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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㉟]편타대출과 화신산업(Ⅱ)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상업자본가 박흥식은 누구인가?

 

그러면 3억 2000만원의 거액 편타를 쓰고 있었던 화신의 박흥식은 어떤 인물인가?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용강이라면 임진란 때 명장 김경서(金景瑞)가 태어난 고장이며 조선 난시에 한 때 천하를 뒤흔들던 홍경래(洪景來)가 난 곳도 바로 여기다.

 

박흥식은 8세 때 집에서 배우던 한문공부를 그만두고 용강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 14세 때 진남포상공학교에 진학하려 했는데 비운이 그에게 닥쳐왔다. 형 박창식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관한 부친이 당시 39세의 장년으로 별세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업분야에 뛰어들었고,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의 첫 사업은 싸전이었다.

 

나이 17세.  당시 이 땅은 온통 일본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는 악명 높았던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있었는데 이것은 식량공급기지로서 한국을 전락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식량의 절대 부족량을 한반도에 전가시킴으로써 1918년에는 이른바 쌀 파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곡가도 크게 폭등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싸전 주인 박흥식은 이러한 쌀 파동을 미리 예측하고 진남포에 있는 객주를 통하여 미곡 무역상을 본격적으로 운영할 채비를 갖추었다. 어린 소년이 벌린 이 사업은 경기 덕분에 제법 큰 미곡 무역상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싸전으로 재미를 본 박흥식은 1920년 자본금 5만원으로 용강읍내에 선광인쇄소(鮮光印刷所)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그가 시도한 최초의 사업다운 사업이었으며 화신이 있기까지 뿌리와 같은 기업이기도 했다.

 

그는 1926년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그가 상경 후 제일 처음 착수할 사업은 지물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지물업계는 이미 일본인들에 의하여 거의 독점되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인 지업상들은 일본인 거류민의 회사나 관공서, 그리고 일본인 경영의 신문뿐만 아니라 민족지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신문용지마저 독점 공급하던 판국이었다.

 

1926년 6월 1일 서울의 중심지인 을지로(당시 황금정 2정목 180번지)에 자본금 25만원으로 각종 지물의 도매와 그 부대 사업의 경영을 목적으로 선일지물주식회사(鮮一紙物株式會社)를 설립하였다. 이 당돌한 지업사의 출현에 처음 일본인 지업상들은 코웃음을 치고 희희낙락했다. 그것은 일개 무명의 시골 청년이 일본 상가의 아성에 감히 도전했다는데 대한 실소(失笑)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과 조롱을 다시 비웃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지물상 경영은 일본인들의 예상과 달리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선일지물의 사무실은 식산은행 건물을 임대한 것이었다.

 

영업개시와 함께 그는 부하직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몸소 발 벗고 나서 유수한 책방들을 비롯해 여러 인쇄소를 방문하며 창립인사와 함께 거래처 확보에 심혈을 경주했다. 그는 심지어 경쟁상대인 오만한 일본인 지업상들까지 찾아다니며 선의의 경쟁을 하자고 말하였다. 그 효과는 눈에 보이게 나타났다. 처음에는 오만하던 일본인 지업상들도 호감을 갖게 되었고, 얼마 안 되어 국내에 진출해있던 일본인계 지업상들과 거래를 맺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지물업은 1927년에 이르러서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 수백 개의 서관(출판사), 인쇄소 등 고정거래처를 확보할 만큼 발전을 거두었다.

 

그가 서울에서 최초로 벌였던 선일지업이 불과 창업 1년 만에 사업기반을 굳히게 되자, 그는 더욱 시야를 넓게 잡았다.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일본인 지업상들이 독점공급하고 있던 신문지 수입에 도전할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그는 일본으로 단신 건너가 대재벌 삼정계(三井系)의 직계 회사인 왕자제지(王子製紙)에서 신문용지를 직수입하는 루트를 개설했다.

 

그러나 당시 신문용지는 일본의 3대 제지회사들이 공판기구를 맺고 있는 이른바 카르텔에 묶여 장애에 걸리고 말았다.

 

실망도 컸으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일본 주재 스웨덴 대사관을 방문, 상무관을 만났다. 그는 이 상무관의 알선으로 일산지(日産紙)가 1연(連한)당 4원 50전이었으나, 2원 43전의 스웨덴지(紙에)를 수입하여 일간 신문사에 3원75전으로 납품할 수 있었다.

 

선일지물과 계약을 체결한 스웨덴 측 제지회사는 곧 무역선 더글라스호에 신문 용지를 만재하고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입하된 신문용지는 당초 견본보다도 더 지질이 우수하여 ‘시대일보’를 비롯한 국내 수요가들을 기쁘게 했고, 뒤늦게 이 소식에 접한 다른 거래처에서도 다투어 거래를 신청하였다.

 

1931년에 이르러 그는 선일지물이 쌓아 올린 재산을 배경으로 새로운 사업구상을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공칭 자본금 100만원의 주식회사 화신상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박흥식은 신 태화로부터 36만원이란 가격으로 백화점을 매수하게 되었다. 24세에 서울로 올라와 지물업 5년 만에 그는 백화점 사업을 착수케 되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1934년에 이르러서 백화점 경영으로써 유통업에서 도약하여 이러한 유통업을 근대적 상업 자본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연쇄점사업에 착수하였다.

