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업성이 부족하거나 손해율이 높아서 보험사들은 정부 압박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수용하는 실정이다. 역대 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성보험들이 대부분 실패로 끝났던 전례에 비춰봤을 때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되풀이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책성보험 출시 이후 ‘유명무실’ 보험사 애물단지로 전락
그간 금융당국이 추진해 온 정책성보험을 살펴보면 출시 이후 유명무실한 상태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거나 아예 폐지된 것이 대다수다. 심지어 금융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추진 계획을 발표했지만 시장에 나오지도 못한 채 소리 소문도 없이 사장된 경우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보험’과 ‘녹색자동차보험’, 박근혜 정부의 ‘장애인연금보 험’, ‘금융사기 보장보험’, ‘신고령보험’ 등이 있다.
자전거보험은 이명박 정부 시절 ‘녹색성장 정책’ 홍보용으로 탄생했다. 이 보험은 자전거 분실이나 도난이 아닌 자전거 이용 도중 발생한 본인의 상해, 사망, 후유장애 등을 보장한다. 소비자로서는 다른 보험도 많은데 굳이 보장범위가 한정적인 자전거보험을 가입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연도별 판매건수를 살펴보면 ▲2009년 1만6128건 ▲2010년 1만7693건 ▲ 2011년 7561건 ▲2012년 6456건 ▲2013년 5446건 ▲2016년 2884건으로 갈수록 급감했다. 결국 개인용 자전거보험은 삼성화재를 제외한 모든 손보사에서 판매를 중지한 상태다. 다만, 지방자치단체와 연계한 단체보험으로는 현대해상과 동부화재에서 아직 판매 중이다.
마찬가지로 정책 홍보 차원에서 출시한 녹색자동차보험은 연간 주행거리가 보험 가입 전 연평균 주행거리보다 500km 이상 감소하면 각 지자체와 환경부가 5:5 비율로 환경보호지원금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이 보험은 출시한 지 2년 만에 아예 모든 보험사에서 판매를 중지했다.
박근혜 정부가 장애인 금융애로 해소를 위해 출시한 장애인연금보험은 일반연금 대비 연금수령액을 10% 이상 높이고, 연금개시 연령도 20세 이상으로 낮췄다. 이 상품은 지난 2014년부터 NH농협생명과 KDB생명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 중 농협생명 ‘희망동행 NH연금보험’의 지난해 판매건수는 전년(482건)보다 63% 줄어든 178건이다. KDB생명 ‘더불어사는 KDB연금보험’은 지난 3년간 총 판매건수가 500건을 웃도 는 수준이다.
그 외 삼성·한화·교보생명에서 판매 중인 장애인전용 ‘곰두리보험’도 지난 2016년 기준으로 3사를 모두 합쳐 611건 판매됐다. 지난 10년간 판매실적을 모두 더해도 8000여건 수준이다.
사실 이러한 장애인보험은 실적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보험사는 고객에게 추가 제공할 혜택만큼 영업비를 절감해야 했고, 이에 따라 보험설계사 수수료가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보험설계사들이 장애인보험을 적극적으로 판매하지 않게 된 것이다.
카드사 고객DB 해킹사건이 터진 후 금융당국이 추진한 ‘금융사기 보상보험’은 기업이 개인정보 유출을 대비해서 가입하는 상품이다. 기업은 피싱·해킹 등 전자금융 사기에 당했을 때 보험금을 지급받아서 고객에게 보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보험은 출시 이후 6개월 동안 단 1건 판매됐다.
원칙적으로 국내 기업이 금융사기에 당했을 경우 그 피해를 보상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보상받고 싶다면 기업의 잘못을 고객이 직접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기업이 강제성도 없는 보상보험을 가입할 이유가 없다. 정작 필요한 소비자들은 보상보험을 가입할 수조차 없다. 금융당국이 보험소비자 니즈 파악을 잘못한 셈이다.
지난 2015년 금융위원회가 추진계획을 발표했던 ‘신(新)고령연금’은 3년여가 지났으나 출시조차 못했다. 이 상품은 55세 전후에 가입해서 80세부터 사망할 때까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발할 예정이었다. 다만, 해약이 불가능하며 사망보험금도 없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아직 평균수명이 81세에 불과한 현재로서는 원금손실 위험이 더 높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결국 첫 발표 이후로 논란만 남긴 채 잊혀졌다.
이처럼 면밀한 사전검토 없이 졸속으로 출시하게 된 정책성 보험은 보험사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상품 개발부터 유지관리비까지 고려하면 보험사가 정책성보험에 투자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판매실적이 저조하다고 섣부르게 없앨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사업비가 최소한인 정책성보험에 올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심 끝에 판매 중지를 결정해도 그동안 발생한 손해는 모두 보험사가 떠안는다. 보험 가입자들도 제대로 된 사후관리를 받을 수 없다. 정책 성보험이 하나 실패하면 정부와 보험사, 가입자들이 모두 손해인 셈이다. 정부가 정책성보험 출시를 보다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이유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책성보험은 항상 취지만 좋다”면서 “보험시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정부가 압박해서 출시하게 된 정책성보험이 시장에서 부진한 성적을 거둔 것은 당연한 결과”라 설명했다.
