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정욱 기자) 정부가 9월 7일 내놓은 ‘주택공급 확대방안’은 공급 숫자를 ‘착공’ 기준으로 부풀리고, 대출 규제로 수요를 옥죄는 내용에 그쳤다. 장밋빛 목표와 달리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입주 대책은 빠졌고, 세제(보유세·양도세) 개편도 비켜가면서 거래절벽과 호가 장세만 고착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착공 총량 부풀리기…입주 절벽은 여전
정부는 이번 대책의 핵심으로 향후 5년간 수도권 연 27만호, 총 134만9000호 착공을 내세웠다. 그러나 LH가 확인한 지난해 전체 착공 실적은 약 5만호 수준이다. 물량이 실제 입주로 이어지기까지의 긴 시차를 감안하면, ‘연 27만호’는 지연이 전혀 없는 이상적 전제에 가까워 현실과 괴리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LH의 재무여력은 취약하다. LH 부채는 2024년 170조원에서 내년 192조원까지 불어날 전망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직접시행을 확대해 대규모 착공을 추진한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과거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문재인 정부가 270만호 공급을 공언했지만, 준공·입주 단계에서 지연과 축소가 반복됐다. 거창한 숫자 계획이 체감할 수 있는 입주로 이어지지 못한 전례가 이번에도 되풀이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5년 134만호, 연 27만호라는데 지금까지 그냥 놀았다는 얘기밖에 더 되느냐”라며 “3기 신도시를 모두 합쳐도 17만5000호 수준인데 8년 동안 지체만 하며 결국 숫자놀음으로 귀결된 꼴”이라고 직격했다.
함영진 우리은행 부동산리서치랩장은 “공급은 본질적으로 비탄력적이기에 착공 기준 관리는 공급 착시를 줄이는데 의미가 있다”면서도 “다만 입주까지의 시차와 실행력 한계 때문에 단기 안정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 LH 직접시행·도심복합, 또 반복된 구호
정부는 LH 직접시행 확대, 비주택 용지 주거 전환 정례화, 도심복합·유휴부지 활용을 대대적으로 내세웠다. 방향성만 보면 민간의 경기순응적 공급 사이클을 보완하고 공공이 개발이익을 환수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현장에선 토지 보상 지연, 인허가 병목 등으로 착공이 밀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게다가 LH 재무 여력도 걸림돌이다. ‘2025~2029년 중장기 재무 관리계획’에 따르면 올해 말 부채 170조1817억원, 내년 말 192조4593억원으로 늘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접 시행을 대폭 확대해 대규모 착공을 추진한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LH 관계자는 “정부가 발표한 연 27만호 착공 계획은 국토부와 협의해 문제없이 추진될 수 있도록 하겠다”라며 “계획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함 랩장은 “LH가 직접 시행하면 분양가상한제 적용으로 고분양가 부작용을 줄이고 접근 가능 가격대 공급이 늘 여지는 있다”면서도 “LH의 재무 여건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심복합, 폐교·학교용지 전환, 철도역 인근 부지 활용도 과거 정권에서 여러 차례 발표됐지만 실행 저조했다. 강서구 공항동 사례를 빼면 주민 반대·지자체 협의 난항으로 무산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직접 시행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는 있지만, 결국 실행력이 본질”이라며 “몇 년간 몇만 호 계획은 국민에게 너무 익숙한 레퍼토리라 시장 안정 동력이 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양지영 신한 프리미어 패스파인더 전문위원은 “민간 브랜드·품질 경쟁력이 빠지면 실수요 흡수가 어렵다”라며 “외곽·비선호 입지 공급만 늘면 정작 핵심 수요는 강남·마용성에 그대로 쏠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 대출 규제 강화, 세입자부터 옥죈다
이번 대책의 또 다른 축은 대출 규제 강화다. 정부는 규제 지역(강남3구·용산) LTV를 50%→40%로 낮추고, 주택 매매·임대 사업자 대출은 사실상 LTV=0으로 막았다. 여기에 1주택자 전세대출 한도도 수도권·규제지역은 2억원으로 일원화했다.
표면상 목적은 레버리지 투기 억제지만, 실제 타격은 세입자·외곽 수요자에게 직격한다. 인천·경기 외곽 전세 수요층은 대출 축소 → 전세 계약 불가 → 월세 전환 가속의 3단 충격을 맞는다. 전세난 심화와 월세화 가속으로 서민 부담은 불어나고, 반대로 현금 동원력이 큰 자산가층은 경쟁자 감소로 협상력이 커진다.
