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5월의 증권파동은 1964년 국정감사에서도 액수와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을 밝히지 못한다. 신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게 한 것은 소위 4대 의혹사건, 그 중 가장 큰 것이 증권파동. 3개월간 7억환 정도만 빌려주면 1백억환을 만들어 주겠다. 검은 유착 속 증시, 소용돌이 휩쓸린 증권가 작전본부는 메트로호텔 608호 중앙정보부를 배경으로 윤응상계가 대증주의 7할을 점유하고 대한증권거래소를 사금고화하였다. 대증신주는 액면의 30배로 공매되고, 50전짜리 주식이 50환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금통위가 34억원의 시중은행 한도외 특별융자결의로 겨우 과열된 증시의 급한 불을 꼈다. 증권파동 수습과정에서 금통위에서 수모당한 재무부가 한은법 개악을 서둘렀다. 증권시장은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와 같았다. 파국의 날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증권파동이 증권, 금융계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5240명에 달하는 선의의 군소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돈을 입혀 그들을 패가망신 내지 자살의 길로 몰아넣게 하였다. 김종필의 말 “협잡질해서 정당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돈이 흘러 들어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상임위원회 토의를 거치면서 여야 국회의원들의 질의가 쏟아졌다. “외국은행의 국내 진출을 전제로 하여 자금력과 대외신용및 기술면에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기 위하여 환금은행을 설치한다고 하였는데, 정부가 직접 감독하는 국책은행이 어떻게 자주적으로 경쟁할 수 있겠는가?” “일반 시중은행을 갑류은행으로 승격시켜 외환업무를 취급도록 하는 것이 소망스러운 것인지, 환금은행이라는 큰 은행을 거대한 비용으로 설립할 필요가 있는가.” “한국은행은 무자본 특수법인인데 어떻게 환금은행에 출자할 수 있으며, 또 그 재원은 무엇인가. 환금은행은 영리법인이라고 생각되는데 한국은행법 제112조에는 영리법인에 투자할 수 없게 되어 있으므로 출자가 불가능한 것 아닌가.” “환금은행의 업무는 외환업무 뿐만 아니라 시중은행의 업무까지 병합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시중은행의 업무범위를 잠식하고 축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무역금융의 재원은 무엇인가.” “한국은행 외국부를 강화하면 환금은행을 설립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환금은행은 국가가 뒷받침해주고 중앙은행이 출자할 정도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이런 속빈 강정 같은 재벌은 차관도입 러시 이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됐다. 손쉬운 축재수단 앞에서 기업인들은 빈약한 자본과 유치한 경영 및 기술수준을 향상시키려하기보다는 정부에 기대 차관도입권과 각종 특혜를 따내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 무작정 차관만 도입해 놓고 보자는 사고방식은 경영의 부진, 국제경쟁력 단위를 무시한 시설규모, 독점을 위한 기업공개 회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채 늘이기 등 불건실한 기업경영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무분별한 외자도입러시로 외채규모가 급증하자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고 차관 망국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비판도 높아졌다. 정부는 1966년 8월 3일 공포한 신외자도입법 제26조에서 ‘정부지급보증의 조치로 인한 매년도 원리금상환액이 당해연도의 외환 수입액의 100분의 9를 초과할 수 없다’고 차관도입의 적정규모를 제시하고, 이에 근거해 외채는 현재도 앞으로도 큰 걱정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시중은행 지급보증의 상업차관을 합치면이 9%를 훨씬 넘고 있었으며, 1969년부터는 공공차관을 제외한 상업차관의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금리현실화조치 서두른 이유, 재정안정계획 단서조항 탓 또 하나 금리현실화조치의 직접적인 원인은 1965년 ‘재정안 정계획’의 단서조항이다. 군사정부는 보다 긴밀한 대미경제협력의 필요성과 악화된 제반 경제사정을 고려하여 1963년초 재정안정계획을 부활시켰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은 주로 통화 가치 안정을 위한 통화량 조정정책으로서, 5·16 이후 중단되었다가 미국으로부터 원조자금 도입을 비롯한 도움을 받기 위해 1963년부터 재개된다. 이 금리현실화조치가 빨리 이행하게 된 이유로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연간 원조계획의 기초로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 간에 금융개혁을 3~4분기 말까지 이행할 것을 합의한 1965년의 재정안정계획의 단서조항 때문이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과 D. C. Cole의 공저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따라서 동 개혁조치는 이러한 시간계획에 맞추어졌고 원조 자금은 순조로이 도입되었다.” 정부는 1965년 9월 24일 ‘이자제한법’을 급히 고치고 3~4분기 마지막 날이었던 9월 30일에 금리현실화조치를 서둘러 단행한 것이다. 1965년 12월 3일 국회에서 무소속 소선규(蘇宣 奎) 의원의 질의를 들어보자.