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인장_안이숲
꿈은 걸어 다니지 않는다
한자리에 서 있다
한자리에 앉아 사람을 향해 뿌리내린다
한번 찔리면 전갈보다 위험한 말
몇 년 전 생각에 찔린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한 채
옆구리께 붙어 수분 없이 살아남았다
무뎌지지 않는 애인의 철없는 불만은 뾰족해요
마디를 뚝뚝 흘리며
급하게 달려온 땀방울은 뾰족해요
직장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
잘 마른 상처들은 모두 뾰족해요
짧게 솟아나는 것이
길게 휘어지는 것보다 날카롭고 무섭다
짧아서 응축된 독소
삶이 목말라, 쌓여 가는 갈증이 피부병처럼 돋아난다
그리움을 찌를 수 없어
스스로를 찌른다 해도
지독하게 꿈을 찔리면
푸른 심장에
독을 키우는 가시가 불쑥, 돋아나기도 한다
― 안이숲 시집, 『요즘 입술』(실천문학사, 2023)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가시로 쓴 생존의 독백
안이숲의 「선인장」을 읽는 동안, 우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자꾸만 숨을 고르게 됩니다. 언어가 거칠어서가 아니라, 그 시선이 너무나 투명하게 정곡을 찔러오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읽는 경험은 다 아문 줄 알았던 상처의 딱지를 무심코 건드리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그 통증은 즉각적이지만, 아픔 뒤에 찾아오는 것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는 서늘한 각성입니다.
시인은 꿈을 ‘걸어 다니지 않는 것’이라 정의합니다. 우리에게 꿈은 늘 어딘가로 도달해야 할 목적지였으나, 시인에게 꿈은 고통스러운 자리에 멈춰 서서 지독하게 뿌리를 내리는 인내 그 자체입니다. 떠나지 못한 자리에서 끝내 버텨내야 하는 생, 그 정지의 시간이야말로 선인장이 선택한 치열한 생존법입니다. 화려한 꽃을 피우기보다 단 한 방울의 수분을 지키기 위해 제 살을 깎아 가시를 만드는 일, 시인은 그 처절한 정직함을 꿈의 본질로 제시합니다.
시 속의 상처들은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물지 않음으로써 살아남는지도 모릅니다. “잘 마른 상처들은 모두 뾰족해요”라는 문장 앞에서 우리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소환하게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 무뎌질 줄 알았으나, 오히려 수분이 증발한 자리에 단단한 뼈대처럼 남은 어떤 날의 말과 표정들입니다. 시는 그런 기억들이 어떻게 우리 몸 안에서 날카로운 가시로 진화하는지를 고요하게 증언합니다.
직장을 잃고, 공들인 탑이 무너지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까지의 아득한 시간들. 그 터널을 지나며 우리는 ‘강해졌다’고 자위하지만, 사실은 ‘더 예민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시는 누군가를 해치려는 독함이 아니라, 삶의 하중을 견뎌낸 흔적입니다. 더는 훼손되지 않기 위해, 남은 생을 지켜내기 위해 몸이 선택한 가장 서글프고도 강력한 무장인 셈입니다.
그리움을 향해 가시를 세우지 못하고 끝내 제 몸을 찌르고 마는 장면은 이 시의 가장 아픈 폐부입니다. 하지만 그 통증은 허무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가시는 안쪽에 간직한 ‘푸른 것’을 지키기 위한 외벽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마음, 아직 마르지 않은 심장이 있기에 가시는 불쑥 돋아납니다.
이 시를 덮고 나면 누구나 자신의 옆구리를 가만히 만져보게 됩니다. 이유 없이 예민해지던 순간, 밤잠을 설치게 했던 날카로운 말들,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그것들은 더 이상 부끄러운 흉터가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푸른 심장을 품고 살아 있으려 애써 왔다는 가장 선명한 훈장입니다.
메마른 사막 같은 현실 속에서도 끝내 꺾이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는 모든 이들의 ‘뾰족한 꿈’을 향해 건네는, 아프지만 지독하게 다정한 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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