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복의 세계경제 Story] 초대 조선해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②

2026.04.27 10:50:09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열강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묄렌도르프를 초빙한 조선정부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오기 한 달 전 그가 초안을 작성하고, 마건충과 조영하(*조씨 항렬상 조대비의 조카뻘이 되나,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사촌으로 잘못 알고 있음)가 철저히 검토한 고종의 칙령(임명 선언)과 그 부속 문서(고용조건 명시)의 주요 내용을 보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조선 정부와 묄렌도르프의 고용계약서(*칙령 및 그 부속 문서)에는 묄렌도르프의 직책과 그 권한에 대하여 규정하였다.

 

그의 직책은 통리아문 참의(*외교통상부 차관보)ㆍ외아문 협판(*외교부 차관)ㆍ해관 총세무사(*관세청장)ㆍ전환국 총판(*조폐공사 사장)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교섭 및 해관 운영 등을 담당 수행하는 것으로, 이러한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각국의 제도를 비교 연구하여 처리하되, 월권행위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해관 운영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조선인을 채용하되, 부득이하여 외국인을 고용할 경우에는 조선 정부의 허가를 얻어 채용하여야 하며, 전단(專斷)을 불허한다.

 

수납한 관세는 조선 정부가 이를 관리하도록 하고 묄렌도르프는 오직 해관의 운영, 기획, 검토, 보고만을 행하도록 하고, 묄렌도르프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우 문제를 규정하고 있는데, 봉급을 매월 해관 평은 300냥(* 그 당시 상위직급 연봉수준, 현재 약 5천만원~1억원 수준 추정)으로 하되 그밖에 사택비, 여비 등은 별도로 지급한다는 상당한 예로서 대우하는 것이었다.

 

위 계약 내용을 보면 계약을 주선한 청이 묄렌도르프의 전횡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선 측에 신중하게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외교 교섭과 해관 운영이라는 직책을 수행함에 있어 분수를 지키고 성심을 다할 것을 강조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 언제라도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조선 측에 부여해 놓고 있다.

 

통상과 해관 사무의 전문가로 추천한 중국의 처음 의도를 볼 수 있다. 묄렌도르프 시기에 조선해관은 청 해관과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묄렌도르프 이후로 조선 해관 총세무사를 보면, (대리)스트리플링(Stripling, 1885.9-10),-> 2대 메릴(Merrill, 1885∽1889, 영국) →3대 쇠니케(Schonicke,1889∽1892, 독일) →4대 모건,Morgan(1892 ∽ 1893, 영국) →5대 브라운(McFee Brown,1893 ∽ 1905, 영국), 아관파천(1896년)후 고종의 알렉세이프(러시아) 임명은 불발되었고, → 메카다(1905∽1907, 일본), 이후 1907. 12.16 조선 해관을 폐지하고 일본 세관으로 흡수되었다.

 

1882.12.13일 조선에 도착한 후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우선 외무부의 창설이었다. 조영하와 묄렌도르프가 오랫동안 협의해서 외무부(통리아문) 창설 및 편성이 결정되었다.

 

묄렌도르프가 그 차관보(*참의)로, 조영하가 그 장관(*판리)으로 임명된다. 그 차관(협판)에는 김홍집, 민영익(* 나중에 추가 임명)이다. 새롭게 편제된 정부기관(관서)의 임무 등에 관한 장시간의 회의가 매일 거듭되었다. 최초의 문제는 개항할 항구 자리를 어디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해관(Customs House)의 설치와 광산 개발의 문제였다.

 

 

개항을 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조선은 자기 힘으로는 이를 마련할 수 없는 고액이었다. 그래서 중국으로부터 백만량의 차관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왕은 묄렌도르프에게 전권을 지워 주고서 광산, 해관 및 철도를 담보로 해서 자금을 마련케 하고 우선 당장은 30만 내지 40만 량을, 나머지는 그 뒤에 들여오도록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해서 사절단이 상해로 파견되었는데 묄렌도르프가 그 단장이 되고 민영익(* 왕세자 순종의 처남)이 부단장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을 묄렌도르프는 무척 기뻐하였다.

 

그의 부인 로잘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취감으로 일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소.” 라고 하였다. 1883. 1. 30일 그 첫 번째 분할금을 초상국(*청국의 대선박회사)에서 인출할 수 있었다.

 

그 해에 그는 일본으로부터도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의 다이이치 은행에서 해관 설립에 필요한 자금 24,000달러(이자율 10%)를 조달했다.

 

4월말에 묄렌도르프는 왕(고종)으로부터 해관에 관한 총책임을 맡아서 총세무사가 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당시 조선 정부의 통리외무아문 협판(*외교 차관)이자 해관 총세무사(*관세청장)로서 1883년 4.25 –27일까지 인천에서 일본 사절들과의 협상에 깊이 관여했다.