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군사정권, 통화개혁의 목적 군사정권은 6월 10일 0시를 기해 통화개혁을 단행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긴급통화조치에 관한 담화문’은 이렇다. “우리나라 경제실정을 들여다 볼 때 의법처리중인 부정축재 외에도 구정권의 부패에 편승하여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이 상당히 온존(溫存)되어 있고, 한편 금융기관 예금 등의 대폭 증가는 장기성을 띤 진정한 저축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음성자금은 사회, 정치의 혁신에도 불구하고 아직 활발히 산업자금화하지 않고 있고 그간 누증된 통화량은 언제든지 급격히 투기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동향은 악성 인플레이션의 요인으로써 엄중히 경계를 요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안정리에 이룩하여 누구나 다 일터를 갖고 향상된 생활을 하며, 부강한 국가를 건설해 나가기 위해서는 음성자금과 과잉구매력을 진정한 장기저축으로 유도하여 이를 투자재원으로 활용 하는 동시에 인플레이션을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 즉 통화개혁이 불가피한 것입니다.“ 즉 통화개혁의 목적은 악성 인플레이션 예방과 음성적으로 축적된 자금을 백일하에 끌어내 산업자금으로 활용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미국 향한 제1진, 미국의 공업단지를 시찰하다 한편 미국으로 떠난 제1진은 한국전쟁 때 미8군 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 장군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군부와는 일종의 ‘생사를 같이했던 전우’라는 의식을 하고 있던 그는 연고지인 동부지역의 미국 실업인들을 대거 불러 모아 한국 실업인들과의 교섭을 주선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막상 교섭에 들어가자 우리 교섭단은 미국 측의 충고와 훈계만을 들어야 했다. “한국의 공업화를 위해서는 우선 임해지역이나 내륙의 요지에 수송, 전력, 교통, 용수, 노동력, 광활한 용지 등을 갖춘 공업지구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 외자도입법을 합리적으로 제정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맞도록 조성하라. 또 직접투자에는 증권투자와 경영참가, 단일합작 및 유형재산투자, 기술과 노하우 등 다양한 구상을 할 것이며 차관투자로는 직접 차관과 간접차관, 그리고 기술제휴는 기술자 초빙과 파견 훈련, 컨설팅 및 기술훈련소 설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밖에도 차관 상환조건과 금융기관의 지급보증 등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필요하다” 등 얘기들이었다. 역시 금융에 대한 테크닉을 필요로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적 경제개발계획의 태동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기 전에는 보릿고개를 넘기려고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 백성이 허다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GNP 세계 13위의 막강한 경제력을 보유한 나라다. 1997년 외환의 유동성 부족으로 IMF의 구제 금융을 얻어 위기를 넘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지만. 이렇듯 박정희를 넘어서,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기적을 가져다준 4차에 걸친 경제개발계획은 어떻게 태동했을까. 5·16 쿠데타가 터진 바로 그날 오후, 육군참모총장실 옆 소회의실. 박정희 등 쿠데타를 주도한 대여섯 사람이 장도영 참모총장을 에워싸고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대표하여 장도영 장군이 첫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자리였다. 장도영은 쿠데타 세력의 브레인인 류원식 대령을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다. “국체(國體)는 무어라고 대답하면 좋겠소?” “입헌 민주공화국이라고 하시오.” “경제체제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할까?” 한참이 지나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박정희(朴正熙)는 좌우를 돌아보다가 류원식에게 눈짓을 했으나 그는 계속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참다못한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절대 권력 행장 자리 전신용(全信鎔) 같은 사람은 1960년 이후 정치권 인사와 친분관계로 서울, 상업, 한일은행 등에서 행장을 지냈으며 이보형(李寶衡)도 서울은행장은 잠시, 제일은행장만 7년이나 지냈다. 또 부총리를 역임한 뒤 은행연합회장을 거친 김준성(金埈成)의 경우 대구은행장과 제일, 외환은행장, 산은총재와 한은총재를 잇따라 지내 금융계 인사들에게는 보기 드물게 인사 행운을 누린 측이다. 김용운(金龍雲)은 국민, 조흥, 서울신탁은행에서, 김진흥(金振興)은 한일, 주택, 한국신탁은행에서 각각 세 번씩 은행장을 지냈으며, 하진수(河震壽), 문종건(文鍾健), 임석춘(林錫春), 윤승두(尹承斗), 심원택(沈遠澤), 이석주(李 錫珠) 행장도 두 번씩 은행장을 역임했다. 과거 행장 전성기 때의 얘기다. ‘하늘이 내려준다’는 행장 자리. 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상당한 운이 따라야 겨우 오를 수 있는 ‘금융계의 왕좌’ 같은 자리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금융계에서 40여 년을 무사히 지내고 아무탈 없이 행장에 오르는 사람은 축복받은 존재라고 할 만하다. ‘친위 점포 지점장’ 경쟁이 치열했던 이유 행장이 되는 길은
