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나단(Nathan) 작가)
“지금 왕(제나라 선왕)께서
백성과 함께 즐기신다면
훌륭하게 왕 노릇을 하시는 겁니다.” - 〈양혜왕 하〉2.1
대학교 동기가 정부에서 주는 큰 상을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너무 기뻤지만 가족을 제외하고는 기쁜 마음을 같이 나눌 곳이 없었는지 동기 단톡방에 조심스럽게 수상 사실을 알렸습니다. 많은 동기들이 친구의 수상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 친구 역시 적잖이 뿌듯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기쁜 일이 있다면 다른 사람과 같이 공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는 말처럼요. 하지만 때로는 그 기쁨의 공유가 지나칠 때에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뭇매를 맞거나 질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장면입니다. 어떤 고등학생의 어머님이 자신의 아이가 전교 1등을 했다고 성적표를 인증해서 올렸습니다. 그동안 아이가 너무 고생한 것이 대견하다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많은 어머님들이 축하하고 부럽다는 댓글을 남겼지만, 혹자는 시기심도 들었을 겁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교 1등이 아닐 테니까요.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기쁨을 공유하는 것은 조심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나의 기쁨이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과 아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자랑스러운 자식이지만, 이를 지켜본 부모들 중에는 자신의 자식들과 비교하면서 오히려 상대적인 열등의식과 불행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민동락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예전 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맹자》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제 선왕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음악이 주는 기쁨을 알았지만, 이를 다른 신하들과 마음놓고 즐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맹자가 제 선왕을 찾아가서 질문했습니다.
“왕께서 예전에 장자(장포)에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맞는지요?”
왕은 돌연 안색이 변했고, 맹자의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인은 선왕의 음악이 아니라 단지 세속의 음악을 좋아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제 선왕은 당시 군주로서 사사로운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 옳은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유가적 윤리의식 때문에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왕을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혼자 음악을 즐기는 것과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거울까요?”
왕은 대답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이 낫지요.”
맹자는 이윽고 자신이 생각한 결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백성과 함께 즐기신다면 훌륭하게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여민동락(與民同樂)이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여민동락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맹자는 이 말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서 언급합니다. 먼저 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왕이 음악을 연주한다면 백성들은 왕의 종소리, 북소리, 피리 소리를 듣고는 모두 골치가 아파하고 이마를 찌푸리면서 이렇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기를 좋아하시지만,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곤궁하게 살도록 하셨을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형제와 아내와 자식이 흩어지게 하셨는가?”라고요.
왕이 사냥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수레와 말소리, 깃발의 아름다움을 보면서도 “우리 왕께서는 사냥을 좋아하시지만,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곤궁하게 살도록 하셨을까?”라고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왕이 음악을 연주할 때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할 때도 백성들이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스하고, 생계에 대한 근심걱정이 없어야 왕이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도 같이 기뻐하고 응원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백성들은 기쁜 얼굴빛으로 “우리 왕께서는 아마 병도 없으시겠네. 어떻게 이렇게 음악을 잘 연주하실까? 어떻게 이렇게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말이죠.
‘이익’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평소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내가 잘 될 때 같이 기뻐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함께 걱정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의 행복을 질투하고, 불행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인간세상에서는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누구에게나 응원과 격려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평소 나와 친분이 있던, 또는 그렇다고 믿었던 사람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서 기쁨과 응원, 안타까움과 슬픔이 부족했다면 그러한 상대방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의 행실을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답이 나옵니다.
내가 평소 ‘덕’을 베풀고 행하면 ‘여아동락(與我同樂)’, 즉 내가 베푼 삶의 태도에 공감해 나와 기쁨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물론 내가 꾸준하게 베푼 ‘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무관심하다면 그러한 인간관계는 일찌감치 정리하는 편이 낫겠죠.
제나라 선왕과 더불어서《맹자》에서 빌런 역할을 했던 양 혜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진심으로 깨닫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예전 위나라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잦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패배를 일삼으면서 국력은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맹자》의 첫 편에서 양 혜왕은 맹자를 보자마자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했고, 맹자는 “하필 이익을 말하십니까? 오직 인의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했습니다. 양 혜왕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가치관이 ‘이익’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나마 국가의 이익을 생각했다면 나았겠지만,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위, 쾌락만 생각했던 것이죠.
남에게 베풀고 평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사람은 ‘이익’을 가치에 두지 않고, ‘나눔의 기쁨’에 가치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 ‘동고동락’하는 것입니다. 만약 삶의 가치를 오직 이익에 둔다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여민동락’의 진정한 의미를 누리지 못할 겁니다.
물론 나처럼 오직 이익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은 겉으로는 기쁜 척하겠지만요.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이익이 사라진다면 자연스럽게 썰물처럼 빠져나갈 허무한 인간관계일 겁니다. 결국 여민동락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태도가 만들어내는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내가 베푼 덕이 무엇인지,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눌 사람이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프로필] 조형권(나단) 작가
•《치밀한 리더의 한 수,《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삶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출간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논어를 읽다》 출간, 교보문고 MD의 선택
•《적벽대전 이길 수밖에 없는 제갈량의 전략기획서》 ,《공부의 품격》 출간
•(현)SK그룹 내 마케팅 임원
•성균관대학교, EMBA 석사, 고려대학교 전기공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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