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구 관세청장의 행정노트] 아나콘다와 오일샌드(Oil Sands)

2026.04.27 18:22:47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개인적으로 나는 괴물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유독 애착이 가는 시리즈는 영화 아나콘다다.

 

거대한 뱀이 인간을 위협하는 단순한 설정이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는 요소가 있다. 최근 출장길 비행기 안에서 2025년에 개봉한 아나콘다를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오리지널이 주던 긴장감이나 완성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연출과 연기, 이야기 전개 모두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코믹한 색채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를 조금 내려놓으면 나름의 재미는 있었다.

 

그 영화 속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뱀은 하나의 은유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덮쳐오는 괴물이다. 온갖 어려움에도 그들은 결국 꿈을 이루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영화 대사를 넘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스크린 속 괴물이 아니다.

 

 

현실에는 훨씬 더 크고 복잡한 ‘보이지 않는 괴물’들이 존재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관계 속 갈등,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압박들. 그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때로는 거대한 뱀보다 더 집요하게 우리를 조여온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괴물’은 개인의 삶을 넘어, 국가와 경제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국제통화기금이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은 이를 잘 보여준다. 2026년 세계 경제 성장률은 3.1%로 하향 조정되었고,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망 위축, 심리 위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가 역시 4.4%로 상향되며 인플레이션 압력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이러한 거대한 ‘경제의 괴물’ 앞에서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답의 한 축에 관세행정이 있다. 관세행정은 기본적인 징세 기능을 넘어, 국가 경제의 흐름을 읽고 위험을 차단하며 동시에 합법적 교역의 길을 넓히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위기와 가장 먼저 맞닿는 ‘경제 국경의 최전선’이다.

 

최근 중동 지역의 긴장 고조는 이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에너지 공급망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한 번 흔들리면 산업과 물가, 국민 생활 전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원유 한 방울의 흐름이 국가 경제의 안정성과 직결되는 시대다. 이에 관세청은 중동 상황 이후 캐나다산 원유에 주목하고 ‘원유 수급선 다변화 TF’를 구성해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캐나다는 세계 3위의 원유 매장국이며, 앨버타주는 전체 생산량의 약 80%(약 15억 배럴)를 담당하는 핵심 산유지다. 태평양과 연결된 수출 구조를 갖고 있어 최근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갈등의 영향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다만 내륙 생산지에서 태평양 연안 선적항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여러 생산자의 원유가 혼합되는 구조로 인해 원산지 증명이 어려웠고, 이로 인해 한-캐나다 FTA 특혜세율(3%에서 0%) 적용에도 제약이 있었다.


북미의 핵심 에너지 생산지인 앨버타주와의 협력을 통해 ‘원산지 증빙서류 간소화’라는 구조적 해법을 마련했다. 기존 제도가 개별 생산자의 입증에 의존했던 한계를 넘어, 앨버타 주정부가 전체 생산량과 외부 유입 물량을 통합 관리·검증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한 원산지 입증 체계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주한 캐나다 대사관과 앨버타 주정부와의 신뢰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되었다. 직원이 직접 뜨개질한 ‘갓’을 씌운 마약탐지견 캐릭터 기념품을 전달하고, 교역 확대에 대한 기대를 담아 한글 이름을 새긴 도장을 선물했다.

 

이러한 개선은 단순한 행정 절차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관세율이 3%에서 0%로 낮아지면서 기업의 부담이 줄고, 공급망이 원활해지며, 에너지 가격 안정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특히 이번 협력을 통해 앨버타산 원유의 한국 수출은 연간 최대 3,300만 배럴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이는 단순한 물량 증가를 넘어, 중동 중심의 수입 구조에서 벗어나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중동 원유는 비교적 점도가 낮고 유동성이 높은 액체 상태의 원유로, 지하에서 자연 압력 또는 펌핑으로 쉽게 생산되며, 황 함량에 따라 경질유·중질유로 나뉘지만 전반적으로 채굴과 정제가 용이한 편이다.

 

이에 반해, 앨버타 오일샌드(Oil Sands)는 모래·점토·물에 매우 점성이 높은 역청(bitumen)이 섞인 형태로, 상온에서는 거의 흐르지 않는 반고체 상태이며, 노천채굴이나 증기 주입 방식으로 점도를 낮춰 추출한다. 이 과정은 에너지와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이번 사례는 관세행정이 단순한 통관 절차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현실을 반영하고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관세행정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경제의 흐름을 조정한다. 위기는 늘 예고 없이 다가오지만, 그 대응은 사전에 준비되어야 한다.

 

최근 추진되고 있는 AI 기반 위험관리와 데이터 중심 통관·수사 체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위험을 사후에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식별하고 차단하는 구조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관세행정의 본질은 균형에 있다. 한쪽에서는 불법과 위험을 차단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합법적 교역을 촉진한다.

 

이 두 축이 동시에 작동할 때, 국경은 단순한 경계를 넘어 ‘기회의 통로’가 된다. 다시 돌아보면, 우리가 괴물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단순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그 속에서 결국 살아남고, 극복해 내는 이야기를 보기 위해서다. 관세행정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경제의 괴물과 마주하면서도 그것을 통제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위기는 사라지지 않지만, 대응 방식에 따라 그것은 위협이 되기도 하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는 원유처럼, 관세행정의 변화도 조용하지만 깊게 스며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작은 제도의 변화가 얼마나 큰 흐름을 바꾸는지를, 그리고 그 변화가 결국 국가의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J. 허슬러’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알을 깨면 병아리가 되지만, 남이 깨주면 계란프라이가 된다. 인생은 스스로 부딪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을 준다.” 국가도 조직도 개인도 계란 프라이보다는 병아리가 되는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프로필] ▲1969년생 ▲경남 밀양고 ▲서울대 경영학과 ▲서울대 행정학 석사 ▲영국 버밍엄대 경제학 박사 ▲행시 36회 ▲관세청 서울세관장 ▲부산 세관장 ▲국무조정실 조세심판원 상임심판관 ▲관세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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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구 관세청장 tf@tf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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