유병자·은퇴자실손, 노후실손과 다를바 없어...금융위 “우리 책임 아냐”
최근 금융위원회는 ▲유병자실손 ▲은퇴자실손 ▲소방관 보험 등 정책성보험 출시를 추진하고 있다.
유병자실손은 최근 2년간 ▲입원 ▲수술 ▲7일 이상 통원 ▲30일 이상 투약 등 치료 이력만 없으면 과거 질병이 있었거나 만성질환이 있어도 가입 가능한 상품이다. 은퇴자실손은 60세 이상 고령자 가운데 단체실손보험 가입자가 은퇴한 후 개인실손보험으로 간편하게 전환할 수 있도록 연계장치를 마련할 예정이다.
소방관보험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소방관 처우 개선을 약속한 것과 관련성을 지닌다. 이에 금융당국은 소방관들이 인수심사 없이도 가입 가능한 보험을 만들고, 별도 예산을 편성해서 초과보험료 50%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이후에는 경찰·군인 등 보험 가입이 쉽지 않은 직군들로 전용보험을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성보험은 출시되기도 전에 과거 실패를 답습할 것이란 우려가 큰 상황이다. 먼저 은퇴자실손은 이미 고령층 대상으로 마련된 노후실손이 존재한다. 노후실손은 박근혜 정부가 고령자 의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야심차게 추진했던 정책성보험이다.
해당 상품은 가입자 본인부담금 비율을 30%로 올리고, 보장범위를 축소하는 대신 보험료를 일반 실손보험 70~80% 수준으로 내렸다. 가입가능 연령대는 만 50세부터 75세 사이로 은퇴자실손과 겹친다.
이에 은퇴자실손은 단체실손에서 노후실손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도록 제도적 연계장치가 추가된 수준일 공산이 크다. 결국 노후실손과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보험인 셈이다.
유병자실손도 노후실손처럼 보장범위는 대폭 축소되고, 본인부담비율은 30% 이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만성질환자까지 포용해야 할 유병자 실손은 막대한 손해율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 같은 방식이 아니면 보험사가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유병자실손 역시 노후실손 가입대상을 확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힘들다. 일반 보험보다 2~5배 이상 보험료가 비싼 유병자보험이 이미 존재하는 만큼 보험료 인하도 어려울 전망이다. 유병자보험은 간편심사를 통해 ▲수술 1회당 30만원 ▲입원 1일당 3만원 ▲암진단금 2000만원 등 정해진 금액을 지급받는 보장성보험이다.
이처럼 은퇴자·유병자 실손보험 모두 노후실손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노후실손이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판매를 이어가는 보험이란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2014년 출시한 노후실손은 이후 3년간 총 판매 건수가 국내 10개 보험사 통틀어 약 2만6000건에 불과하다. 가입대상 연령대(만 50세~75세) 인구가 1500만명인 점을 고려하면 겨우 0.17%만 가입한 것이다.
그 실패 원인을 분석해보면 노후실손을 개발한 보험사 입장에서는 관련 위험률 통계가 없는데도, 보험료는 최소화해야 한다. 일단 그렇게 출시하고 나서 손해율이 예상보다 높을 경우 발생한 손해는 모두 보험사 몫이다. 정부 지원은 일절 없다. 리스크가 부담스러운 보험사로서는 자연스레 정책성보험에 대한 판매 의욕이 떨어지게 된다. 그 외 비싼 보험료에 비해 실속 없는 보장범위도 판매부진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병자실손의 경우 그 균형 맞추기가 노후실손보다 더 까다로울 것이라 예상되는 상황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가 추진 하는 은퇴자·유병자실손도 노후실손과 같은 실패를 되풀이 할 것이란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방관보험의 경우 정책 홍보나 보험 소외계층 돌봄이 목적이든 다른 정책성보험과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공무원인 소방관들이 직무로 인해 발생한 위험은 당연히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소방관보험은 그 책임을 민간 보험사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것이다. 그나마 초과보험료 50% 지원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보험업계는 지원여부와 상관없이 사고나 질병 가능성이 높은 소방관들을 무조건 받아들이게 되면 향후 높은 손해율로 수익성이 악화돼 일반 계약자들도 간접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는 입장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금융위 관계자는 “정책성보험은 오로지 정부가 재정 지원하는 보험으로 한정된다. 그 외 보험은 각 보험사에서 책임져야 할 것”라며 “이미 출시된 보험에 대한 문제는 금감원에 문의하라”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금융소비자원 오상헌 보험국장은 “그동안 금융위원회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생색내기용’ 정책성보험을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마구 남발했다”며 “과거 금융위가 추진해 온 정책 성보험 실패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오 국장은 “이번 정부에서 출시하는 정책성보험도 보험사에게 일방적인 손해만 강요한다면 이 또한 ‘예정된 실패’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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