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김재석 지금관세사무소 대표관세사)
◇ 칼 막 휘두르는 사람의 공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필자는 서슴없이 답한다.
"칼 막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시중에 떠도는 농담처럼, 칼 마르크스와 히틀러가 바로 그들이다. 마르크스는 펜이라는 칼로 세계의 질서를 뒤흔들었지만, 그 칼이 낳은 세계는 끝내 그의 손을 벗어났다.
히틀러는 분노라는 칼에 모든 것을 걸었고, 결국 그 칼과 함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이 두 역사적 인물의 공통된 패착은 명확했다. 하나의 칼만을 믿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다르다. 그는 관세라는 칼로 전 세계 무역 질서를 난도질하되, 칼의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칼집 속에 무슨 칼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그를 진짜 무서운 상대로 만드는 이유다.
2026년 2월 20일, 미 연방대법원이 6대 3으로 IEEPA 기반 관세 부과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삼국지의 조자룡이 헌 칼 쓰듯 IEEPA를 주무기로 거침없이 휘두르던 트럼프에게 사법부가 제동을 건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판결 당일 무역법 제122조를 근거로 10% 관세에 즉각 서명했고, 불과 24시간 뒤에는 법정 상한인 15%로 올려버렸다.
미리 장전해둔 총이었다. 헌 칼이 꺾이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새 칼을 꽂은, 사전에 설계된 기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칼집은 아직 비어 있지 않다.
◇ 한 겹이 걷히면 더 단단한 벽이 나온다
미 관세국경보호청(CBP·미국의 세관 당국) 추산 기준, IEEPA 위헌 판결로 열린 환급 잠재 규모는 최대 1,790억 달러, 한화로 약 220조 원이다. 사상 초유의 환급 기회가 열린 것은 맞다.
그러나 필자가 더 주목하는 것은 그 승전보 뒤에서 이미 돌아가기 시작한 트럼프의 새로운 관세 구조다.
이 구조는 단순한 법령의 나열이 아니다. 한 겹이 걷혀도 그 밑에 더 단단한 층이 버티고 있는 적층(Layered) 구조, 말하자면 자기재생하는 미로다.
첫째, 제122조는 긴급 병기다. 국제수지 위기를 명분으로 최대 150일간 글로벌 일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임시 수단으로, IEEPA의 빈자리를 24시간 만에 채웠다. 다만 150일의 시한이 있다. 다음 칼을 꺼낼 시간을 버는 가교 역할이다.
둘째, 제301조는 이미 피를 묻히고 있는 현행 주력 병기다. 수년째 시행 중이며 중국 등 특정 국가의 불공정 무역 행위를 정밀 타격하고 있다. IEEPA가 무력화된 지금 301조의 역할은 더 커졌다. 보조 수단이 아니라 전선의 핵심 무기로 올라선 것이다.
셋째, 제232조는 이미 검증된 칼이다. 2018년 철강·알루미늄 관세에 적용되어 법원의 심판을 거쳤고, 사실상 사법적 면죄부를 받았다. IEEPA와 달리 232조 기반 관세는 법원에서 뒤집기가 구조적으로 훨씬 어렵다.
지금은 자동차, 반도체, 의약품 등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을 향해 칼집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아직 뽑혀들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무섭다.
넷째, 제338조는 아무도 써본 적 없는 카드다. 차별적 무역 관행을 유지하는 국가에 최대 50%의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조항인데, 실제 발동 전례가 없다.
전례가 없으니 파괴력 예측도 불가능하다. 트럼프는 이 카드를 꺼내 보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당길 수 있다.
122조로 공백을 메우고, 301조로 전선을 유지하고, 232조로 장기전을 준비하고, 338조로 심리전을 구사하는 4중 구조다. 한 층이 무너지면 그 밑의 층이 올라온다. 미쳐 날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촘촘하게 설계된 게임이다.
◇ 사법적 시계는 단 하루도 멈추지 않는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220조 원의 환급 기회 앞에서 많은 기업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다.
"위헌 판결로 수입업체들이 이겼으니, 행정 불복 절차만 제출하고 세관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면 된다."
이 생각이 기업을 소멸시효의 벼랑 끝으로 민다.