 

7월 조일통상장정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이 조약은 11월 발효되었다. 여기에 조선은 일본에서 수입되는 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사치품은 20%, 일반 품목은 8~10% 등의 세율이 정해졌다. 함께 마련된 해관세칙에 따라 수출입 절차와 관세 징수 체계가 구체화되었다. 묄렌도르프는 1883년에 해관 창설 준비를 하면서, 해관 조직과 운영을 직접 설계·시행했다.

 

그리하여 1883년 6.16일 인천해관, 6.17일에는 원산해관, 7.3일에는 부산해관을 차례로 창설한다. 묄렌도르프는 단순히 해관 설립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었다.

 

상해-제물포 와 천진-제물포 간 정기 노선을 개설해야 했던 상황하에서 Jardine Matthison & Co 와 오랜 교섭을 해서 상해-제물포 간의 정기항로 개척을 협의하여 선박왕래 상거래 및 광권 이양을 타결시켰다.

 

묄렌도르프는 한국어를 익혀 고종과 직접 소통했고 고종의 신임을 얻으면서 그의 충성심은 비스마르크나 이홍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고종에게만 있었다.

 

그는 조선의 수많은 현대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 나라를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는 조선이 독립되기 위해서는 민중의 교양을 올리고, 생산능력 있는 공업을 일으키는 일, 이 두 가지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석탄, 철, 연, 동, 금, 은 등 지하자원의 개발을 위해서 열심히 사업을 추진하였고, 임진왜란시 일본이 도공들을 강압적으로 끌고가 없어진 조선의 도자기 제조업을 부활시킨다는 의미에서 8월에는 유리 공장 하나가 개설되게 하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도 양잠·직물생산(農桑), 광산개발, 전신가설, 화폐주조 등의 면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화폐제도가 지극히 복잡하여 문제가 많으므로 간단한 화폐 제도를 도입하고,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기 위한 기계를 독일에 주문하였다.

 

한국인의 교양을 높이기 위해서 1883년 초 기본방향을 수립하였는데, 1,000만의 주민을 위해서 800개 초등학교, 84개의 중학교, 서울에 자연과학, 외국어 및 공업을 위한 전문학교 하나씩을 개설하려 했다. 최초의 외국어 학교 동문관을 설립하여 인재를 육성하였으며, 양잠ㆍ농업ㆍ성냥공업 등도 시작하였다.

 

묄렌도르프는 그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조선을 위해 일하는 자세를 견지했으며 조선의 관리로서 자신의 식견과 능력을 발휘하고자 노력하였고, 조선의 근대화 사업에 힘을 썼으며 그 과정에서 고종 및 왕실의 신임도 얻었다.

 

당시 중국 총세무사였던 로버트 하트가 1883년에 묄렌도르프에 대해서 ”솔직히 말해서 묄렌도르프는 정말 영리하게 일을 추진해 왔다. 어쩌면 그는 결국 조선[Korea]의 왕이 될지도 모르겠다.“ 라고 평한 글,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대해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평한 글을 보면 그가 조선에 대하여 얼마나 열정과 헌신을 가지고 나름으로 조선 근대화에 진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은 현대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야만 독립을 유지하고 이웃 국가들로부터 존경을 얻을 수 있다. 비록 국토는 작지만, 국민은 지능이 뛰어나고 자원은 풍부하므로, 이 한반도 왕국은 이웃 국가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인들은 서양과학을 배우고 받아들이는데 일본인들보다 더 지능이 뛰어나다“.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전통적 체제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 전환하려던 시기에 고빙된 핵심 외국인 관료(테크노크라트)이었다.

 

그가 조선 해관 전체를 총괄하는 총세무사(Inspector General)를 맡아, 인천, 부산, 원산 등 개항장에 해관을 설치하고, 조선 정부가 명목상 감독은 하지만(*감리서 등) 실제 운영은 외국인 세관원들이 실무를 담당하게 하여, 외국과의 무역에서 관세 수입을 확보함으로써 국가 재정 안정에 기여하였다.

 

1883년 묄렌도르프가 정비한 해관은 단순한 관세 징수 기관이 아니라 근대 국가 재정의 핵심 기관이었다. 수입·수출 물품에 부과하여 징수한 관세는 당시 조선 재정에서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또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어떤 물품이 들어오고 나가는지 기록하고 근대적 통계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무역 관리를 하였고, 선박 출입 관리, 검역, 항해 규칙 집행 등 항만 행정을 담당하였다.

 

 

[프로필 ] 이대복 한국세관역사연구회 회장

• 경영학 박사

• 2021.1. 15 ∼ 관세법판례연구회 고문

• 2010.06~2011.07 관세청 차장

• 2008.09~2010.05 인천공항 본부세관장

• 2006.~2007. 미국 관세청(CBP) 파견근무

• 2002.~2003. 미국 관세/무역전문 로펌(Sandler, Travis &Rosenberg, P.A.) 고문

• 2005년 홍조근정훈장 수상

• 1994년 세계관세기구(WCO) 사무총장상 수상

• 저서 : ‘한국세관의 역사(2009년,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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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tf@tf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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