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태진 관세사·경영학 박사) 인공지능(AI)이 산업과 행정의 지형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보수적인 영역으로 여겨지던 관세행정 역시 예외가 아니다.
통관 프로세스, 리스크 관리, 원산지검증, 심지어 자료 제출 방식까지 디지털 문법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AI는 이제 단순한 기술적 도구가 아니라, 무역의 속도와 투명성, 그리고 기업의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가 되었다.
그러나 현장의 온도차는 여전히 크다. 많은 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은 이러한 거대한 파도를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 디지털 역량을 갖추지 못한 기업에 관세 국경은 점점 더 높고 험난한 장벽이 될 것이다.
세계 관세행정의 흐름, 데이터가 곧 통관이다
세계관세기구(WCO)는 데이터 기반의 스마트 통관을 이미 국제 표준으로 천명했다. 주요 교역국의 움직임은 더욱 기민하다. 미국 관세국경보호청(CBP)은 AI 기반의 화물 선별 시스템을 전면 도입했다.
특히 2025년 2월, 미국 행정부가 중국산 저가 물품에 대한 소액 면세 규정(de minimis)을 전격 폐지하면서, 폭증하는 통관 물량을 처리하기 위한 AI 심사 시스템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유럽연합(EU)의 행보도 매섭다. EU는 2025년 9월부터 수입통제시스템 2단계(ICS2)를 항공, 해상에 이어 도로‧철도 운송까지 전면 확대 적용했다. 단순히 신고 항목이 늘어나는 수준이 아니다.
AI가 수천만 건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정상 거래 패턴과 다른 ‘이상 징후’를 사전에 걸러낸다. 이제 서류의 형식적 완결성만으로는 통관을 보장받을 수 없다. 데이터의 정합성과 품질이 곧 기업의 통관 경쟁력인 시대다.
한국 관세행정, 미래성장혁신을 향한 닻을 올리다
한국 관세청 역시 이러한 흐름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지난 2025년 9월, 관세청은 “인공지능(AI)으로 공정성장을 선도하는 관세청”이라는 비전을 선포했다. 이어 10월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할 컨트롤타워인 ‘미래성장혁신 추진단’을 공식 출범시켰다.
추진단은 AI 기반 리스크 관리 체계 구축, 전자문서 활용 극대화, 수입가격 사후검증 고도화, 그리고 관세행정 특화 생성형 AI 모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자상거래 물량의 폭발적 증가, 공급망의 다변화, 그리고 날로 강화되는 원산지검증 압박 속에서 AI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불가결한 생존 전략이다.
실제로 튀르키예, EU, 인도, 아세안 등 주요 교역국으로부터 한국 수출품에 대한 원산지검증 요청이 지속적으로 집중되고 있다. 데이터 분석 등 정밀 검증이 강화되는 추세로, 수기 관리와 종이 서류에 의존하는 기업은 대응이 어려워지고 있다.
‘AI 관세사’ 시대, 전문가는 사라지는가?
“AI가 통관도 하고 검증도 하면, 관세사는 사라지는 것 아닌가?”
많은 이들이 묻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관세 전문가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고 ‘고도화’된다. AI가 대체하는 것은 단순 반복적인 신고서 작성(Typing)과 기본적인 오류 점검(Checking)이다. 그러나 무역의 본질은 ‘판단’과 ‘책임’에 있다.
AI 시대에도 관세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맥락(Context)’의 해석이다. AI는 데이터의 패턴을 읽지만, 그 거래가 왜 발생했는지, 기업의 비즈니스 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특수관계자 간 가격 결정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복잡한 국제 통상 규범과 법령의 행간을 읽고 기업의 상황에 맞춰 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 전문가의 몫이다.
둘째, 최종적인 ‘책임(Accountability)’의 주체다. 시스템이 오류를 범하거나 알고리즘이 놓친 리스크가 발생했을 때, 그 법적 책임을 기계에게 물을 수는 없다. AI가 제안한 결과를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며 리스크를 방어하는 역할은 전문가가 수행해야 한다.
셋째, 전략적 컨설팅 능력이다. 단순 통관 대행이 아니라, 공급망 전체를 조망하며 관세 비용을 절감하고, FTA 활용 전략을 수립하며, 글로벌 리스크를 헷지(Hedge)하는 전략가는 AI로 대체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래의 관세사는 ‘신고 대행자’에서 ‘데이터 검증자’이자 ‘무역 리스크 관리자’로 변모해야 한다. 코드를 이해하고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역량, 데이터를 분석하여 인사이트를 도출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이 AI 시대, 관세 전문가의 생존 방식이다.

관세행정 디지털 전환을 위한 5가지 정책 제언
AI 기반 관세행정의 안착과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정부와 기업, 전문가가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언한다.
첫째, 기업 데이터 기반 검증 체계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
원장 데이터, ERP 기록, 물류 정보가 AI 분석의 핵심이다. 정부는 기존의 컨설팅 지원을 넘어, 중소기업이 디지털 원산지시스템과 전자 증빙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IT 인프라 구축 지원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둘째, AI 리스크 관리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기업이 왜 검사 대상으로 선별되었는지 모른다면 대응할 수 없다. 보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위험 평가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AI 오류에 대한 명확한 이의 제기 절차를 마련하여 행정의 신뢰도를 확보해야 한다.
셋째, 차세대 관세 전문 인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존의 자격증 교육을 넘어, 무역 데이터 분석, AI 활용 실무, 디지털 컴플라이언스 관리 등 현장에서 즉시 활용 가능한 융합형 인재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보급해야 한다.
넷째, 관세행정과 민간 시스템 간의 ‘초연결’을 추진해야 한다.
API 기반의 신고‧검증 시스템을 확대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여 위변조가 불가능한 디지털 무역 증명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실시간 데이터 검증만이 불필요한 행정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다섯째, EU CBAM 등 新무역장벽에 대한 디지털 대응 체계를 시급히 갖춰야 한다.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대표적인 데이터 기반 무역 장벽이다. 제품 생산부터 수출까지 탄소 배출량 데이터를 디지털로 추적‧관리하지 못하면 수출길이 막힌다.
관세청은 수출입 데이터와 탄소 데이터를 연계 관리할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구축하고, 중소기업이 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전방위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AI 시대는 새로운 기회이자 시험대
AI는 통관과 원산지 관리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관세행정은 데이터 기반 리스크 관리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기업의 대응 방식 또한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단순 신고와 문서 준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이제는 데이터 품질, 내부 통제 체계, 디지털 증빙 관리 역량이 관세 리스크를 좌우한다.
AI가 모든 업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제도 이해와 국제 규범, 무역 구조를 해석하는 전문성이 더욱 중요해진다.
기계가 데이터를 분석한다면, 전문가는 데이터를 해석하고 전략을 설계해야 한다. 관세 전문인력의 역할이 단순대행에서 리스크 관리자이자 데이터 검증자, 정책 해석자로 확장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기업이 해야 할 일은 과거 방식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전환에 맞는 관세관리 체계를 주도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정부 또한 기술 중심 행정으로의 전환에 맞추어 중소기업 지원 방식과 데이터 인프라를 재구성해야 한다. AI 시대의 무역환경은 이미 현실이다. 준비된 기업과 전문가가 새로운 기회를 선점할 것이다.

[프로필] 고태진 관세법인한림(인천) 대표관세사
• (현)경인여자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현)중소벤처기업부, 중기중앙회, 창진원, 경기TP, 인천TP 등 기관 전문위원
• (전)월드클래스 300, NCS워킹그룹 심의위원
• 고려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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