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사샤) 이번 호에서는 지난달에 이어 메디치 은행의 성공 비밀인 환어음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똥은 인간의 배설물이지만,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널리 퍼져 있으니 당연이 돈 장사하는 일은 비난 받기 딱 좋은 일이 되었겠죠.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린 것처럼 이자는 금지되었고, 그렇지만 돈놀이 하는 사람들은 이자는 아니지만 이자와 같은 역할을 해 돈을 벌어 주는 방식을 찾았습니다. 수많은 방식으로 이자 말고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번 주제인 환어음입니다. 환어음 거래를 통해 부를 쌓게 된 메디치 은행, 환어음이란? 환어음은 이탈리아에서 물건을 사지만 당장 돈(플로린)을 지불하지 않고, 나중에 런던의 롬바드 스트리트에 있는 은행에서 파운드로 지불하겠다는 약속입니다. 환어음에 대한 정의는 이 속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하나씩 풀어 보도록 하죠. 지난호에도 말씀드렸듯이 메디치 등 은행가들은 동시에 상인이라고 말씀드렸었죠. 그러나 실제 상거래를 통해서는 돈을 얼마 벌지 못했습니다. 무역을 하면서 필요했던 지불과 결제에 관련된 업무에서 돈을 벌었던 것이죠. 일종
(조세금융신문=사샤) 이번호부터 세 차례 메디치은행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메디치은행이 무엇하는 은행인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다음 이야기를 한 번 들어 보시죠. “대출업자는 어떤 면에서 매춘부와 같았다. 떳떳하게 방문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가긴 갔다.” 역사학을 사화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가긴 갔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출업자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앞서 은행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고리대금업자라는 말도 사용했었습니다. 은행업자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환전상과 상인 같은, 서로 다른 말을 사용했지만 모두 이탈리아 상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틀렸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모호함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대출업이나 환전업을 하더라도 구별되는 계층이 존재했습니다. 크게 보아 길드에 가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될 수 있습니다. 메디치은행이 사업을 시작할 때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즉 대출업자 혹은 상인, 환전상들은 한데
(조세금융신문=사샤) 오늘은 르네상스 예술작품의 주문자로 상인가문과 예술가들이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첨부된 그림은 지난호 글 말미에 보여드린 표입니다. 오늘은 이 중 바르디 가문과 지오토 디 본다네(1267~1337)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르디 가문과 예술가 지오토 이야기 지오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막 시작되던 무렵 활동했던 이른바 원로 르네상스 예술가였습니다. 바르디 가문이 지오토에게 작품을 의뢰할 당시 이미 지오토는 유명한 예술가였지요. 당시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꼭 한 번씩 들렸다고 하는 아레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이 유명합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바르디 가문 이전의 일입니다. 아레나 예배당의 작품은 대를 이어 고리대금업자였으며 이탈리아 북부 조그만 도시였던 파두아의 성공한 유력가문이었던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주문한 것입니다. 당시 이름을 날렸던 지오토는 여러 주문을 소화해야 했기 때문에 혼자 작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수와 제자들을 여럿 두면서 작업을 이어갔는데요. 연구자들에 따르면 지오토는 최초의 아틀리에를 운영했던 예술가였다고 합니다. 지오토는 엔리코 스크로베니의 주문을 처리했던 때도 그랬던
(조세금융신문=사샤) 지난달에 이어 세 번째 유형의 고리대금업자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인주스테 아퀴스타(injuste acquista)라고 불리는 이 세 번째 유형의 고래대금 업자는 ‘자신이 쌓은 부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것이라고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나선 사람들’인데요. 교회는 이들에게 돈을 받아 피해자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찾지 못하면, 일단 돈을 보관하면서 피해자를 찾습니다. 그래도 피해자를 찾지 못할 경우에는 교회재산으로 귀속됩니다. 그런데 고리대금업자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왜 스스로 교회에 자신의 부정한 행위를 고백하고 그동안 어렵게 모은 돈을 주려고 했던 걸까요? 고리대금업자들은 왜 어렵게 모은 돈을 교회에 주려고 했을까 1200년도 초·중반 이탈리아에 교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 교회건물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교회에 기부한 신도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곤 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십일조를 거둬들일 수 있는 권한입니다. 아시다시피 십일조는 자신의 수입의 1/10을 교회에 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가령 자신의 소유지인 땅에 교회를 짓게 해준 신도에게, 교회는
