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은행, 몇몇 재벌회사에 편타대출 1965년 2월 25일. 제48회 임시국회가 30일 일정으로 개회되었다. 그런데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금융 특혜’ 문제를 회의 벽두부터 들고 나왔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화신산업(和信産業), 삼호방직(三頀紡織), 판본방직(阪本紡織) 등이 합계 15억원의 정치자금을 냈으며 이를 위하여 이들 3개 재벌 회사에 145억원의 특혜 여신을 해주었다. 이들에 대한 특혜가 고위층에서 직접 지시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인 공화당의 해명은 즉각 나타났다. “신문에 보도된 앞의 회사들에 대한 145억원의 특혜는 그중 80%가 지급보증이기 때문에 현금 대출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융자는 수출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하여 자유당 정부 때로부터 있어 왔던 것이며 우리나라와 같이 내자 동원이 어려운 데서는 불가피하다. 또한 편타대출은 금융기관에서는 흔히 있어 온 일이며 화신(和信)의 조흥은행에 대한 것은 그 정도가 좀 지나쳤을 뿐이다” 이 편타대출이란 무엇인가. 야당의 이중재(李重載) 의원은 “편차(偏差)인지 뭔지, 그거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금리현실화 사흘 뒤인 10월 2일 장 부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정기예금의 증가와 연체회수, 자금가수요의 감소, 고리채축소, 부동산 투기의 감퇴 등은 물가의 안정과 기동성 있는 행정력의 강화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 신문사설은, “금리현실화는 실시 일주일 동안의 경과로 보아 대체로 성공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금융통제권 밖에서 국민경제를 좀먹어오던 시중사채금리에 도전해서 단행된 고금리정책은 유통의 주류를 공공금융기관으로 환원시키는데 획기적인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공공금융기관의 공신력 회복은 금융정상화의 기반을 굳히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금융대출을 특혜로 생각하던 폐풍도 줄어들고, 항상 문제가 되어온 금융자금의 가수요를 덜게 하는 한편, 예금증대로 수신내 여신 원칙이 바로 잡힐 것 같다.” 금리현실화에도 불구하고 염려했던 물가앙등, 사채금리상승, 금리정책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였던 내자동원 측면에서도 8일 만에 저축성예금이 25억원 이상 증가, 당초 기대를 넘는 성과를 나타냈다. 10월 17일 시민회관에서는 금융사상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경제개발 시급했던 군부, 금리 카드 만지작 1965년 9월 30일. 사채(私債)에 비해 매우 낮은 은행의 예금이자와 대출이자를, 사채이자와 비슷하게 접근시킨다는 명목하에 예금이자는 정기예금의 경우 연 15%에서 30%로 올리고, 대출이자는 일반대출의 경우 연 16%에서 26%로 대폭 인상한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금리현실화조치가 단행됐다. 왜 금리현실화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을 이끌어 나갔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연평균 성장률 7.1%로서 이를 추진하는 설비투자증가율은 22.6%로 짜였다. 그 재원은 국내 조달 9.2%이고, 해외 차입 13.4%. 이 계획이 안고 있는 문제는 5개년 동안 1850억원에 달하는 외자의 원활한 도입과 인플레이션 없는 내자조달이었다. 그러나 당초 재원 조달계획은 당시의 국민저축능력을 넘어선 데다, 1962년 통화개혁에 따른 경제활동의 위축과 1963년 농산물의 흉작이 뒤를 따른 것도 금리현실화 배경이었다. 그리하여 경제개발계획 2차 연도인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3, 4비가 완공되더라도 질소비료의 절대부족이라는 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탁반 강요반으로 또다시 비료공장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1987년 이병철의 사망 직전에 나온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한국비료 공장건설과 관련하여 회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농민들에게 값싼 비료를 공급하기 위한 공장을 꼭 지어달라고 간청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발단은 1964년 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이병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장은 이제 일을 피하지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 경제재건에 적극 참여해주시오.” 이렇게 운을 뗀 박 대통령은 농약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병철은 “기술, 자금, 시장성을 아직 검토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렇다면 이 사장께서 오랫동안 구상하신 비료공장은 어떻습니까.” 이병철은 그 제의에도 즉답을 피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장은 우리 정부에 협조할 생각이 없군요”라고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역부족일 뿐입니다.” “이 사장이 역부족이라면 다른 사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국회 오물투척사건삼분폭리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암적 요소인 밀수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한국비료는 시가 1800만원 상당의 사카린 알을 불법으로 시중에 유포시키다 부산 세관에 적발됐다.