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조선과 대마도(쓰시마 번) 사이의 무역은 ① 국가간의 예물 교환 성격인 공무역, ② 왜관내 시장에서 상인들끼리 거래인 사무역, ⓷ 비정기적인 구청, 구무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공무역은 조선-대마도간 외교의례에 결합된 정기적 교역으로 쓰시마 도주가 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예물(진상)과 그에 대해 조선 정부가 주는 답례품(회사)의 형태이다.
실질적으로는 쓰시마 번이 필요로 하는 쌀, 면포 등을 조선 정부가 지급하고, 조선은 일본의 구리, 황 등 전략 물자를 확보하는 '국가 간 거래'였다. 공무역은 조선과 대마도 측이 합의한 정량·정목에 따라 이루어진 제한적 교역으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공무역(公貿易) 이외에, 조선 관리의 입회 아래 허가받은 양국 상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거래인 개시무역(開市貿易), 밀무역 상인[잠상(潛商)]들의 불법적 거래인 밀무역이 있었다. 사무역도 원칙적으로는 공무역보다 자유로웠지만, 실제로는 왜관의 장소·시기·참여자·통행 범위와 품목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뒤따랐다.
사무역인 개시(開市)무역은 부산의 왜관 내에 설치된 '개시대청'에서 정해진 날짜에 정기적으로 조선 상인과 일본(쓰시마) 상인이 직접 만나 거래하는 시장형 거래로, 조선측의 허가를 받은 상인과 일본측 상인이 직접 물품을 교환하였다.
개시무역의 대표 품목으로는 조선의 인삼, 면포, 쌀, 종이와 일본의 은, 동, 구리, 유황 등이 꼽힌다. 특히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을 매개로 한 교역은 동아시아의 물자 유통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중국산 비단과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더해지면서 왜관 무역은 국제적 중계무역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조선 상인과 왜관 무역은 일본 은, 조선 인삼, 중국산 비단과 견직물의 유통망이 서로 맞물리는 동아시아 중계무역의 한 축을 이루었다.
즉 조선 인삼, 중국 비단, 일본 은의 무역로가 왜관에서 만났고, 왜관 무역은 이 세 물품의 수요·공급과 연동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대마도-부산-의주-만주로 이어지던 은의 유통로를 '실크로드(Silk road)'에 빗대 '실버로드(Silver road)'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청(求請)은 임진왜란 이후 막부로부터 대조선 외교와 무역을 위임받은 대마도가 조선에 필요한 물품을 요청하면 조선에서 이를 지급하거나 교역을 허가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구청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뉘는데, 대마도에서 사신이 내왕할 때 답례의 뜻으로 회사품(回賜品)과 함께 정기적으로 정해진 종류와 수량을 아무 대가 없이 무상(無償)으로 내려주는 것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대마도가 조선에 필요한 물품(약재, 도자기 등)을 요청하면 교역을 허가하여 유상으로 지급하는 것이 있다. 후자를 특히 구무(求貿)라고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세관이나 관세라는 제도가 없던 조선 정부로서는 통교자(通交者) 관리업무가 큰 골칫거리였다. 조선에서는 일본과의 공식 교역 및 외교를 위해 허가를 받은 일본인을 ‘통교자’라고 불렀다.
이들은 주로 대마도(쓰시마) 번에서 파견한 사절, 조선의 허가를 받은 일본 상인, 통역관이나 수행원, 외교 문서를 전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조선 정부가 발급한 허가에 따라 부산 왜관 등을 통해 출입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조선과의 무역이 큰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통교 허가증 위조, 정원을 초과한 입국, 허가된 품목 외의 물품을 거래하거나 세금을 피하는 일이 빈번했고, 원래 대마도 번이 일본인의 조선 왕래를 관리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자, 이들을 사칭하거나 불법적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늘어나 조선 정부의 무역관리에 큰 부담이었고, 어찌보면 감당 불가였다.
조선 정부는 무역관리를 위하여, 출입 인원 제한, 허가증(문인·도서)의 엄격한 확인, 부산 왜관 밖 출입 금지, 일정 기간 체류 후 반드시 귀국 등의 규정을 시행했다.
그럼에도 불법 왕래와 밀무역은 계속되었고, 무역 통제 강화· 곡물과 면포 등 교역 물자의 제한· 일본 거주민에 대한 관리 강화등 조선 정부가 무역 규모와 거주를 더욱 엄격히 제한하였고, 이에 일본 상인과 대마도 세력은 경제적 손실로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다.
