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골프히스토리] 골프 신이라 불린 사나이 앨런 로버슨 ①

2022.12.30 14:04:02

 

(조세금융신문=김대중 골프앤파트너 대표) 앨런 로버슨 이야기

 

챔피언 골퍼(Champion Golfer), 최초 프로골퍼(First Professional Golfer), 골프 볼(페더리 볼) 명인, 골프 클럽 제작자, 내기 골프에서 져본 적이 없는 골퍼, 캐디, 올드 톰 모리스의 스승, 세인트 앤드류스 올드 코스 최초로 80타를 깬 골퍼, 디 오픈 우승 기록이 없는 위대한 골퍼,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 클럽의 캡틴, 이 모든 수식어는 오로지 한 사람을 가리킨다. 바로, 앨런 로버슨(Allan Robertson, 이하 ‘앨런’이라 칭함)이다.

 

현대 골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앨런을 설명해야 한다. 그는 1815년 9월 15일 스코틀랜드에 있는 파이트, 세인트앤드류스에서 데이비드 로버슨(David Robertson)과 앤 벨(Ann Bell)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800년대 초반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시니어 캐디이자 캡틴으로 활동했으며, 페더리 볼 제작자이자 최고의 플레이어였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서 골프 관련으로 이름을 떨치던 집안으로는 로버슨(Robertson), 굴레이(Gourlay), 모리스(Morris), 앤더슨(Anderson), 던(Dunn), 파크(Park) 패밀리 등이 있다.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이름들이다.

 


여기서 잠깐 19세기 초반에 캐디는 어떤 상황이었는지 간단하게 알아보자. 골프는 부유한 사람들만의 스포츠였고, 일반인들이 플레이하기 힘든 경기였다. 이러한 골프 환경에서 유일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었던 계층이 바로 캐디였다.

 

캐디는 부유한 후원자들이 라운드를 할 때, 동반으로 나가서 클럽 서브를 하면서, 골프를 가르쳤다. 골프를 치지 않을 때는 골프 볼과 클럽을 만드는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그린 키퍼가 되기도 하고, 코스 디자이너, 내기 시합을 위한 프로골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앨런은 1837년 22세에 헬렌 엘리엇(Helen Elliot)과 결혼하여 1840년 헬런 로버슨을 낳았고, 와이프인 헬런이 1843년에 죽고, 이후 4번의 결혼을 더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골퍼 이전에 ‘볼 메이커’였던 앨런

 

앨런을 말할 때 가장 처음 언급하는 말이 바로 볼 메이커(Ball Maker)라는 직업이며, 프로골퍼로 알려지기 전에 뛰어난 장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페더리 볼 제작이다.

 

위 그림은 앨런이 1842년에 만든 페더리 볼로 2007년 7월 13일 경매에서 US$ 9,495에 팔렸다. 앨런이 만든 페더리 볼 표면에는 위 그림과 같이 ‘1842년에 앨런이 만든 29(Allan 29 Made 1842)’라고 명확하게 써있다.

 

이 페더리 볼은 한 번도 플레이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이며, 바느질이 안으로 되어 있어서 바느질 흔적이 보이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2004년 기사에 보면, 앨런의 아버지(?) 윌리엄 로버슨이 1790년에 만든 페더리 볼이 2004년도에 US $45,000에 팔린 기록이 남아있다.

 

지난 연재에 언급했듯이 최초의 골프 볼은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후 약 400년에 걸쳐 사용한 볼이 바로 페더리 볼(Featherie Ball)이다.

 

 

1486년 네델란드에서 스코틀랜드로 페더리 볼이 수입됐다는 기록이 있다. 한 개의 페더리 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신사들이 쓰는 모자에 거위 털을 가득 채워야 만들 수 있었고, 이 거위 털을 펄펄 끓여서, 거위 깃털 숨이 죽어 걸쭉하게 되면 물기를 제거하고, 송아지 가죽 바느질한 것을 바느질 흔적이 남지 않도록 뒤집어서 그 안에 거위 털을 집어 넣고 꽉 채운 후 꿰매서 말리면 한 개의 페더리 볼이 완성되었다.

 

가죽 안에 들어간 거위 털은 마르면서 팽창하는 경향이 있고, 가죽은 마르면서 수축되는 반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거치면 페더리 볼이 굉장히 딱딱해지고, 마지막 둥근 모양은 손으로 굴려가면서 만들었다.

 

다른 페더리 볼 장인들이 볼 표면에 자신의 성을 기록한 반면, 앨런은 자신의 이름인 앨런을 표면에 스탬프로 찍어서 차별화를 꾀했다. 아마도 앨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볼 표면에 로버슨(ROBERTSON)이라고 패밀리 네임을 스탬프로 찍었기 때문에 선조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앨런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스탬프로 사용했을 것이다.

 

포어 캐디의 등장

 

보통 페더리 볼 제작자들이 하루에 만들 수 있는 볼의 수는 2개에서 3개 정도이며,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페더리 볼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굉장히 비쌌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비싼 볼이 잘못 맞으면 터지고, 물에 젖으면 늘어나는 심각한 내구성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 라운드 동안 사용하면,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의 코스 상황과 분실구까지 생각한다면, 라운드당 최소 못 가지고 나가도 다섯 개 이상은 가져가야 했을 것이다. 이 당시 비싼 페더리 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포어 캐디(Fore-caddie)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캐디는 플레이어와 같이 라운드를 다니면서, 조언도 하고 클럽도 서브하지만, 포어 캐디는 플레이어가 한 샷이 떨어질 위치에 미리 가 있어서 볼이 어디에 떨어졌는지 보고 찾아 주는 역할을 한다.

 

당시 페더리 볼 가격은 클럽 가격보다 약 3배 정도 비쌌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 특히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만이 골프를 즐길 수 있었고, 일반 서민들은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을 것이다. 비싼 페더리 볼 가격으로 인해 골프 대중화 길은 험난하기만 했을 것이다.

 

페더리 볼의 비거리는 볼이 가볍기 때문에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일반적으로 130미터에서 160미터 정도 나갔으며, 바람이 순방향으로 불어오면 180미터까지 나갔다고 한다.

 

굴레이, 앤더슨, 모리스, 로버슨 가문 등과 같은 유명한 골프 집안에서 프로를 배출하고 페더리 볼을 만들었지만, 그 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앨런은 당시 최상급의 골프 볼과 클럽을 만드는 제작자로 유명했으며, 그가 만든 상품들은 전세계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야 밝혀진 이야기지만, 페더리 볼을 만드는 장인들은 목숨과 바꿔서 페더리 볼을 만들어야 했다. 거위 털을 삶아 끓이고 만지는 과정이 폐에 영향을 끼쳐 폐렴이나 폐암을 유발했고, 대다수 장인들이 폐 관련 질환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앨런 또한 1859년 간이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황달 발발 후 6개월 만에 44세 나이로 죽었다.

 

 

[프로필] 김대중 골프앤 공동대표

•(현)캐디평생교육원 원장
•(현)골프앤포스트 발행인/편집인
•(전)한국무역협회, 가톨릭관동대 강사
•일본 쓰쿠바대학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저서 《캐디학개론》, 《캐디가알아야할모든것》,   《인터넷마케팅길라잡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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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골프앤파트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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