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은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발단으로 거의 모든 언론사의 취재경쟁에 불을 붙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성열(金聖悅)은 경향신문 가판 기사를 읽고 “5월 말 진주의 경남일보가 보도한 것이 사실이구나”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은 5월 말 경남일보가 첫 보도를 했는데 대재벌이 사카린 따위나 밀수한다는 지방지의 보도가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중앙지 기자들은 반신반의한 채 사태의 추이만을 지켜보고 있던 중 경향신문 가판 기사가 난 겁니다.” 언론은 여론을 격랑(激浪)처럼 출렁거리게 했다. 제6대 국회 제58회 정기국회 회기 중인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국회에서도 ‘특정 재벌 밀수 사건’이란 안건으로 이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장기영(張基榮) 경제부총리, 민복기(閔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사실 이 4대 의혹사건은 쿠데타 세력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김종필 씨 자신에게는 두고두고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관광객을 유치해 외화를 벌어보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는 평가해 줄 수도 있으나, 이면에 정치자금 조달이라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한 그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최고회의도 내각도 모르는 엄청난 일들을 입안해 밀어붙이며 독주하고, “김종필, 너 혼자서 다 해먹기냐”는 식의 다른 최고위원들의 반발을 사 그를 벼랑으로 몰기도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이러니 주변 인물들도 덩달아 날뛰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풍운아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종필은 사실상 중앙정보부의 정보망과 조직을 동원, 정치적 반대자를 반혁명으로 처단함은 물론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고 소위 4대 의혹사건으로 막대한 자금을 만들어 국정을 요리해 왔었다. 중정의 이런 나쁜 인상을 한결 돋보이게 한 것은 김용태, 장태화, 김종락이었다. 김용태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자 경제담당고문이란 자리에 들어앉아 경제인들을 괴롭히는 온갖 못된 일을 도맡아 하다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군사정권 초기 정치자금 조달방법 새나라자동차 사건 증권파동사건만이 군사정권 초기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부정사건이 아니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빠찡꼬사건은 증권파동과 더불어 4대의혹사건으로서 공화당 조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사건들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 이 사건은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라인이 재일 교포 재산을 끌어들여 국내에 자동차공장을 건설, 특혜를 줌으로써 자금을 조성하자는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정보부 석정선 제2국장 등의 아이디어로 일본제 소형자동차의 부품을 수입, 국내에서 조립하는 새나라공업주식회사라는 공장을 설립한다는 아이디어가 김종필 부장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 의혹사건의 출발이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굴러다니던 대중용 택시는 시발택시였다. 군용지프를 개조한 시발택시는 50대 이상 세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다. 초기에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상자 곽처럼 생겨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자동차 공업도 육성할 겸해서 날씬한 일제 소형차를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포섭대상으로 떠오른재일 교포는 박노정 씨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230억환의 증권금융 요청에 대해 한은 임직원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금통운위) 종합된 의견은 ‘이 융자는 부당하므로 금통운위에서 일단 부결하여 이를 정부에 회부, 정부 단독으로 수행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5월 24일 개정된 한은법에 따라 재무부장관의 금통운위 의결사항 재심요구권 및 재심의도 부결되었을 때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는 조항에 의거, 금통운위가 부결하여 정부(대통령)가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는 얘기였다. 어차피 수행될 때 되더라도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보자, 아니 막는 시늉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판이 벌어지자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부에 회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천병규 재무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금통운위가 5월 30일 오전 10시 10분에 열렸다. 참석자는 민병도 총재, 송찬규, 임석춘, 서재식, 임익두, 정문기, 김병원, 정인욱 위원 등이었다. 회의는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도중에 12시부터 10분간 긴장을 풀기 위해 휴회를 가질 정도였다. 증권금융의 당사자인 한은 총재가 가타부타 한마디도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무차별 공매매로 30억환 ‘구멍’ 금융통화위원회 개최 그런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겨우 열흘도 못돼 거래소는 다시 30억환의 증권금융을 요청하게 되었다. 