불과 두 달 전 6·27 대책은 과열 진정에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9·7 대책은 공급은 숫자 부풀리기, 수요 억제는 세입자·외곽 위주로 작동해 시장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 거래는 더 얼고, 핵심 수요지는 호가만 방어되는 ‘왜곡된 반등’ 위험이 커진다.
김 소장은 “거래는 끊겼는데 세금·금융 부담은 그대로라 매도자들은 ‘팔리면 팔고 아니면 버티자’는 심리로 간다”라며 “이 와중에 전세대출까지 막으면 세입자만 죽고, 시장은 호가 앵커만 강화되는 구조가 된다”고 꼬집었다.
양 전문위원은 “규제는 현금 부자에게는 무의미하다. 결과적으로 ‘현금 있는 사람들의 시장’만 강화돼, 거래량은 줄고 거래 단가는 더 오를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 핵심 수요지 공백…호가만 시세로 굳는다
이번 대책의 가장 큰 맹점은 핵심 수요지 해법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정부는 수도권 외곽·비선호 입지·유휴부지 중심의 공급을 쏟아냈지만, 정작 집값 불안의 뇌관인 강남3구·용산·마용성·한강벨트는 비켜갔다.
이 공백은 곧바로 시장 왜곡으로 번진다. 대표 단지의 ‘호가 앵커’가 전형적이다. 서초구 래미안 원베일리는 6월 전용 80㎡가 44억5000만원에 실거래되며 ‘호가=시세’ 공식을 굳혔다. 잠실주공5단지도 40억원대에서 간헐적 거래가 이어지며 주변 호가를 끌어올렸다. 반포주공1단지는 마지막 실거래가 25억원대(2023년)인데 현재 최저 호가 50억원 선에서 시작한다. 실거래 없는 고가 호가가 시세처럼 받아들여지면, 인근 단지들도 눈높이를 내리지 않는다.
이 구조가 굳어지면 전반적인 거래절벽은 심화되지만, 지표상 가격은 버티는 기형적 시장이 지속될 수 있다. 계단식 이동도 막힌다. 서울 핵심지 호가가 방어되면 강북은 강남 하급지로, 지방 상급지는 서울 외곽으로 옮기려 하지만, 대출 규제로 사다리가 끊기면서 지방은 절벽, 서울은 호가 방어의 양극화가 심화될 수 있다.
양 전문위원은 “핵심 수요지 해법이 빠지면 대표 단지 호가가 곧 시세로 굳어 시장 왜곡이 심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고, 함 랩장은 “대출 조건 강화로 외곽 이동 경로가 막히면 서울 핵심지-지방 간 양극화가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세제 회피와 정치 리스크, 반복되는 실패
이번 9·7 대책은 결국 착공 숫자+대출 규제만 남은 반쪽짜리 패키지다. 국민이 바라는 건 당장 들어갈 집과 시장 안정 실행책이지, 5년 뒤 착공 목표나 외곽 택지 로드맵이 아니다.
더 근본적 문제는 세제 회피다. 시장을 움직이는 핵심은 보유세·양도세인데 이번 대책은 전혀 손대지 않았다. 보유세는 높이고 양도세는 낮춰야 매물이 나온다는 게 교과서적 원리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보유세·양도세를 동시에 올려 ‘매물 잠김’을 키웠고, 이번 정부도 세제를 비껴가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치 리스크도 뚜렷하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표 계산 논리에 더 민감하다. 지역 반대가 나오면 보상 지연, 지자체는 발 빼기, 국회의원은 유권자 눈치를 본다. 정책은 집행되지 않고, 발표는 숫자 부풀리기에 그친다.
함 랩장은 “중장기적으로 정부가 공급 의지를 수치로 제시한 만큼 불안심리 일부 완화는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시장이 원하는 건 내년에 들어갈 집이지 5년 뒤 착공 목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이번 대책은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공급도 거래도 살아날 수 없다”며 “국민이 체감하는 건 결국 ‘호가만 남는 시장’일 것”이라고 일갈했다.
결국 이번 대책은 시장 참가자들에게 실질적 신뢰를 주지 못한 채, 오히려 집값 불안의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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