 

연쇄점이란 성격상 백화점과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가?

 

본래 연쇄점이라면 1920년대부터 미국에서 발달한 체인 스토어라고 부르는 것으로 도매기능을 같이 갖는 대규모의 소매기능의 일종인데 판매점포를 각 지방에 분산적으로 배치하고 상품매입을 포함하는 타 기능을 집중적으로 통할하여 경영방식을 결정함으로써 소기의 효과를 달성하려는 경영형태이다.

 

다시 말하면 상품의 유통경로를 메이커에서 직접 소매상에 공급함으로써 중간 이익을 배제한 싼값으로 우량 상품을 대중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박리주의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경영 형태이다.

 

박흥식은 금융업에 진출한 귀족가문이나 1920년을 전후하여 제조업에 진출한 지주가문과는 달리 상업자본가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에는 면직물 수입이 급증하고 고무신 등의 소비재가 대량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급과 수요는 여전히 전통적인 장시(場市)나 지방상점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4년 화신연쇄점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전국적 유통체계의 구축을 도모하였다.

 

이 시기의 상업분야는 일본의 자본과 조직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예외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 화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근본 원인은 총독부 지배권력과의 결합에 의한 매판성에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총독부 정책 및 경제여건에 재빠르게 적응하는가 하면, 총독부 관료 및 일본인 기업인들과의 유대관계 형성에 노력하였다. 1938년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조선 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1942년에는 일왕(日王)을 만나 ‘대동아 전쟁 완수에 전력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발판으로 일제로부터 대폭적인 금융지원을 받는가 하면, 태평양전쟁 이후에도 전혀 간섭이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월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7항의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경영한 죄’로 최초의 구속자가 되었다. 그래서 같은 해 9월 26일 반민법 공판에서 무죄언도를 받기까지 병보석을 제외한 103일간 옥고 생활을 하였다.

 

1950년 10월 그는 화신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상업 자본가의 패턴을 벗어버리고 산업 자본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흥한화학섬유 설립, 그 후…

 

5·16군사 쿠데타 일주일 후 5월 23일 밤 그는 자택에서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혁명정부에서는 그가 민주당정권하에서 특별한 비호를 받아 막대한 이권과 융자를 얻었을 것이며, 동시에 민주당정부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43일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당국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은 화신산업(주)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이 문제를 추궁 조사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하여도 공식적으로 정치자금 100만원을 낸 것이 고작일 뿐, 단 한 푼의 융자나 한 건의 이권을 얻은 사실도 없었다.

 

1961년 7월 22일 혁명정부는 종합경제재건 5개년 계획안을 발표하게 되고 이어서 10월 26일에는 부정축재처리법을 개정하여 부정축재자들에게 벌과금을 현금으로 납부하는 대신에 국가재건에 필요한 공장을 건설하여 그 주식을 납부토록 지시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박흥식 사장에게도 수차례에 걸쳐 국가재건사업에 적극 참여해서 타기업에 모범이 되어달라고 종용해 왔다. 처음에는 무고한 옥고와 부정축재로 몰렸던 일 때문에 혁명정부에 대해 호감을 못 가졌던 터라 완곡히 거절하고 회피하였다.

 

그러나 당국에서는 단념하지 않고,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풍부한 경험으로 보아서 어떤 사업이 국가재건에 도움이 되겠는 지 그 계획만이라도 제출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화신산업은 이미 6대사업 계획안을 갖고 있었다.

 

그 6대 계획안은 ① 남서울도시계획사업 ② 정유사업 ③ 수력정원개발사업 ④ 화력전원개발사업 ⑤ 관광개발사업 ⑥ 수입대체사업 등이었다.

 

화신산업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수입대체산업으로서의 종합화학섬유공장의 건설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의 인견직제조업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했으나 이와 병행하여야 할 인견사 생산시설은 전무하여 인견사를 수입하기 위해 500만 달러의 외화를 소비하는 기형적 구조를 보이고 있었다.

 

이에 화신산업은 수입에 의존하던 인견사 전량을 대체 공급하고, 나아가 인견사의 수출을 기함으로 귀중한 외화를 절약하고 벌어들일 수 있다는데 착안하여 화섬공장 건설을 입안 제출하였던 것이다.

 

1961년 11월 정부는 당초 국영사업으로 추진하려던 인견사 10톤 규모 2개 공장과 아세테이트 10톤 규모 1개 공장 건설을 민영사업으로 바꾸고 일반 공모하게 되었다. 조건은 정부가 이 사업에 소요되는 외자 2000만 달러 차관의 지급보증을 해주고, 내자 8억 4000만원도 반액을 정부가 융자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 중 인견사공장 건설을 희망하고 나선 회사는 10개 회사에 달했으나 화신산업(주)과 조선견직(주)(사장 김지태(金智泰)이 최종 선정되어 각각 10톤 규모공장 하나씩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견사 공장 20톤이 경제단위가 되므로 정부가 종용하여 두 회사가 합변회사(合辨會社)를 만들도록 하였으나 조선견직이 물러서는 바람에 단독으로 1962년 5월 15일 자본금 3억원의 흥한화학섬유(주)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큰 난관이 닥쳐왔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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