월말은 닥쳐오는데 수도결제자금이 없어 다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4월 27일 거래소가 재무부에 띄운 공문은 이렇다. “지난 번의 청산자금 및 보통거래 대행결제자금으로 20억환을 한도외로 배정해 주신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지난 4월 20일 주주총회에서 40억환 증자결의에 의하여 35억환은 구주주에게 할당하고 잔여 5억환은 프리미엄부로 일반 공모하게 되어 최소한 50억환이 증자될 것이 예상되는바, 20억환 배정으로 자금이 다소 완화는 되었사오나 앞으로 수도결제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는 30억환 정도의 자금이 필요되옵기, 죄송하오나 당소 사정 고찰하시와 30억환을 추가로 한도외 배정해 주심을 앙원하나이다. 상환은 5월 상순경 20억환, 5월 하순경 30억환을 상환예정이옵기 첨신하나이다.” 무차별 공매매로 4월말 결제자금으로 필요한 금액은 114억환에 달했다. 그러나 증권금융 등 은행대출금을 포함하여 증권거래소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4월 1일자로 시행에 들어간 개정 증권거래법은 거래방식을 종전의 실물거래와 청산거래 대신 실물거래와 보통거래로 바꾸었다. 보통거래는 매매가 성립되면 2개월간은 매수자가 대금을 결제하지 않아도 거래소가 대신 결제를 해주고 이자를 내면 주식을 인도할 수 있는 제도, 증권거래소가 일종의 여신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금리를 부담시켜 실물인수를 통한 실물거래를 유도하여 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선진국과는 달리 당시는 오히려 투기를 더욱 조장하고 증시과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일 주가가 토끼뜀을 하는 판에 몇 푼 안 되는 금리가 무슨 대수인가, 오히려 매일 차액을 정산하는 부담이 없이 두 달 동안 벌 수 있으므로 투기꾼들에게는 더욱 유리했다. 더욱이 보통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대형결제를 해야 하는 증권거래소가 그 엄청난 자금을 감당해 낼 도리가 없다. 파동에 은행권이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거래소가 증자를 해야 할 필연성도 여기서 나왔다. 거래소는 자본금 6억환에서 1차로 4억환을 늘린데 이어 4월중에 2차로 40억환을 증자하기로 결정했다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5월의 증권파동은 1964년 국정감사에서도 액수와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을 밝히지 못한다. 신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은 소위 4대 의혹사건, 그 중 가장 큰 것이 증권파동. 3개월간 7억환 정도만 빌려주면 1백억환을 만들어 주겠다. 검은 유착 속 증시, 소용돌이 휩쓸린 증권가 작전본부는 메트로호텔 608호 중앙정보부를 배경으로 윤응상계가 대증주의 7할을 점유하고 대한증권거래소를 사금고화하였다. 대증신주는 액면의 30배로 공매되고, 50전짜리 주식이 50환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금통위가 34억원의 시중은행 한도외 특별융자결의로 겨우 과열된 증시의 급한 불을 꼈다. 증권파동 수습과정에서 금통위에서 수모당한 재무부가 한은법 개악을 서둘렀다. 증권시장은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았다. 파국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증권파동이 증권, 금융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5240명에 달하는 선의의 군소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돈을 입혀 그들을 패가망신 내지 자살의 길로 몰아넣게 하였다. 김종필의 말 “협잡질해서 정당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돈이 흘러 들어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상임위원회 토의를 거치면서 여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졌다. “외국은행의 국내 진출을 전제로 하여 자금력과 대외신용및 기술면에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환금은행을 설치한다고 하였는데, 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국책은행이 어떻게 자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겠는가?” “일반 시중은행을 갑류은행으로 승격시켜 외환업무를 취급도록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것인지, 환금은행이라는 큰 은행을 거대한 비용으로 설립할 필요가 있는가.” “한국은행은 무자본 특수법인인데 어떻게 환금은행에 출자할 수 있으며, 또 그 재원은 무엇인가. 환금은행은 영리법인이라고 생각되는데 한국은행법 제112조에는 영리법인에 투자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출자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 “환금은행의 업무는 외환업무 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의 업무까지 병합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시중은행의 업무범위를 잠식하고 축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무역금융의 재원은 무엇인가.” “한국은행 외국부를 강화하면 환금은행을 설립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환금은행은 국가가 뒷받침해주고 중앙은행이 출자할 정도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이런 속빈 강정 같은 재벌은 차관도입 러시 이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됐다. 