시장가격을 존중하는 원칙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특정 이해관계에 따라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낮게 형성되거나 유지됐다는 객관적 정황이 있다면 시장가격만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 복잡한 요건·심의절차 우려
한국납세자연대는 정부안에 포함된 각종 판단기준과 심의절차가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제재 요건이 복잡하거나 상대적 순위·비교 기준에 의존할 경우 실제 적용 과정에서 예외와 분쟁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정부가 발표한 세제개편안은 장기간 저평가된 저PBR 기업이나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행위 이후 주가가 급락한 기업을 ‘주가 누르기’ 추정 대상으로 보고, 상속·증여세 산정 때 주식 평가기간을 현행보다 크게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PBR 기업의 경우 현행 평가액의 1.3배와 장기 평균 주가 중 높은 금액을 적용하는 방안도 제시됐다.
하지만 정부안은 최근 13개 반기 중 12개 반기 동안 코스피 업종별 PBR 하위 25% 또는 코스닥 하위 10%에 해당하는 경우 등을 추정 요건으로 제시해 기업들이 일부 기간에만 지표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회피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또 주가 누르기 해당 여부를 국세청 산하 평가심의위원회의 판단에 맡기는 구조에 대해서도 납세자의 예측 가능성과 법적 명확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연대는 “주가 누르기를 막겠다면서 입법 단계에서 빠져나갈 문을 여러 개 만들어 놓는다면 방지법이 아니라 사실상 면죄부법이 될 수 있다”며 정부가 사후 심의와 주관적 판단에 과도하게 의존하기보다 납세자가 예측할 수 있고 과세당국이 일관되게 집행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세수 아닌 자본시장 정상화 문제”
연대는 주가누르기 방지를 상속·증여세수를 늘리기 위한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 증시가 장기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겪어온 배경에는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대주주 중심 경영,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사이의 이해관계 불일치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경영권 승계를 앞둔 대주주에게는 낮은 주가가 유리하고 일반주주에게는 높은 주가가 유리한 구조가 지속된다면 기업가치 제고와 주주가치 보호에도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연대는 설명했다.
이에 따라 주가누르기 방지는 세무행정에 국한된 과제가 아니라 공정한 과세와 소액주주 보호, 기업가치 제고, 지배구조 개선, 자본시장 신뢰 회복을 함께 다뤄야 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한국납세자연대는 정부와 국회에 ▲현행 주가누르기 방지방안의 원점 재검토 ▲기업의 실질가치와 객관적 경제지표를 반영한 과세체계 마련 ▲상대적 순위 기준과 모호한 고의성 판단 및 복잡한 심의절차 최소화 ▲소액주주 보호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제도 설계 등을 촉구했다.
◆ 이소영 의원, ‘PBR 0.8배법’ 제안
국회에서는 앞서 정부안과 다른 방식으로 주가 누르기를 차단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 된 바 있다.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5월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의원의 법안은 상장주식의 평가액이 세법상 순자산가치의 80%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 주가를 그대로 과세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고 비상장주식 평가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주가순자산비율(PBR)이 0.8배 미만인 상장사라면 자산가치와 수익가치를 반영해 주식을 평가하고, 평가액의 하한도 순자산가치의 80%로 설정하도록 했다.
주가가 순자산가치의 80%보다 낮더라도 상속·증여세를 낮은 시가 기준으로 계산하지 않도록 해, 대주주가 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주가를 낮게 유지할 유인을 없애겠다는 취지다. 이 의원의 법안에는 상장회사 최대주주 주식에 적용되는 20% 할증평가를 폐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의원은 정부안이 저PBR 여부와 기업가치 훼손 행위, 주가 하락률 등을 종합해 주가 누르기 여부를 추정하는 방식인 데 비해, 자신의 법안은 PBR 0.8배라는 객관적 수치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설명해왔다.
다만 순자산가치만으로 기업의 적정가치를 판단하기 어렵거나 업종별 특성이 다른 기업까지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과세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따라서 향후 국회 논의에서는 객관적 기준의 장점과 업종·기업별 특성을 반영할 수 있는 보완장치를 어떻게 조화할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 이 대통령 “본래 취지 살려 재검토”
이재명 대통령도 정부안의 보완 필요성을 인정하고 전면 재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지난 7일 참모들과의 상황 점검 회의에서 주가누르기 방지법과 관련해 정부안이 당초 제도 취지를 충분히 반영했는지 다시 살펴보라고 주문했다.
정부가 앞서 발표한 방안은 장기간 저평가된 기업의 주가 평가기간을 최대 6년 6개월까지 확대하고, 현행 평가액의 130% 또는 장기 평균 주가 중 높은 금액을 과세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추정 요건과 심의절차가 실제 주가 조작이나 의도적인 기업가치 훼손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지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인 여당 일각에서는 이소영 의원안처럼 주가가 아닌 세법상 순자산가치의 일정 수준을 상속·증여세 평가의 하한으로 설정하는 방안을 정부안의 보완책으로 검토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실제로 더불어민주당 이훈기 의원도 순자산가치의 80%를 평가 하한으로 두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다만 정부와 국회가 최종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제도를 수정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주가누르기 행위를 차단하면서도 업종 특성과 기업의 불가피한 경영 상황을 반영해야 하는 만큼, 적용 요건의 명확성과 납세자의 권리 보호를 함께 확보하는 것이 향후 입법 논의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한국납세자연대는 “대주주 한 사람의 세 부담을 낮추기 위해 수많은 투자자의 재산가치가 희생되는 시장은 정상적인 시장이라 할 수 없다”며 정부와 국회가 이름뿐인 방지법이 아니라 실제 시장에서 작동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거듭 촉구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
2
3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