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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노리카, 코로나19 극복 위해 팔 걷어붙였다

(조세금융신문=김명우 기자) 프랑스 주류기업 페르노리카 그룹의 전 세계 지사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최근 유럽 지역에서 코로나19가 급격히 확산됨에 따라, 페르노리카는 기본 방역물품인 손 소독제의 원활한 생산 및 공급을 위해 순수 알코올을 기부했다. 페르노리카 프랑스 본사는 순수 알코올 7만 리터를 기부했으며 스웨덴의 앱솔루트 보드카는 20만 리터의 순수 알코올을, 영국의 시바스 브라더스는 10만 리터의 순수 알코올을 기부하며 손 소독제 생산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페르노리카 각국 지사들은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을 위해 의료 보호 장비와 지원금을 기부했다. 페르노리카 와인메이커스 스페인은 일회용 의료복과 안전화, 안전 고글 등 의료 보호 장비를 기증했으며, 페르노리카 중국은 중국 자선단체에 2백만 위안을 기부하며 밤낮으로 애쓰고 있는 의료진을 격려했다.

 

페르노리카는 각국의 행정지침에 따라 지역 내 증류소의 기술, 인력 및 생산시설을 손 소독제 생산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다. 페르노리카 에스파냐는 만자나레스 생산공장을 통해 손 소독제 생산을 위한 기술과 인력 등을 지원하고 있다. 페르노리카 미국은 포트스미스 지역의 생산공장을 비롯해 여러 증류소에서, 아일랜드는 미들턴 증류소에서, 캐나다는 히람 워커 앤선즈 증류소에서 손 소독제 생산을 돕고 있다.

 

이 밖에도 페르노리카는 기업 및 파트너사를 위한 지원금도 마련하며 코로나19로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페르노리카 영국은 주류 산업 종사자를 지원하는 자선단체에 25만 파운드를 기부했으며, 아이리쉬 위스키 제임슨은 미국의 바텐더 자선단체에 50만 달러를 지원했다. 시바스 브라더스는 벤처경영대회 '시바스 벤처'의 상금 100만 달러를 최종 결선에 진출한 26개 기업에 동일하게 배분하며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을 독려했다.

 

페르노리카 그룹의 알렉산더 리카 회장은 "전 세계가 심각한 전염병에 직면한 만큼 회사 역량에 따라 지역사회 감염 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페르노리카는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당국에 우리의 자원과 생산시설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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