손쉬운 축재수단 앞에서 기업인들은 빈약한 자본과 유치한 경영 및 기술수준을 향상시키려하기보다는 정부에 기대 차관도입권과 각종 특혜를 따내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 무작정 차관만 도입해 놓고 보자는 사고방식은 경영의 부진, 국제경쟁력 단위를 무시한 시설규모, 독점을 위한 기업공개 회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채 늘이기 등 불건실한 기업경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무분별한 외자도입러시로 외채규모가 급증하자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고 차관 망국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 정부는 1966년 8월 3일 공포한 신외자도입법 제26조에서 ‘정부지급보증의 조치로 인한 매년도 원리금상환액이 당해연도의 외환 수입액의 100분의 9를 초과할 수 없다’고 차관도입의 적정규모를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 외채는 현재도 앞으로도 큰 걱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시중은행 지급보증의 상업차관을 합치면이 9%를 훨씬 넘고 있었으며, 1969년부터는 공공차관을 제외한 상업차관의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금리현실화조치 서두른 이유, 재정안정계획 단서조항 탓 또 하나 금리현실화조치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5년 ‘재정안 정계획’의 단서조항이다. 군사정부는 보다 긴밀한 대미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악화된 제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1963년초 재정안정계획을 부활시켰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은 주로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통화량 조정정책으로서, 5·16 이후 중단되었다가 미국으로부터 원조자금 도입을 비롯한 도움을 받기 위해 1963년부터 재개된다. 이 금리현실화조치가 빨리 이행하게 된 이유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연간 원조계획의 기초로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에 금융개혁을 3~4분기 말까지 이행할 것을 합의한 1965년의 재정안정계획의 단서조항 때문이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과 D. C. Cole의 공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따라서 동 개혁조치는 이러한 시간계획에 맞추어졌고 원조 자금은 순조로이 도입되었다.” 정부는 1965년 9월 24일 ‘이자제한법’을 급히 고치고 3~4분기 마지막 날이었던 9월 30일에 금리현실화조치를 서둘러 단행한 것이다. 1965년 12월 3일 국회에서 무소속 소선규(蘇宣 奎) 의원의 질의를 들어보자.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군사정권, 통화개혁의 목적 군사정권은 6월 10일 0시를 기해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통화조치에 관한 담화문’은 이렇다. “우리나라 경제실정을 들여다 볼 때 의법처리중인 부정축재 외에도 구정권의 부패에 편승하여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溫存)되어 있고, 한편 금융기관 예금 등의 대폭 증가는 장기성을 띤 진정한 저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음성자금은 사회, 정치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아직 활발히 산업자금화하지 않고 있고 그간 누증된 통화량은 언제든지 급격히 투기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동향은 악성 인플레이션의 요인으로써 엄중히 경계를 요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안정리에 이룩하여 누구나 다 일터를 갖고 향상된 생활을 하며,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 나가기 위해서는 음성자금과 과잉구매력을 진정한 장기저축으로 유도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 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 즉 통화개혁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즉 통화개혁의 목적은 악성 인플레이션 예방과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을 백일하에 끌어내 산업자금으로 활용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미국 향한 제1진, 미국의 공업단지를 시찰하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제1진은 한국전쟁 때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군부와는 일종의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라는 의식을 하고 있던 그는 연고지인 동부지역의 미국 실업인들을 대거 불러 모아 한국 실업인들과의 교섭을 주선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막상 교섭에 들어가자 우리 교섭단은 미국 측의 충고와 훈계만을 들어야 했다. “한국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우선 임해지역이나 내륙의 요지에 수송, 전력, 교통, 용수, 노동력, 광활한 용지 등을 갖춘 공업지구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 외자도입법을 합리적으로 제정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맞도록 조성하라. 또 직접투자에는 증권투자와 경영참가, 단일합작 및 유형재산투자, 기술과 노하우 등 다양한 구상을 할 것이며 차관투자로는 직접 차관과 간접차관, 그리고 기술제휴는 기술자 초빙과 파견 훈련, 컨설팅 및 기술훈련소 설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밖에도 차관 상환조건과 금융기관의 지급보증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필요하다” 등 얘기들이었다. 