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근 시인의 詩 감상] 이팝나무 우체국

2026.05.02 09:18:48

 

이팝나무 우체국 / 박성우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 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 밭길로 부추 밭길로 녹차 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는 법이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고

파닥 파다닥 이른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들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부지런을 떤다

 

 

[詩 감상] 양현근 시인

 

흰 꽃비 내리는 우체국에서 배달된 눈부신 생명력

 

도로변 이팝나무가 쌀밥 같은 꽃송이를 흐드러지게 터뜨리는 계절입니다. 박성우 시인의 '이팝나무 우체국'을 읽고 있으면, 순백의 꽃비가 내리는 풍경 속으로 마음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꽃송이들 아래 놓인 강렬한 빨간 우체통 하나. 그 정적인 풍경 위로 닭들의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겹쳐지며 시적 생동감이 피어오릅니다.

 

시적 화자는 우체국을 세운 이가 자신임에도 주인 자리를 닭들에게 기꺼이 내어줍니다. 부리로 소인을 찍고, 밭길을 누비며 소식을 전하는 닭들의 분주함은 묵묵히 삶을 일구는 생명의 성실함을 빼닮았습니다. 시 전반에 흐르는 '꼬오옥 꼭꼭' 소리는 단순한 울음을 넘어 지치지 않는 생의 노동요로 울려 퍼집니다.

 

꽃향기에 취해 거드름 피우지 않고 눈비조차 마다 않는 닭들의 근면함 앞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게으른 나'라 낮추며 겸허한 자각에 이릅니다. 이는 속도와 효율에 매몰된 우리 현대인에게 잠시 멈춰 서서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따뜻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쌀밥처럼 소복한 꽃그늘 아래서 닭들이 전하는 소식은 자명합니다. 매일 눈을 뜨고 길을 나서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가 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우체국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다정한 시가 전하는 안부가 당신의 고단한 일상 위에도 소복이 쌓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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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현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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