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최근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가장 뼈아픈 지표는 성장률이 아니다. 수출도, 고용도 아닌 바로 ‘소비’다. 지난 수년간 한국의 민간소비는 성장 국면에서도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글로벌 경제가 기지개를 켜는 동안에도 유독 한국의 소비 회복만 더딘 까닭은 무엇일까. 통계는 냉정하다. 2000년대 초반 GDP 대비 56%에 달했던 민간소비 비중은 최근 45% 안팎까지 주저앉았다.
주요 선진국 평균이 55~60%임을 감안하면, 한국은 구조적으로 ‘소비가 허약한 나라’로 전락한 셈이다. 이는 일시적인 경기 침체의 여진이 아니다. 소비가 자생적으로 살아날 수 없는 토양으로 생태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족쇄는 역시 가계부채다. GDP를 웃도는 부채 규모도 문제지만, 더 치명적인 것은 상환 부담이다. 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액 비율(DSR)은 2025년 현재 약 12%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단기적 금리 변동의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 누적된 부채 구조의 업보(業報)다. 이제 가계는 소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환을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소비 여력이 아닌 상환 여력이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소득의 상당 부분을 빚 갚는 데 헐어야 하는 상황에서, 소비 위축을 단순히 ‘심리 위축’으로 진단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지갑을 닫은 것이 아니라, 열 지갑이 없는 상태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자산 가격이 오르면 소비가 늘어난다는 ‘부의 효과(Wealth Effect)’ 공식도 깨졌다. 과거엔 집값이 오르면 씀씀이가 커졌지만, 지금은 정반대다. 집값 상승은 소비 확대가 아닌 불안과 부담으로 직결된다. 유주택자에게 상승한 자산 가치는 당장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언젠가 닥칠 하락 위험에 대비해 묶어둬야 할 ‘잠긴 돈’일 뿐이다.
반면 무주택자에게 집값 폭등은 생존을 위협하는 생활비 압박 그 자체다. 실제로 집값 상승기에도 소비는 정체되거나 뒷걸음질 쳤다. 자산 효과가 사라진 것을 넘어, 이제는 소비를 갉아먹는 역효과를 내고 있다.
대출의 질(質) 또한 악화되었다. 늘어난 부채의 대부분은 생산적 소비가 아닌 부동산 구입 등 자산 취득에 묶여 있다. 돈은 풀렸으되 실물 경제의 모세혈관으로 흘러들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소비는 현재가 아닌 미래에서 차입된다. 오늘의 빚은 향후 수년간의 미래를 저당 잡는 족쇄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주거비, 교육비, 돌봄 비용 등 필수 지출은 구조적으로 급증했다. 여가나 문화 같은 ‘숨 쉴 구멍’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생존을 위한 비탄력적 지출이 채우고 있다. 겉보기에 소비 총량이 유지되는 듯해도, 그 내막은 훨씬 팍팍해진 것이다.
금융과 실물의 괴리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금융의 덩치는 비대해졌지만, 그 성장이 가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숫자는 살찌고 있는데 삶은 야위어가는, 이 기묘한 불일치가 체감 경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결국 작금의 소비 부진은 심리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가계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줄이고 있지만 소비 여력은 돌아오지 않고, 자산은 늘었으나 쓸 수 있는 부(富)는 아니며, 금융은 성장했으나 생활로 스며들지 않는다. 소비는 미래에 대한 신뢰가 담보될 때 비로소 움직인다.
지금 우리 경제는 소비가 살아날 조건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버티고 있는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인색해져서가 아니라, 미래를 소비로 연결할 수 없는 구조에 갇혔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출 대기업의 낙수효과에 기대어 내수가 저절로 살아나기를 기다리던 고도성장기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빚으로 쌓아 올린 소비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이다. 주거와 교육이라는 거대한 비용 장벽을 실질적으로 낮추고, 가계가 미래를 저당 잡히지 않고도 오늘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근본 해법이다.
단순히 돈을 풀어 경기를 띄우는 미봉책이 아니라, 성장의 온기가 가계의 아랫목까지 막힘없이 흐르도록 경제의 혈관을 다시 뚫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지금 이 기형적인 고비용·고부채 구조를 혁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소비 실종’이 뉴노멀(New Normal)이 된 차가운 저성장의 겨울을 아주 오랫동안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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