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동아시아 돌무지 문화와 묘제의 변화

2023.10.16 07:12:56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동아시아의 묘제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서 그 양식이 변해왔다.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은 계급 사회의 도래에 따른 지배자의 우위를 상징하면서 하늘에 제사하는 제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적석고분은 만주계 양식이지만 백제의 한성과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던 소백산맥 지역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고인돌이나 적석고분이 사라지고 봉분을 흙으로 조성하는 횡혈식 석실분과 중국식 통광묘가 묘제의 주용한 형식으로 자리하였다.

 

 

 

 

무덤과 제단, 칠성바위의 역할을 했던 고인돌

 

고인돌은 납작한 판석이나 돌덩이 밑에 ‘괸 돌’ 또는 ‘고임돌’을 놓았다. 고인돌은 무덤이면서 제단이며,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돌 방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덮개를 얹었다. 탁자형은 시신을 지상에 놓아두고 평지에 높은 받침돌로 무덤 방을 만든다. 덮개형은 땅을 파고 무덤방을 돌로 덮는다. 바둑판형은 무덤방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다시 덮개 돌을 놓았다.

 


강화 고인돌은 탁자형으로 받침돌에 덮개 돌을 놓았다. 보령 죽청리 고인돌은 중심에 낮은 받침의 덮개형 고인돌로 제단을 만들고 주변에 남방식 고인돌을 배치했다. 신안 방월리 고인돌은 7기의 고인돌로 칠성바위를 형성하고 있다. 제주도 고인돌은 다양한 형태로 지석없는 무지석, 3∼4개 지석이나 2중의 지석, 판석형 지석으로 발전하였다.

 

 

 

 

 

 

만주 부여계 돌무지와 적석총

 

돌무지는 무기단식의 원형이나 정사각형으로 자연석을 쌓았다. 돌무지는 신석기시대부터 돌을 여러 겹으로 깔거나 쌓아서 만들었다. 발전된 형식인 적석총은 지면을 평평하게 고르고 돌을 쌓아서 돌무지를 조성했다.

 

돌무지 형식은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몽골의 오보에는 돌무덤 위에 나무집을 지어서 적석총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은 꼭대기에 건물인 향당을 세워서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도 주변에 기와가 흩어져 있다.

 

 

만주 집안(集安)일대에 1만기 이상의 적석총이 분포하고 있다. 태왕릉은 상단에 향당을 설치하여 제단과 석실이 있었고, 무덤 주변에서 기와와 벽돌 조각을 볼 수 있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서 그 안을 자갈로 채웠다. 각 면은 거대한 호석을 세 개씩 배치하여 내부 돌이 밀리지 않게 했다. 대동여지도는 이 지역을 황성(皇城)과 황묘(黃墓)로 표기하였다.

 

 

적석총은 정사각형으로 기단을 쌓고, 윗부분의 정방형 돌 망에 시신을 놓았다. 석촌동 3호분은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복원된 3단보다 더 높은 7단으로 보고 있다. 한강 이남의 고구려계 적석은 일정하게 돌을 규칙적으로 쌓아서 만들었다. 고구려가 지배했던 5~6세기에 아차산성, 단양유구, 의성유구 등에서 볼 수 있다. 산청 구형왕릉은 돌을 쌓은 적석총이다.

 

 

 

 

횡혈식 석실문과 토광묘

 

고인돌은 덮개 돌 아래에 돌기둥을 세우고 봉분을 얹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발전했다. 횡혈식 석실분(돌방무덤)은 고인돌에 봉분을 얹은 형태다.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중앙에 석관이나 석곽을 배치했다. 하남의 이성산성에서 금암산에 이르는 능선에 석곽묘군이 펼쳐져 있다.

 

가야와 말갈이 산 능선에 석곽묘를 축조한 것처럼 산 능선에 묘를 조성했다. 방이동고분의 1호분은 지름 12미터, 높이 2.2미터로 널길(연도)과 널방(현실)을 가진 횡혈식석실분이다. 그리고, 공주 수촌리고분군은 대형토광목곽묘, 횡혈식 석실분, 수혈식 석곽묘 등으로 혼합되어 있다.

 

신라는 나무 널이 사용되었다가 지배자의 칭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 왕으로 바뀌면서 묘제도 변했다. 마립간기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은 석실에 관을 안치하고 그 위를 잔돌로 채워서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다. 그 안에 순장과 함께 금제 부장품을 매장했다. 마립간이 왕으로 호칭을 바꾸면서 6세기 중엽부터 돌방무덤으로 변화가 이루어졌다. 중국식 묘제는 고려와 조선까지 동일한 양식으로 전승되었다.

 

 

 

 

무덤 양식의 변화는 민족의 이동이나 지배 계급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민족의 이동이 발생하면 정복 민족이 토착 민족의 양식을 바꾸었고, 또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등장하면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이후 만주에서 한반도,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커다란 민족의 이동이 없어지면서 묘제의 양식에도 변화가 없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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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신구대 교수 eserv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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