(조세금융신문=사샤) 이번 호에는 르네상스 시대로 가 볼까요? 이미 잘 아시는 것처럼 르네상스는 프랑스어 태어나다(naître) 동사와 다시(re)를 엮은 조어입니다. 이탈리아 말로는 리나 센자(rinascenza), 리나스크리멘토(rinascimento) 등으로 불렸는데요, 모두 ‘다시 태어나다’는 뜻이겠지요. 다시 태어난 것은 유럽 사람들이 항상 동경해 마지않는 그리스 로마시대입니다. ‘인간중심의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예술이 이탈리아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정도로 르네상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라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지금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는 르네상스에 대한 생각은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해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해서 부르크하르트가 이해하고 주장한 르네상스가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부르크하르트는 서유럽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로 르네상스를 들고 있습니다. 로마의 멸망 이후 근 500년을 마법과 미신이 휩쓴 야만의 시대를 살았던 유럽인들에게 하나의 빛으로 르네상스는 여겨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를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의 재발견, 그리고 합리적인 사유(思惟)와 생활태도의 길을 열어 준 근대문화
(조세금융신문=사샤) 마키아벨리가 다빈치에게 의뢰한 그림이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앙기아리 전투>입니다. 두 사람 간의 계약서가 남아 있는데 먼저 계약서를 봐 볼까요? “피렌체 시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청사 회의실 내부에 그림을 그려줄 것을 이미 몇 달 전에 동의하였고, 이미 그 밑그림을 시작하였으며, 선금으로 35플로린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피렌체 행정 수반은 이 작품이 가능한 최대한 빨리 완성되고, 레오나르도에게 작품이 완성된 후에 다시 한 번 임금을 지불하길 희망했다. 피렌체 행정 수반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위의 밑그림을 완성하여 늦어도 1504년 돌아오는 2월까지는 전반적인 작품을 완성하여야 하며, 이에는 어떠한 핑계나 트집도 있어서는 안되고, 다음 4월 20일부터 매달 그에게 15플로린을 지불할 것임을 결정하는 바이다. 만약 레오나르도가 밑그림을 완성하지 못하면, 그는 돈을 상환해야만 한다. 만약 그가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면, 월급이 지불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시작도 못했더라도 그의 동의 없이 다른 화가에게 이를 승계해서는 안 된다. 이 계약은 피렌체의 서기장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참석 하에 이루
(조세금융신문=사샤) 이야기는 서유럽의 르네상스에서 시작됩니다. 르네상스에 대한 이야기는 가을까지 계속 될 것이고요, 가을이 지나 겨울에 들어서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실 겁니다. 물론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 이야기나 튤립 광풍 같은 이야기 그리고 네덜란드의 골목골목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의 어느 곳에 그리고 어떤 상품을 눈독 들이고 그것을 거래함으로써 부유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아시아 사람들은 또 어떤 처지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드릴 생각입니다. 물론 인도차이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아시아와 어떻게 엮이는지도 전해드릴 것이고요. 이야기는 잇고 엮어야 제맛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올 한해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메디치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합니다. 몇 대에 걸쳐 피렌체와 함께 했었기 때문에 역사책에서 뿐만 아니라 피렌체의 건물이나 거리 여러 곳에 아직도 메디치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유명한 역사학자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는 《중세 유럽의 상인들》에서 초기 중세 상인을 무법자라고 불렀는데, 메디치 가문의 선조인 코시모 데 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