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로폰 소리가 듣고 싶은 날 ㅡ 김혜주
들꽃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랍 속 오래된 만년필 촉이
뭉그러졌는데도
잉크병은 아직 바닥을 비우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는
지나가는 작은 소리들도 잘 들려 옵니다
마음이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묵은 감정이 선명해져 오는 것은
멀리서 낯선 존재로 살아온
만년필과 잉크병 같은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펜 뚜껑을 천천히 열어봅니다
글씨 속에서 흔들리는 내가
보이는지요
너무 먼 데서
우리는 하루를 살았습니다.
[詩 감상] 양현근 시인
먼 데서 돌아와, 마음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밤
고요한 밤,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아련한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어 봅니다. ‘들꽃 우체국’이라는 구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느새 싱그러운 풀내음이 번져 나갑니다. 뭉그러진 만년필 촉과 여전히 줄지 않은 잉크병의 대비는, 닳아버린 일상 속에서도 차마 비워내지 못한 우리의 못다 한 진심 같아 마음이 시큰해집니다.
사방이 적막한 밤에야 비로소 들려오는 ‘마음의 발자국 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타인처럼 낯설어진 나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글씨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발견했다는 그 담담한 고백은, 외로움을 넘어 투명한 정직함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너무 먼 데서 우리는 하루를 살았습니다”라고요. 내 안의 목소리보다 세상의 소란에 더 귀 기울이며 살아온 우리에게 건네는 아픈 성찰입니다. 오늘 밤만큼은 무뎌진 펜을 꺼내어, 그동안 너무 멀리 떨어져 지냈던 내 마음에게 다정한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맑고 영롱한 실로폰 소리처럼, 잊고 살았던 순수함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봄의 초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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