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신경철 기자) 지난 7월 31일 한국과 미국이 완전하고 포괄적인 무역 협정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같은 날 자신의 SNS에 “미국이 한국과 완전하고 포괄적인 무역 협정에 합의했음을 기쁘게 발표한다”며 협상 타결 소식을 직접 알렸다. 양국이 치열한 줄다리기 끝에 이룬 전격 합의라는 소식에 겉으로는 환영 분위기가 감돌았지만, 국내 농업계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 측은 쌀과 쇠고기 같은 핵심 ‘레드라인’ 품목의 추가 개방을 막아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부가 미국산 농산물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완화하기로 약속하면서, 사과·배 등 과수와 감자 농가를 중심으로 시장 개방에 대한 우려가 급속히 퍼지고 있다.
◇ 협상 타결과 농산물 ‘레드라인’ 공방
지난 7월 말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고위급 무역협상에서 한국 협상단은 끝까지 쌀과 쇠고기 시장만큼은 추가 개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협상 결과 한국산 일부 제품에 부과되던 관세율이 25%에서 15%로 인하되며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했던 쌀·쇠고기 추가 개방은 이뤄지지 않기로 최종 합의됐다.
이로써 미국의 거센 농축산물 압박에도 가장 민감한 품목들은 일단 지켜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막판까지 미국 측은 농축산물 분야의 시장 접근성 확대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결국 한국은 수입 검역 절차 개선 등 이른바 기술적 비관세 조치에 대해 앞으로도 미국과 계속 협의해 나가기로 약속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SNS에 “한국이 미국산 농산물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러한 합의를 부각했다. 우리 정부는 곧바로 “농축산물에 대한 추가 개방을 합의한 바 없다”고 선을 그으며 트럼프 발언을 정치적 수사로 일축했지만, 과일류 검역 규제 완화를 공식화한 이상 미국산 사과·배 수입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백악관도 협상 직후 “한국 정부가 과일·채소에 대한 엄격한 검역 조치를 개선하기로 했다”고 발표해 농업계에서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긴장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산 과일·채소의 수입 절차를 보다 신속히 처리하기 위해 전담 검역 인력을 두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는 “검역 과정을 생략하거나 기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양국 당국 간 소통을 강화해 절차를 원활히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사실상 수입 개방을 앞당기는 조치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 8단계 수입위험분석(IRA)…과일시장 지켜온 방패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 사과와 배 같은 주요 과일을 단 한 번도 수입한 적이 없을 정도로 까다로운 검역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른바 ‘K-검역’으로 불리는 강도 높은 위생·검역(SPS) 조치는 국내 과수농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절차는 무역 상대국들에게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되며 시장 개방 압력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외국산 과일이 국내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바로 수입위험분석(IRA) 절차다. 병해충 등 유해 생물의 국내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8단계의 과일 검역 프로세스로, 국제 식물검역 기준과 우리나라 식물방역법에 근거해 모든 수입 대상국에 공통 적용된다.

1단계에서 외국 정부의 수입 요청이 접수되면 2단계에서 해당 품목의 잠재적 병해충 위험분석을 실시한다. 핵심은 3·4단계다. 이때 수입하고자 하는 과일에 붙어 들어올 수 있는 해충 목록을 작성하고, 각각의 위험도와 방제 난이도를 과학적으로 평가한다.
이어 5단계에서는 양국이 협의하여 해충 위험을 관리할 방안을 마련하는데, 사실상 이 단계가 검역 협상의 마지막 관문이다. 여기서 병해충에 대한 효과적인 관리 조치에 합의가 되면 6단계에서 구체적인 수입 검역 조건의 초안을 작성하게 된다.
업계에서는 “어떤 품목이 6단계인 검역 조건 작성 단계까지 오면 국내 시장에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만큼 6단계 진입은 해당 과일의 수입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마지막으로 7단계에서 수입 검역 조건에 대한 국내 행정 예고 및 의견 수렴을 거쳐, 8단계에서 최종 수입 허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복잡한 8단계를 모두 완료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지금까지 수입이 허용된 과일 품목들의 경우 IRA 심사에 평균 8년 이상이 소요됐다. 가장 빨리 허용된 사례였던 중국산 체리조차 약 3년 8개월이나 걸렸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나라에 과일을 수출할 때도 상대국의 IRA 절차에 평균 7~8년이 걸린다. 그만큼 과학적 검역에는 많은 시간과 협의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정부 관계자는 “IRA 절차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이어서 우리 마음대로 단계를 줄이거나 생략할 수 없다”며 “다만 인력을 충원하는 등 방법으로 각 단계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여지는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검토되고 있는 ‘미국 전담 검역 데스크’ 신설도 이러한 맥락에서 전문 인력을 보강해 협의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 미국산 사과·배·감자, 수입 절차 어디까지 왔나
미국산 농산물 중에서도 사과와 배, 감자는 한국 시장 진입을 꾸준히 타진해온 대표적인 품목이다. 미국 측은 우리나라의 까다로운 과일 검역을 대표적인 무역 장벽으로 지목하며 지속적으로 시장 개방을 요구해 왔다.
