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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문가 칼럼] 아무도 말하지 않는 회사 – 침묵을 깨는 제도 설계법

 

(조세금융신문=함광진 행정사) 마케팅 전략 보고를 앞두고, 한 실무자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보고 자료를 준비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전략을 수립했으며, 각종 데이터를 검토해 가며 철저히 정리했다.

 

이 자료는 단지 보고용 문서가 아니었다. 실무자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식적으로 설명하고, 그간의 성과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자, 조직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중한 무대였다. 실무자는 보고 흐름을 수차례 연습하며 보고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회의 시작 직전, 팀장이 실무자에게 다가와 말한다. “오늘 보고는 내가 할게.” 물론 상황에 따라 리더가 직접 보고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여자의 이름과 역할을 언급하고, 준비 과정의 노고를 인정하는 절차가 빠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구성원은 ‘괜히 나섰다가 손해만 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점점 말하기보다 조용히 있는 쪽을 택하게 된다. 실무자는 잠시 말을 꺼내려다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마음속 깊은 곳에 품었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준비한 말들은 가슴속에서만 맴돌았다. 팀장의 보고 내내 실무자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동료들도 아무 말 없이 회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끝났다.

 

침묵이 문화가 되는 과정

 

실무자의 ‘이번만 참자’던 침묵은 곧 ‘말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체념과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불신으로 바뀐다. 이렇게 침묵은 개인의 판단이 아닌 구조적 선택이 되고, 조직은 겉보기엔 평온하지만 안에서는 역동성을 잃어간다.

 

이러한 침묵은 단순히 의견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창의성은 억눌리고, 피드백은 끊기며, 문제는 반복돼도 드러나지 않는다. 결정은 관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실무자는 빠지며, 성과는 소수에게만 집중된다. 실무자도 자신의 기여를 명확히 보고하고 공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최소한의 제도가 없으면 변화는 어렵다.

 

침묵이 조직을 무너뜨리는 이유

 

회의에서 아무도 질문하지 않고, 말을 하면 ‘불만 있는 사람’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인재는 회사를 떠난다.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사라지면, 구성원은 침묵을 학습하고 조직은 내부의 침묵으로 무너진다. 조직이 침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말하라’는 구호보다, ‘말한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가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아무리 의견 제시를 장려한다고 해도, 말한 사람에게 책임이 전가되거나 불이익이 돌아온다면, 구성원은 말하는 법이 아니라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곧 ‘생산성의 침묵’으로 이어진다.

 

제도가 문화를 바꾸는 이유

 

기업의 조직 문화는 시간이 아니라 제도가 바꾼다. 그래서 제도를 먼저 바꿔야 한다. 물론 신뢰와 공감이 쌓여 자연스럽게 변하는 문화도 있지만,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건 제도라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문화는 사람들의 행동 습관이고, 그 행동은 제도와 시스템이 만든다.

 

과거에는 식당, 카페, PC방에 담배 연기가 가득했지만,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으로 실내 금연이 법제화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법이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문화를 만든 대표적 사례다.

 

제도는 완벽하지 않지만, 조직 변화는 제도에서 시작된다. 제도가 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말을 하지 않는 이유가 억압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깨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필요하다. 변화는 제도가 뒷받침한다.

 

침묵의 문화를 탓하기 전에, 먼저 그 침묵을 용인하는 구조부터 점검해야 한다. 제도는 리더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리더 스스로 기여자를 인정하고, 의견을 존중하며, 성과를 나누는 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제도가 리더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의 책임을 더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화의 설계도 사규

 

기업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 문화의 온도, 방향, 속도는 결국 그 조직이 어떤 제도와 규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무리 ‘자유롭게 말하라’고 외쳐도, 말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조용한 사람만 승진하는 조직이라면 그 캠페인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조직의 침묵을 깨기 위해서는 단순한 캠페인이나 구호보다, 실질적인 제도와 규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업무 산출물에는 작성자와 기여자를 명시하고, 대리 보고 시에도 실무자의 이름을 분명히 드러내며, 성과기여 내역이 평가에 반영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회의나 보고 자리에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도록 보호 장치를 마련하고, 발언 후 불이익을 주는 행위는 명백히 금지하고 제재해야 한다.

 

더불어 관리자에게는 공로 가로채기나 독단적 결정과 같은 부적절한 리더십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성과 공유와 구성원 존중 등 긍정적인 리더십 기준을 사규를 통해 명문화해야 한다. 제도와 문화는 함께 움직인다. 이제 ‘왜 아무도 말하지 않지?’가 아니라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구조가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프로필] 함광진 행정사

•CS H&L 행정사 사무소 대표

•인천광역시청 재정계획심의위원

•사회적기업진흥원 전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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