서울은행 손홍균 행장의 구속 1996년 11월 서울은행 손홍균(孫洪鈞) 행장이 대출 수수료를 받아서 구속되었다. 손 행장은 금융계의 고질적 병폐인 투서로 중도퇴진됐다는 후문이다. 사연인즉, 손 행장과 라이벌 관계였던 이 은행 퇴임 임원이 손 행장의 비리를 몇 달 전 검찰에 투서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검찰에서는 이 투서에 확실한 물증이 제시됐기 때문에 손 행장을 내사, 구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손 행장은 1996년 3월 부도난 국제벨브 등 2~3개 업체에 대출한도를 초과하면서까지 200여억원을 대출해 주면서 2억1000여만원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제벨브의 경우 이 은행내 손 행장의 반대세력이 1996년 3월 경제정의실천 시민연대에 제보함으로써 비위사실이 불거진 것. 경실련은 당시 국제벨브가 재무제표를 위조, 서울은행에서만 100억원을 대출받은 과정이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다. 손 행장은 결국 자진출두형식으로 검찰에 소환됐다. 국제벨브공업 회장 박현수(朴賢洙, 53)로부터 받은 대출사례비는 1995년 4월부터 11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1억원. 손 행장과 박 회장은 처음 10만원권 수표로 4000만원의 사례비를 주고 받았다. 그러나
은행장들의 수난 1970년대 대형 금융사고가 빈발할 무렵 은행장의 목숨은 한마디로 ‘파리 목숨’이었으며 재수가 없는 경우에는 쇠고랑을 차고 교도소에 드나들기 일쑤였다. 하기는 그전에도 은행장 구속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 자금조달사건으로 송인상(宋仁相) 재무장관, 김진형(金鎭炯) 한은총재, 김영찬 (金永燦) 산은총재, 이기붕의 6촌 동생인 이기호(李起虎) 제일은행장 등이 검찰에 구속되어 혁명재판에 회부된 적은 있다. 또 1961년 산업은행 이필석(李珌奭) 총재는 40일 간의 수형 생활(囚刑生活)을 맛본 적이 있었다. 총재 취임 8일째 되는 날 6월 8일 새벽, 중앙정보부 기관원에 연행돼 마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체포이유는 상업은행 은행장 당시의 대한제분 대출사건 내사착수였다. 그러나 수감의 진짜 배경은 장도영(張都瑛) 의장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사건에서 의혹이 짙어가던 모 장군과의 연관관계로 취조를 받았다. 결국 정치싸움의 유탄에 희생되었고 행장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금융사고와 관련돼 현직 은행장들이 수난을 당한 경우는 1972년 외환은행 홍용희(洪龍熹) 행장 구속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금융사고만 터지게 되면
은행장 지목은 중앙정보부의 몫 은행장의 임기 3년. 그러나 시중은행 정관의 임기는 한낱 장식품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행장이 임기 전에 사임했다. 그렇다고 모든 행장이 임기를 못 마친 것은 아니다. 2~4개 은행을 돌면서 행장만 10여년 지낸 직업이 은행장인 행운아도 있다. ‘빛 좋은 개살구’라 할 수 있는 행장이 있는가 하면, 제왕 (帝王)처럼 갖은 부귀를 다 누린 행장도 있다. 관치금융의 그림자는 은행장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5. 16 군사혁명이 발발한 1961년. 일 년 사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금융의 민주화가 아니라 어떻게 경제건 설에 봉사하느냐가 관건으로 변화하였고, 정부의 직접지배 하에 놓인 은행은 본격적 관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금융인들이 무소불위의 쿠데타 세력에 맞서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군정 초창기에는 살벌한 총칼의 서슬에 밀렸을 뿐만 아니라 혁명에 대한 다소간의 기대감도 작용하여 협력을 선택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한편 정부 손에 넘어간 시중은행들은 어떠했을까. 급작스런 쿠데타로 시중은행 역시 쑥대밭이 됐다. 현역 은행장들은 모두 체포되거나 사임하고, 임원들도 대부분 퇴진이 불가피했다. 혁명정부 실세들
관치금융을 벗어나기 위한 정부의 형식적인 규제 하지만 암울한 긴 터널을 통과하는 관치금융은 언젠가는 밝은 햇살을 맞게 마련이다.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신탁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의 민영화는 그로부터 무려 20년 이상 넘은 후에야 김재익(金在益) 청와대 경제수석의 주도로 5공 정권 신군부의 살벌한 독재체제 하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1982년에야 민간주도형 경제운영방식으로의 전환을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금융부문에서는 시장원리에 의한 금융 운용과 금융기관 간 경쟁촉진을 통한 금융의 효율성 제고를 도모하기 위하여 시중은행의 민영화 및 내부경영에 대한 규제 완화, 금융업에의 차입제한 완화 등이 이루어졌다. 먼저 금융산업의 중추인 은행금융기관의 자율경영체제 확립을 위해 정부는 1981년 한일은행의 정부보유주식을 일반에 매각하는데 이어 1982년에는 제일은행과 서울신탁은행, 그리고 1983년에는 조흥은행의 정부보유주식을 민간에게 매각함으로써 1972년에 이미 민영화된 상업은행을 포함하여 5개 시중은행이 모두 민영화되었다. 1972년의 상업은행 민영화 시에는 이 은행의 자본금을 40억원에서 66억원으로 증액하되 정부가 신주인수권을 포기하고 그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