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급변하는 국제정세, 병자호란과 삼전도비

2023.06.21 20:35:10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급변하는 국제정세는 병자호란을 전후의 동아시아 정세와 서구의 식민지 개척에 따른 국제 패권의 변화와 유사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여진족은 청을 세워서 역대 최고의 왕조를 구축했지만 조선은 왕권의 약화와 당파 싸움으로 국제질서에서 배제되었다. 오히려 동일하게 쇄국정책을 취했던 일본과 통신사와 국왕사를 상호 파견하면서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함경도와 여진족의 관계

 

여진족은 목축과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전환하면서 계급을 형성하고 국가를 탄생시켰다. 조선 건국의 출발점인 함경도 경원(慶源)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 북방 유목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북방계인 숙신‧읍루‧예맥‧부여‧말갈 등이 지배하다가 고구려‧당나라‧발해‧거란‧금나라‧원나라‧명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주로 여진족이 활동하였고, 이성계의 고조인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였고, 그 아들인 이행리(李行里)도 이곳의 관리를 지냈다. 이곳의 관리였던 이징옥(李澄玉)이 계유정난으로 파면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를 내세운 ‘이징옥의 난’을 일으켰다((1453년).

 


누르하치의 직계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가 이 지역에서 살다가 뒤에 회령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조선이 건국하자 이성계에 신하로 공물을 바쳤고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다(1404년). 조선에 장자인 아곡(阿谷)을 시켜서 공물을 바치고 양속관계(兩屬關係)를 유지했다. 명나라는 만주에서 혼란을 일으켰던 맹가첩목아와 아들인 동산(童山)을 살해하였다. 누루하치는 동산의 아들로 고조 석보제편고(錫寶齊篇古), 증조 복만(福滿), 조부 각창안(覺昌安), 부모 탑극세(塔克世)로 이어진다.

 

명나라 말기에 여진의 왕과(王果)와 그 아들 아태(阿台)의 세력이 커지면서 자주 명나라와 충돌하였다. 명나라는 이성량(李成梁)을 시켜서 왕과 세력을 토벌하였고(1574년), 아태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명의 변경을 침입하였다. 누르하치의 조부 각창안은 장자인 예돈파도로(禮敦巴圖魯)의 딸을 아태에게 시집보냈고, 아태의 딸이 탑극세의 처가 되면서 친족혼 관계를 맺었다.

 

누르하치의 의한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

 

아태 아래에서 누르하치는 군사를 일으켜서 1583년부터 만주의 모든 여진부족을 꺾고 건주여진에 귀속시켰다. 그는 명의 건주좌위도독(建州左衛都督)과 조선의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낮추면서 조공을 바쳤다. 임진왜란 시점에 조선에 구원병을 자청할 정도의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은 하세국(河世國)을 시켜서 누루하치를 정탐하였다. 하세국은 누르하치와 그의 동생 소을가적(小乙可赤)이 군사 1만 5000명으로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1595년). 그리고, 조선은 신충일(申忠一)과 하세국을 누르하치에게 파견하였다. 신충일이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누루하치와 후금의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누르하치는 망자합(忙刺哈)을 만포진에 보내서 자신이 한성에 가서 벼슬을 받고 싶다(職帖)는 뜻을 전했다. 선조(宣祖)는 여진에 직첩을 수여하고 관복과 급여로 면포 100동을 주었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국서를 전달하면서 ‘건주등처지방국왕퉁(建州等處地方國王佟)’의 공식적으로 국왕을 자칭하였다(1605년).

 

그리고, 그는 명에 바치던 조공을 끊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려고 하였다. 누루하치는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얻기 위하여 조선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누루하치는 광해군에게 다른 여진족에게 보내던 면포를 주기를 청하였고, 전년도에 초피(貂皮) 80벌을 바치고 면포(木綿)를 받아갔다.

 

광해군의 정세판단과 인조반정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에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다(1609년). 화기도감(火器都監)을 확대하여 각종 화포를 주조하고, 일본에서 조총과 장검 등을 구입하면서 대비했다. 광해군은 병력을 확보하고 지휘관을 얻기 위하여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했다. 도성의 함락에 대비하여 강화도를 정비하고 군량미를 비축했다.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광해군도 재위 기간 내내 누르하치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누루하치가 후금을 건국하였고(1616년), 조선과 명이 후금을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명나라가 47만의 후금 토벌군을 결성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여 강홍립을 파병하였다가 패하고 항복하였다(1619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조선과 누루하치간 관계에 더 큰 균열이 발생했다(1623년).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면서 정묘호란이 발생하여 양국이 형제관계(兄弟關係)를 맺고 전쟁을 종식시켰다(1627년).

 

후금이 만주와 북경을 정복하면서 ‘청(淸)’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청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다시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다(1636년 12월 1일). 청군이 12월 9일 압록강, 14일 개성을 지나면서 강화도가는 길이 막히자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했다. 청태종은 탄천(炭川)에 군사를 포진시키고 남한산성 동쪽의 망월봉(望月峰)에서 성안의 조선군을 감시하면서 40여일이 지났다.

 

서인 중에서 인조반정에 참가한 공서(功西) 중심의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와 직접 참여하지 못한 청서(淸西) 중심의 주전파(主戰派, 김상현)간 논쟁이 일어났다. 주화파의 최명길이 강화를 요청하는 글을 썼고, 청 태종은 답서에서 항복하고 척화를 주도한 주전파 2, 3인을 보내라고 했다.

 

병자호란은 짧은 기간에 조선의 굴욕적인 패배와 무릎을 꿇었고, 명과의 관계도 완전히 끊게 되었다. 효종은 10년의 볼모 생활을 하다가 돌아와서 북벌을 계획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조선과 청의 군신관계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895년).

 

 

조선은 임진왜란에 의한 후유증을 치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시 한번 병자호란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양대 전란으로 물품과 화폐가 활발하게 거래되고 인구 이동이 빈번한 사회로 점차 변화시켰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파병한 군대의 유지 비용으로 은을 보내면서 조선은 은의 유통이 확산되었다.

 

조선 상인이 일본 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중국 비단을 팔면서 은화 유입이 늘어났다. 은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교역에 활용되었다. 1684년부터 1697년까지 연평균 234,900냥(8.8톤)의 은이 조선에 들어왔다. 변화하는 국제정세는 위기이면서 사회변화의 기회를 제공하는 이중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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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 신구대 교수 eserv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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