역시 금융에 대한 테크닉을 필요로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적 경제개발계획의 태동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는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 백성이 허다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GNP 세계 13위의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다. 1997년 외환의 유동성 부족으로 IMF의 구제 금융을 얻어 위기를 넘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지만. 이렇듯 박정희를 넘어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기적을 가져다준 4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5·16 쿠데타가 터진 바로 그날 오후, 육군참모총장실 옆 소회의실. 박정희 등 쿠데타를 주도한 대여섯 사람이 장도영 참모총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대표하여 장도영 장군이 첫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자리였다.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의 브레인인 류원식 대령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국체(國體)는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겠소?” “입헌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시오.”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할까?” 한참이 지나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朴正熙)는 좌우를 돌아보다가 류원식에게 눈짓을 했으나 그는 계속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참다못한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절대 권력 행장 자리 전신용(全信鎔) 같은 사람은 1960년 이후 정치권 인사와 친분관계로 서울, 상업, 한일은행 등에서 행장을 지냈으며 이보형(李寶衡)도 서울은행장은 잠시, 제일은행장만 7년이나 지냈다. 또 부총리를 역임한 뒤 은행연합회장을 거친 김준성(金埈成)의 경우 대구은행장과 제일, 외환은행장, 산은총재와 한은총재를 잇따라 지내 금융계 인사들에게는 보기 드물게 인사 행운을 누린 측이다. 김용운(金龍雲)은 국민, 조흥, 서울신탁은행에서, 김진흥(金振興)은 한일, 주택, 한국신탁은행에서 각각 세 번씩 은행장을 지냈으며, 하진수(河震壽), 문종건(文鍾健), 임석춘(林錫春), 윤승두(尹承斗), 심원택(沈遠澤), 이석주(李 錫珠) 행장도 두 번씩 은행장을 역임했다. 과거 행장 전성기 때의 얘기다. ‘하늘이 내려준다’는 행장 자리.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상당한 운이 따라야 겨우 오를 수 있는 ‘금융계의 왕좌’ 같은 자리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금융계에서 40여 년을 무사히 지내고 아무탈 없이 행장에 오르는 사람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할 만하다. ‘친위 점포 지점장’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 행장이 되는 길은
서울은행 손홍균 행장의 구속 1996년 11월 서울은행 손홍균(孫洪鈞) 행장이 대출 수수료를 받아서 구속되었다. 손 행장은 금융계의 고질적 병폐인 투서로 중도퇴진됐다는 후문이다. 사연인즉, 손 행장과 라이벌 관계였던 이 은행 퇴임 임원이 손 행장의 비리를 몇 달 전 검찰에 투서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검찰에서는 이 투서에 확실한 물증이 제시됐기 때문에 손 행장을 내사,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손 행장은 1996년 3월 부도난 국제벨브 등 2~3개 업체에 대출한도를 초과하면서까지 200여억원을 대출해 주면서 2억1000여만원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제벨브의 경우 이 은행내 손 행장의 반대세력이 1996년 3월 경제정의실천 시민연대에 제보함으로써 비위사실이 불거진 것. 경실련은 당시 국제벨브가 재무제표를 위조, 서울은행에서만 100억원을 대출받은 과정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다. 손 행장은 결국 자진출두형식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국제벨브공업 회장 박현수(朴賢洙, 53)로부터 받은 대출사례비는 1995년 4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1억원. 손 행장과 박 회장은 처음 10만원권 수표로 4000만원의 사례비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은행장들의 수난 1970년대 대형 금융사고가 빈발할 무렵 은행장의 목숨은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었으며 재수가 없는 경우에는 쇠고랑을 차고 교도소에 드나들기 일쑤였다. 하기는 그전에도 은행장 구속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자금조달사건으로 송인상(宋仁相) 재무장관, 김진형(金鎭炯) 한은총재, 김영찬 (金永燦) 산은총재, 이기붕의 6촌 동생인 이기호(李起虎) 제일은행장 등이 검찰에 구속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된 적은 있다. 또 1961년 산업은행 이필석(李珌奭) 총재는 40일 간의 수형 생활(囚刑生活)을 맛본 적이 있었다. 총재 취임 8일째 되는 날 6월 8일 새벽, 중앙정보부 기관원에 연행돼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체포이유는 상업은행 은행장 당시의 대한제분 대출사건 내사착수였다. 그러나 수감의 진짜 배경은 장도영(張都瑛) 의장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사건에서 의혹이 짙어가던 모 장군과의 연관관계로 취조를 받았다. 결국 정치싸움의 유탄에 희생되었고 행장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금융사고와 관련돼 현직 은행장들이 수난을 당한 경우는 1972년 외환은행 홍용희(洪龍熹) 행장 구속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금융사고만 터지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