드디어 1510년(중종 5년) 4월 부산포·제포·염포(삼포)에 거주하던 4~5천명의 대규모 일본인 거류민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무력 반란을 일으켰다[삼포왜란(三浦倭亂)].
이들은 부산첨사를 살해하고, 제포첨사를 납치했으며, 웅천성과 동래 일대를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방화하였다.
이에 조선은 황형과 유담년 등이 이끄는 관군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일본 세력은 대마도로 퇴각했다. 조선은 군인과 백성 약 270여명이 희생되고, 수백 채의 민가가 불탔으며, 일본 측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고 선박 여러 척을 잃었다.
이후 조선은 강경한 조치를 취하여, 삼포를 폐쇄하고 일본과의 통교를 일시 중단했으며, 이후 대마도가 사죄하고 재교역을 요청하면서, 일본 선박 수를 절반으로 축소하고, 대마도에 지급하던 지원 물자를 감축하며, 일본인의 거주를 제한하는 등, 조선의 대일 무역은 삼포왜란 이전보다 훨씬 엄격하게 관리하였다.
삼포왜란은 단순한 일본인의 반란이 아니라, 조선이 대외무역과 국경·항만 관리를 한층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조선시대 왜관(倭館)은 단순히 일본인이 머무는 숙소가 아니라, 일본 사절과 상인이 일정 기간 머물며 교역할 수 있도록 조선이 허용한 제한적 거류·무역 공간이었다.
치외법권적 장소가 아니라, 조선의 법과 규정 아래 운영되는 철저한 통제 공간이었다. 왜관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주요 시설은, 일본 상인의 숙소, 창고, 무역 거래소, 통역관 사무실, 세관 기능을 하는 검사소, 선박 접안시설, 창고 및 물품 보관소 등이 있었다. 일본인은 허가 없이 왜관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조선 관리가 항상 감시했다.
대마도에서 온 무역 사절이나 선원들은 정해진 업무 기간(보통 수개월 내)이 지나면 반드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왜관은 조선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처벌과 형 집행 역시 조선의 관할 아래 이루어졌다.
왜관에서는 출입 선박 검사, 출입국 허가, 수입·수출 물품 검사, 관세 및 세금 징수, 밀무역 단속, 거래 기록 작성, 공무역 관리등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다른 나라에서도 세관(Customs) 업무 초기에는 이런 형태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왜관의 기능들이 발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관, 출입국관리소, 종합보세구역, 자유무역구역, 외국인 거류지등을 그려보면 된다.
왜관은 치외법권 구역이 아니라, 조선의 법과 규정 아래 운용된 허가된 통제 공간이었고, 조선은 왜관을 통해 일본과의 교류를 일원화·통제하여 국경 관리를 하였으며, 대마도는 왜관 무역에 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규정 위반 시 조선이 무역 중단을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왜관은 1407년 부산포(釜山浦, 부산), 내이포(乃而浦, 진해)에 처음 설치되었고, 1418년 염포(鹽浦, 울산)에 추가 설치되었다.
이후 1510년 삼포왜란 이후 대부분 폐쇄되었고,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회복되면서 부산에 다시 왜관이 설치되었고, 두모포왜관(1607), 초량왜관(1678) 순으로 이전하였다.
조일 양국 사이에 국교 재개 교섭이 진전되면서 1606년부터 정식 왜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607년 부산진에서 서쪽으로 5리 떨어진 두모포에 왜관이 조성되었다.
두모포 왜관은 72년간 존속했는데, 조·일간의 외교·무역에 필요한 여러 가지 규정과 왜관 운영방침 등이 이 기간에 성립되었다. 두모포 왜관의 전체 면적은 약 1만 평 정도이고, 뒤쪽엔 구릉으로 이어지고 앞쪽으로는 바다가 있어 지세가 평이하고 낮았다.
점차 조일 양국 관계가 안정되고 무역량이 늘면서 쓰시마에서는 큰 규모의 왜관을 요청했다. 1678년(숙종 4년) 초량(草梁, 부산 동구 초량 일대)에 새롭게 왜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초량왜관은 대일본공관(大日本公館)으로 성격이 바뀔 때까지 약 200년간 조선과 일본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초량왜관은 1675년 3월에 착공되어 1678년 4월에 완공되었다. 쓰시마의 목수, 미장이, 잡역부 등 150명이 조선의 목수, 임부들과 함께 건축공사에 참여했다.
