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연말, 부산 서면의 어느 한정식 집! 필자와 옛 직장 동료 4명이 모여 정담을 나눈다. 거의 20년 만에 보는 얼굴도 있다. 시간의 나이테가 게으름을 피운 듯 그때나 지금이나 겉모습은 여전하다. 그러나 옛 추억을 안주삼아 떠들썩한 분위기로 확 달아올라야 할 모임장소가 차분하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필자의 퇴직을 계기로 모인 만남의 장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필자보다 2~3살 어린 옛 동료의 대부분이 먼저 퇴직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에 그 많던 동료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필자를 제외하곤 다들 내일 모레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자의든 타의든 자리를 떠나고 없단다. 다른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샐러리맨의 숙명, 퇴직 떠난 자의 얼굴엔 여유가 엿보이고, 남아 있는 자의 얼굴엔 보름달만한 걱정이 걸려 있다. ‘먼저 맞는 매가 낫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떠난 자의 여유는 퇴직의 충격을 극복하고 살아있음을, 남아 있는 자의 걱정은 언젠가 닥쳐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가 싫어 옛추억 한 토막을 슬며시 올려놓아도 어느덧 이야기의 물줄기는 제자리에 가 있다. 당시 시중의 일
청년은 3포·5포로 말없이 저항하고, 중년은 구조조정의 칼날에 몸을 도사리고, 노년은 실버파산·노후파산의 불안에 떨고 있다. 전 세대, 전 계층이 심각한 질병에 걸린 듯 신음하고 있다. 말 많은 정치권과 권력층만 바람 잘 날 없이 분주하다. 나라꼴이 참 말이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좋은 희망이 나쁜 소유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좋은 희망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나쁜 소유가 요란하게 판을 흔드는 지금 돈키호테의 이상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 꿈의 실종, 희망의 상실 시대다. 그렇다고 자포자기 하기에는 삶이 너무 안타깝다. 지금 우리 앞에는 100세 시대라는 인류의 오랜 소망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자포자기 한다고 도와줄 사회 시스템도 아니다. 저성장·저금리·고령화의 덫에 걸린 경제가 신음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하면 결국 나만 손해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꿈을 되찾아야 한다. 빼앗긴 희망을 수복해야 한다.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은 생명의 나무가 된다” 성경 잠언 13장 12절에 나오는 구절이다. 희망을 꿈꾸다 보면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그 희
청년의 키워드가 ‘성장’이라면, 중년의 키워드는 ‘성숙’이 아닐까. 청년의 성장이 꿈을 키워가는 것이라면, 중년의 성숙은 꿈의 재도약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성장’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지는 것’이다. ‘성숙’의 사전적 의미는 좀 복잡하다. ① 사람이나 동식물 따위가 자라서 점점 커짐 ②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됨. ③ 경험이나 습관을 쌓아 익숙해짐 ①, ②, ③은 각각 육체적·심리적·사회적 측면을 나타낸다. 중년의 육체적 성장은 이미 청년기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결국 중년의 성장은 심리적·사회적 측면의 완숙도가 높아짐을 뜻한다. ‘성장’이 일직선적 발전이라면 ‘성숙’은 나선형적 발전이다. 그만큼 중년의 삶은 순환하면서 발전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엿본다. 때론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한 단계 더 성숙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숙하기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온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생채기가 덕지덕지 붙어 중년의 심신은 지쳐 있다. 김치가 깊은 맛이 있는 묵은지로 변하기 위해서는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된장 같은 각종 장류도 마찬가지다. 인생에서도 숙성기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