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_장승규 건너편 숲에 백설이 수묵화를 치고 있다 쓰윽 쓱 지나가던 백설의 붓이 한 곳에 자꾸 덧칠을 한다 폭설이다 숲속 공터에 칼날처럼 마음에 날을 세우고 사는 외솔 한 그루 나날이 외고집 뿌리가 깊어 갔다 너 없이도 산다며 서운하다고 늙은 것 자르고 무례하다고 젊은 것 자르고 가까운 것부터 잘려나갔다 그때부터 흉터처럼 검은 공터가 생겨나고 고집이 깊어 갈수록 더 넓게 숲을 잘라 먹었다 그 검은 흉터 위에 백설은 아직도 연신 덧칠이다 영문도 모르고 덧칠 속 화폭을 가로지르다가 폭설을 뒤집어 쓰는 까치 한 쌍 외솔이 제 슬픈 가지를 선뜻 내어준다 덧칠이 금방 멎고 하얀 공터에 고운 영상시가 뜬다 외솔은 시의 배경이 되었고 이제 화폭 한켠에 붉은 낙관이 선명하게 찍힌다 [시인] 장 승 규 경남 사천출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2002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그리운 날은』 『민들레 유산』 등 [시감상] 양 현 근 세월의 아픈 흔적을 뒤집어 쓴 외솔의 푸른 가지며 옹이에 폭설이 내려 앉는다 젖은 기억이며 시린 상처마저 따스하게 껴안는 백설의 붓질이 한 폭의 수묵화다. 하얀 가지 끝에 나란히 앉아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까치 한 쌍의 시린
민들레 유산_장승규 지난 밤바람에 상경했을까 검정 보퉁이 하나를 끌어안은 민들레 흰 저고리 아파트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다. 이제 막 보퉁이 먼저 낯선 풍경 위에 내려놓더니 아직도 두리번거린다 형제들이 나누어 가졌을 보퉁이 안을 슬쩍 엿보았다 보잘것없이 작은 그 안에 얼마간 먹고 지낼 양식은 잊지 않고 넣었고 앞으로 크게 될 떡잎도 아주 작게 접어 두었고 노란 예쁜 꽃도 몇 송이나 들어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부디 높은 곳 찾으려고 하지 말거라 낮더라도 네 마음 편한 자리에서 뿌리내리고 살거라 마지막 말씀도 고이 접어 넣었다 민들레 흰 저고리는 돌아앉아 조용히 흔들리고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노란 꽃들은 둘러앉아 티 없이 수다 중이다 [시인] 장 승 규 경남 사천출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 졸업 2002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이 그리운 날은』 『민들레 유산』 등 [詩 감상] 양 현 근 민들레는 세상 낮은 곳에 자리잡고 사는 다년생초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들판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으며, 노란 꽃봉우리를 피운다. 꽃이 지고나면 솜털모양의 깃이 나오는데, 바람을 타고 날아가서 널리 퍼지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자체 생명력과 번식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