초량왜관의 동남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가운데에는 용두산(龍頭山)이 있고, 동남쪽 모서리 부분에 용미산(龍尾山)과 그 아래에 선창이 있었다. 규모는 10만 평 내외로 두모포 왜관에 비해 10배가 넓었고, 왜관 담은 처음에는 토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1709년에 2m 높이의 돌담으로 바뀌었다.
왜관에는 4~5백명의 성인 남자들이 쓰시마에서 파견되었는데, 관수, 재판, 대관, 조선어 통역을 담당하는 통사(通詞), 치안을 담당하는 금도(禁徒) 등을 비롯한 쓰시마의 관리나 쓰시마 도주의 허가를 얻어 무역하러 온 상인들이었으며, 이들의 통행 범위와 왜관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다.
개시무역에는 관청에서 발급한 행장(行狀)을 가진 특권상인만 참여할 수 있었다. 개시 무역상인이 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호조에서 발급하는 증명서(행장) 소유 여부였다. 행장이 없는 경우 밀무역 상인으로 간주되어 엄중한 처벌 대상이었고 경우에 따라 중형(사형)이 선고되었다.
개시무역은 조·일 양국 관리들의 감독 아래 개시대청에서 이루어졌다.
개시무역을 담당한 조선 상인은 동래상인으로 1678년에 20명을 정했다가 1691년 30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에는 서울상인과 개성상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동래상인은 동래 출신의 상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왜관에서 대일무역에 종사했던 상인을 의미한다.
1678년(숙종 4) 구관인 두모포왜관에서 신관인 초량왜관으로 옮기면서, 무역상인 제도가 새로 만들어졌다. 상인의 수를 제한하는 정액제가 그것이다. 70~80명의 조선 상인을 20명으로 정하는 정액제가 1678년 처음 실시되었다. 20명은 모두 서울 상인이었다.
정액제는 2년 후인 1680년에 폐지되었는데, 이로 인해 상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1691년(숙종 17)에 정액제가 부활되고, 동래상인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만들어졌다.
동래상고정액절목이 그것이다. 절목을 만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밀무역을 막고, 개시를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정원은 30명으로 정하였다. 개시에는 동래부가 지급하는 패가 있어야 참여할 수 있었다.
패를 받은 상인을 수패상고라고 불렀다. 동래상인은 단순한 지방 상인이 아니라 조선이 일본과 공식적으로 교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에서 활동한 국제무역 전문가였다. 주요 역할은 일본 상인과 가격 협상, 조선 물품 공급, 일본 물품 구매, 물품 운송, 환전 및 결제, 통역관과 협력 등이었다.
이를 통해 축적된 무역 관리와 물품 검사, 출입 통제의 경험은 훗날 우리 한국 세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무역업도 허가제, 등록제, 신고제, 완전자유화(2000. 1. 1·∼)의 순서로 발전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조선-대마도 무역은 조선 후기 경제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동래상인은 부산 지역 경제 발전, 전국 물품 유통, 일본 은의 유입, 인삼 수출 확대 등을 이끌었다. 당시 부산은 한양 다음가는 국제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도 18세기 들어 차츰 쇠퇴하기 시작한다. 몇 가지 요인이 겹쳤다. 일본 국내에서 인삼 재배에 성공하고, 중국-일본 직교역 확대, 막부 통제 변화, 조선의 대일정책, 일본의 은 유통 통제, 동아시아 해상질서 재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대마도 중심의 중개무역이 점차 쇠퇴해 가며 예전 같은 활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문을 열되 마음대로 드나들 수는 없게 하고, 거래를 허용하되 철저히 통제했던,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무역은 바로 그런 질서 위에서 움직였다. 바다를 사이에 둔 두 세계는 그렇게 만나고, 제한되고, 다시 이어졌다.

[프로필 ] 이대복 한국세관역사연구회 회장
• 2021.1. 15 ∼ 관세법판례연구회 고문
• 2010.06~2011.07 관세청 차장
• 2006.~2007. 미국 관세청(CBP) 파견근무
• 2002.~2003. 미국 관세/무역전문 로펌(Sandler, Travis &Rosenberg, P.A.) 고문
• 2005년 홍조근정훈장 수상
• 1994년 세계관세기구(WCO) 사무총장상 수상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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