사과의 경우 미국이 처음 우리나라에 수입을 요청한 시점이 199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30년이 넘도록 IRA 8단계 중 2단계(제출 자료 검토)에서 멈춰 있다. 한국 정부가 국내 사과 농가 보호를 이유로 심사를 까다롭게 진행한 면도 있지만, 사과 문제가 한미 통상 현안에서 쇠고기 등 다른 분야만큼 우선순위가 아니었기에 미국 측도 그동안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배(서양배)는 1994년 미국 측이 IRA 절차에 착수한 이후 현재 3단계까지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과와 마찬가지로 검역상의 여러 병해충 위험 요인에 대한 양국 협의가 지지부진하면서 30년 가까이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와 달리 최근 들어 급진전을 보인 품목이 감자다. 미국은 2007년 11개 주 지역의 신선 감자 수입을 요청한 이후 약 18년 만에 절차를 6단계(수입 검역 조건 작성)까지 끌어올렸다. 업계에 따르면 미국 측이 이번 무역협상 과정에서 대기 중인 품목 중 감자를 최우선으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고, 우리 측이 이에 응하면서 감자 협상이 먼저 추진됐다. 감자는 미국이 2007년에 수입을 신청한 이후 약 18년 만에 검역 절차 완료를 눈앞에 두고 있는 품목이 됐다.
정부는 조만간 감자 협상이 마무리되면 미국과 협의해 다음 우선 처리 품목을 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음 순위에 미국산 사과나 배가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 값싼 미국산 과일, 국내 농가 위협
감자에 이어 사과와 배 등 미국산 과일의 수입 가능성이 거론되자 국내 과수농가들은 긴장의 끈을 바짝 죄고 있다. 수십 년 동안 국산 과일만 유통되던 사과·배 시장에 대량의 외국산 과일이 들어올 경우 국내 과일산업의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배연합회 김상동 사무국장은 “결국 수입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며 특히 사과에 대해 “미국 등 선진국은 대규모 기계화 영농으로 생산비를 획기적으로 낮추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이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우려했다. 미국 내 사과 도매가격은 2022년 기준 1kg당 2.3달러(약 3천 원)에 불과해 한국산보다 현저히 저렴하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산 사과의 예상 국내 도입가격은 1kg당 약 3,939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2022년 국내산 사과 도매 평균 가격(4,654원)의 약 85%에 불과한 수준이다. 게다가 최근 이상기후로 국내 사과 작황이 부진해 가격이 오른 터라 소비자가 느낄 미국산의 가격 매력은 더욱 클 전망이다.
가격 측면의 장벽이 이렇게 낮아진 데다, 관세마저 거의 철폐된 상태라 농가들의 불안감은 상당하다. 현재 ‘후지’(부사) 품종에만 관세가 남아 있으며 이마저도 2031년에 0%가 될 예정이다. 결국 남은 유일한 걸림돌은 검역 절차뿐이다. 이 절차마저 단축되면 값싸고 물량이 풍부한 미국산 사과가 국내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는 게 농가들의 우려다.
박준희 관세사(대세 관세사무소)는 “현재 수입 과일은 주로 부산신항으로 컨테이너째 들여와 검역을 거친 뒤 전국 도매시장과 대형마트로 퍼져나간다”고 설명했다. 박 관세사에 따르면 미국산 사과·배도 검역만 통과하면 곧바로 이 경로를 타고 대량 유통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산지 농민들 입장에서는 전국 단위로 경쟁에 직면하게 되어 지역에 상관없이 가격 하락과 판매 감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 미국에 먼저 과일시장 문을 열어주면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왜 미국에만 특혜를 주느냐”며 추가 개방을 요구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정 국가에 대한 개방이 자칫 연쇄적인 압박으로 번질 수 있는 만큼, 정부의 신중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정부의 대응과 과일산업 경쟁력 강화 과제
정부도 농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이번 조치는 검역 인력과 인프라를 보강해 절차를 합리화하려는 것일 뿐 검역을 생략하거나 면제해주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즉 이번 합의로 미국산 사과·배 수입을 곧바로 허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핵심은 국내 과일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수출국들의 개방 압박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수세적으로 버티기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국내 농업의 민감성을 고려해 일단 큰 소나기는 피했다”면서도 “우리 농업의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품종 개발과 생산비 절감, 유통 효율화 등의 노력으로 국산 과일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과수 농가의 규모화·조직화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고, 해외 수출 시장 개척에도 힘써야 국내 과일산업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30년 넘게 금단의 영역이었던 미국산 사과·배 수입이 가시화되면서 한국 과수농가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이번 무역협정 후속 조치가 실제 어떻게 전개될지는 지켜봐야 하지만, 국내 농업정책의 무게중심이 이제는 보호 무역에서 산업 경쟁력 강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정부의 철저한 대책 마련과 농가의 자구 노력이 이뤄져야 개방 충격을 최소화하면서도 국내 과일산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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