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장기민 한국외대 도시·미학 지도교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유럽의 변방’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도시다. 파리나 런던처럼 대륙 중심의 화려함을 뽐내지도 않고, 바르셀로나처럼 관광 인프라가 폭발적으로 확장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변방성은 리스본만의 색을 만들었다. 태양이 낮게 비추는 언덕 위, 수백 년의 시간을 담은 계단과 골목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도시의 기억을 담은 책장이다. 리스본의 재생은 바로 이 계단과 골목을 지우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쓰는 것에서 출발한다.
오래된 도시를 ‘다시 이야기하기’
리스본은 18세기 대지진과 쓰나미, 화재를 겪으며 거의 전 도시가 무너졌다. 이후 복원과 재건을 반복했지만, 20세기 중반 독재정권의 장기 집권과 경제 침체로 쇠락했다. 다른 도시들이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오래된 건물을 허물 때, 리스본은 골목과 계단을 그대로 남겼다. 대신 그 낡음을 ‘리스본다움’이라는 브랜드로 만들었다.
알파마(Alfama)의 구불거리는 골목과 언덕길, 바이샤(Baixa)의 18세기 재건 건축물, 바이로 알투(Bairro Alto)의 밤문화 거리 모두 보존의 대상이자 재생의 무대가 됐다. 시 당국은 빈집을 청년 예술가의 작업실로, 버려진 창고를 커뮤니티 센터로 개조했다. 재생의 핵심은 ‘깨끗한 새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 위에 현재를 덧입히는 방식이었다. 마치 오래된 책의 본문 위에 새로운 문장을 주석처럼 써 내려가는 작업이다.
변방을 스타트업 무대로
리스본은 ‘변방’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불리함이 아닌 기회로 바꿨다. 2016년부터 매년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기술 콘퍼런스 ‘웹 서밋(Web Summit)’은 리스본을 글로벌 스타트업 지도의 전면에 올려놓았다.
특히 항만 재개발 구역이 주목받았다. 한때 어선과 화물선이 드나들던 창고 단지는 IT기업, 디자인 스튜디오, 스타트업 사무실로 변신했다. ‘LX 팩토리(LX Factory)’는 대표적인 사례다. 19세기 섬유공장이었던 이곳은 카페, 서점, 예술공방, 코워킹 스페이스가 모인 복합문화지구가 됐다. 낡은 벽돌 건물과 철골 구조물은 그대로 두고, 내부를 창의적인 공간으로 재해석한 결과다.
여기에 저렴한 임대료와 쾌적한 기후, 양질의 인프라가 결합하면서, 전 세계의 디지털 노마드와 창업가들이 리스본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산업 재생의 성공은 ‘낡음이 산업 경쟁력의 약점’이라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다.
시간과 재료를 살리는 법
리스본의 디자인 전략은 ‘시간의 흔적’을 감추지 않는 데 있다.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아줄레주(azulejo) 타일 벽화는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항해 시대의 이야기, 종교적 신화, 일상의 순간을 담은 역사적 기록이다.
현대 건축가들은 이를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현대적인 해석을 덧입힌다. 새로 지은 건물 외벽에 전통 타일 패턴을 레이저 커팅한 금속 패널로 입히거나, 버려진 철교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안에 도서관과 카페를 넣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낡음과 새로움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미를 강화하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속도를 줄이는 도시 전략
리스본의 재생은 ‘빠른 확장’이 아니라 ‘속도의 제어’를 전략으로 삼았다. 고층 빌딩 대신, 트램과 전기 자전거, 도보 이동 중심의 교통망을 정비했다. 태양광 패널 보급, 해안선 생태 복원, 지역 농산물 시장 확대 같은 정책은 도시의 자급력을 높였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에서 리스본은 ‘재생’을 방재의 원칙으로 확장했다. 태그스강 하구의 홍수 위험 지역에는 방조제를 높이는 대신, 수변 산책로와 생태 습지를 조성해 재난 대응과 시민 여가를 결합했다. 이는 단순한 환경 대응이 아니라, 도시민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재생 전략이다.
장소성이 만든 정체성
리스본의 가장 강력한 자산은 ‘계단과 골목’이라는 평범한 구조물이다. 언덕 위로 이어지는 계단은 도시의 수직 동선을 만들고, 골목은 예측할 수 없는 시선을 제공한다. 이 단차와 곡선은 현대 건축이 흉내낼 수 없는 공간적 서사다.
관광객은 계단 끝에서 내려다본 붉은 지붕과 푸른 강, 그리고 골목 모퉁이에서 마주치는 작은 카페에 매료된다. 주민에게는 일상적이지만, 외부인에게는 유럽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리스본은 이 ‘평범한 독창성’을 재생의 중심에 두었고, 그것이 곧 도시의 정체성이자 산업 자산이 됐다.
리스본은 ‘유럽의 변방’이 도시 재생의 실험실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중심부처럼 빠르게 소비되고 소모되지 않는 덕분에, 낡음을 지키고 새로운 기능을 덧입힐 시간이 있었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도시의 미래는 반드시 새것이어야 하는가?” 리스본의 답은 ‘아니오’다. 미래는 과거와 단절한 공간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과거의 결을 존중하며 그 위에 현재를 덧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생이고, 지속 가능한 도시의 길이라는 것이다.
리스본의 계단과 골목은 단순한 경관 요소가 아니라, 낡음을 다시 쓰는 방법을 압축한 상징이다. 도시 재생은 기술과 자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곳의 빛, 바람,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이 함께 엮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리스본은 그 섬세한 방식을 알고 있는 도시다. 그리고 그 배움은,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선 다른 도시들에게도 충분히 유효하다.

[프로필] 장기민 한국외대 도시·미학 지도교수
•(현)서울창업기업원 기업경영위원장
•(현)한국경영환경위원회 위원장
•인하대학교 경제학, 도시계획학 박사
•국민대학교 디자인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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