미 관세법 제1514조에 따른 행정 불복(Protest·관세 부과에 대해 세관 당국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정 구제 신청)은 수입 물품의 청산(Liquidation·세관이 해당 수입 건의 관세액을 최종 확정하는 절차) 완료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다. 여기까지는 많은 기업이 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행정 불복 절차는 사법적 구제 수단인 제1581(i)조 소송의 2년 소멸시효를 단 하루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세관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두 개의 시계가 따로따로 돌아간다. 행정의 시계(180일)는 행정 불복 제출로 일단 멈추지만, 사법의 시계(2년)는 아무도 멈출 수 없다.
관세 납부일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세관의 기각 결정을 받아들면,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환급권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행정 불복을 제때 냈어도, 기다리다가 날리는 것이다. 이것이 행정 불복만 믿는 것이 사실상 자발적 구제 포기와 다르지 않은 이유다.
미국 국제무역법원(CIT·Court of International Trade)은 2025년 12월 23일 행정명령 25-02(Administrative Order 25-02)를 발령하여 IEEPA 관세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규 소송 전체에 소송 정지(Stay·법원이 재판 진행을 일시 중단시키는 명령)를 적용했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며 소송을 동결한 것으로, 2026년 2월 20일 판결 이후에는 정지를 풀고 환급 이행 절차로 넘어갈 예정이다. 이미 CIT에 소송을 제기한 기업은 후속 절차를 바짝 추적해야 하고, 아직 제소하지 않은 기업은 2년 시효가 끝나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법무법인 삼양 라인호 관세전문위원의 말이 이 대목에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혼돈은 준비된 기업에게 가장 큰 기회다. 트럼프의 새로운 관세 전술에 대비하면서도 정당한 환급금을 신속히 확보하는 투 트랙(Two-track·행정과 사법을 동시에 병행하는 이중 대응 전략)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방법은 분명하다.
행정 트랙(180일 데드라인)은 청산 완료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행정 불복 신청서를 낸다. 대법원 판결 법리를 명시하되, 미 관세법 제1505(c)조에 따른 이자 항목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위법하게 납부된 관세에 대해 원금뿐 아니라 납부 시점부터의 이자까지 돌려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 이자가 자금난에 처한 수출 기업의 유동성 회복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된다.
사법 트랙(2년 데드라인)은 관세 납부일로부터 2년 이내에 CIT에 제1581(i)조 기반 소송을 행정 불복과 함께 진행한다.
행정명령 25-02에 따른 자동 소송 정지 제도를 활용하면 세관 당국의 처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사법적 시효를 지킬 수 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정지 해제와 후속 절차 진행 상황은 전문가와 함께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한다.
두 트랙은 양자택일이 아니다. 행정의 문이 닫히기 전에 사법의 통로를 열어둬야 하고, 사법의 시계가 멈추기 전에 행정의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반드시 동시에 가동해야 하는 이중 안전장치다.
◇ 마치며
39년을 관세청에서 보내고 관세사로 10년을 더 뛰었다. 그 세월 동안 숱한 통상 격변을 겪었지만, 이번처럼 법령 구조 자체가 4중으로 재편되면서 행정·사법 이중 시효라는 함정까지 동시에 작동하는 국면은 처음이다.
220조 원의 기회는 실재한다. 그러나 그 기회는 준비한 기업에게만, 두 개의 데드라인 안에서만 유효하다. 행정의 문은 180일 뒤에 닫히고, 사법의 시계는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기업의 환급 시계도 마찬가지다. 이 글이 그 판단에 작은 나침반이 되기를 바란다.
한편 글쓰는데 도움을 준 라인호 관세전문위원(✉ irha@pilolaw.com)은 법무법인 삼양 소속으로 미국 통상법 및 관세 분쟁을 전문으로 자문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프로필] 김재석 지금관세소 대표관세사
•여수세관 조사심사과
•인천공항세관 휴대품국
•인천공항세관 특송2과
•한국관광공사
[논문]
•17세기 조선과 일본을 뒤흔든 무기 밀수 사건
•세계사를 바꾼 은밀한 와인 이야기
•조선해관 총세무사 묄렌도르프에 대한 일고찰 등 외 다수
※ 김재석 지금관세사무소 대표 관세사는 관세청에서 39년간 근무한 뒤 지금관세사무소를 개업했으며, 한국세관역사연구회 부회장과 한국사마천학회 이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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