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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한국경제 비화 ㊹]명성 김철호 사건<上>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지난 호에 이어서>

 

미스터리한 명성그룹의 급성장

 

미스터리 기업 명성(明星). 이 그룹에 대한 정밀세무조사를 1983년 6월 15일부터 7월 20일까지 35일간 예정으로 실시하겠다고 국세청장이 밝히면서 명성에 대한 실체 해부가 시작된다.

 

명성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는 50여 명의 정예조사요원을 투입, 정밀법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후 1개월 가량 경과한 1983년 8월 17일 국세청의 고발에 따라 대검중앙수사부는 명성그룹회장 김철호(金澈鎬) 씨(45)를 탈세, 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은행창구를 통해 김 씨에게 사채(私債)를 모아 준 상업은행 혜화동지점 대리 김동겸(金東謙) 씨(39)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각각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명성그룹은 어떠한 기업이며 붕괴시켜야만 했는가?

김철호 소유 명성계열기업은 1978년도에는 금강개발(金江開發) 등 5개 법인으로 그 자본금 총액이 8200만원이고 외형총액은 3800만원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결손이 1300만원이었다. 그런데 1982년도에는 자본규모가 59억 3000여 만원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급팽창하였다.

 

명성의 미스터리는 1979년 10월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도에 서민용아파트 1동을 건축 중 부도를 내고 쫓겨 다니던 김철호 씨가 어떤 수단을 써서 68억원이 드는 오성(五星)골프장을 인수했느냐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철호 회장은 육군 헌병감을 지낸 공국진(孔國鎭) 씨로부터 골프장을 사들이면서 인수자금 11억원, 공사비 50억원, 운영비 7억원을 포함하여 68억원이 갔다는데 이러한 거액은 37억원이 거액사채, 22억원의 골프장 입회금, 5억원의 영업수익, 4억원의 소액사채로 충당했다고 했다.

 

명성은 오성골프장을 인수하는데 그치지 않고, 1983년도까지 21개의 계열로 급속히 확장했다. 외형도 1979년에는 24억원, 1980년 47억원, 1981년 79억원, 1982년도 254억원으로 급팽창한다.

 

그런데도 세무서에는 매년 결손으로 신고만 되풀이하였다. 자본금 59억원 중에서 21억원을 잠식하여 자금조달이 어려워야 맞는데 불투명한 자금이 들어와 사업은 날로 번창하는 수수께끼같은 그룹이었다.

 

그처럼 큰 사업을 하는 배경에는 분명히 뭔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항간에 무성했다. 통일교가 뒷돈을 대고 있다는 풍문이 나돌았는가 하면 대통령의 장인 이규동(李圭東) 씨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이러한 명성그룹에 대해 국세청은 1982년 5월 세무조사를 실시하여 17억원의 탈세를 추징했었다. 털어 먼지가 안 날 기업이 없는 마당에 세무조사를 당한 기업치고 그 정도의 추징을 당했다면 일반적인 사건에 속했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루머는 계속 증폭되어 나갔다.

 

안무혁(安武赫) 국세청의 말.

“1983년 6월 다시 세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명성에 대한 세무조사는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윤자중(尹子重) 교통부 장관이 명성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레저산업육성계획을 보고했는데 이 보고를 받고 난 대통령이 직접 국세청 조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명성이라는 기업이 과연 그럴만한 기업인가를 알아보라’고 지시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혼이 난 전대통령으로서 정보보고를 통해 자신도 명성에 관한 의구심을 가져왔던 터였다.

 

김철호, 그는 누구인가?

 

1938년 9월 15일 전북 임실군 임실면 갈마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곤(金正坤) 씨는 일본서 중학교를 나와 광산업과 임산업에 손을 대 큰돈을 모았다.

 

김철호는 전주서중과 전주공고를 거쳐 한양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했다. 그의 레저산업에 대한 관심은 부친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광산업과 입산업에 손대서 재미를 본 김 씨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산과 들로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의 이 같은 경험이 대대적인 레저산업을 일으키게 한 동기가 되었다. 어릴 때 산을 잘 탔기 때문에 가파른 산을 젊은이 못지않게 잘 오른다.

 

김 회장이 7살 때 부친이 별세했다. 당시 남긴 유산은 현금 55000원, 금괴 7개, 200섬지기 논 등이 있으며 ‘부(富)의 원천은 땅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호남비료에 입사,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적극적인 성격으로 입사 후 다른 동기생들보다 고속승진하여, 1966년에는 과장자리에 올랐다.

 

그가 운수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해는 안전과장으로 사표를 내기 2년 전이다. 그가 운수업을 시작하려고 보니 시발택시를 구입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당시 광주에서는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되었기 때문에 가격도 비쌌고 공급량도 적었다.

 

광주에서는 차 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서울에 올라와서 그는 깜짝 놀랐다. 광주에서 대당 12만원하는 고물 시발택시가 서울에서는 폐차 직전에 헐값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에 착안해서 그는 번호판 없는 시발택시를 3대 사서 광주로 운반해서 판매하였다. 한 대에 5~6만원씩에 사서 12만원에 팔아 적지 않은 이익을 챙겼다.

 

사업의 길을 터득하기 시작한 그는 1968년 7월 정든 직장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때는 시발택시가 사라지고 토요타승용차 코로나가 등장했다.

 

코로나 10대를 사서 운수업을 시작하려던 그는 단 1대 출고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것을 알았다. 코로나 조립업체인 신진자동차 서대문 사무실에는 아침부터 차를 사려는 업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차는 하루가 다르게 프리미엄이 붙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청탁을 해도 한두 대 살까말까한 판이었으니. 30대의 무명청년에게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그는 정면 돌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삼선동에 있는 김창원(金昌源) 신진자동차 사장집을 새벽에 찾아가 대문 밖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김 사장이 수행비서와 함께 승용차에 오르려는 순간 쏜살같이 차문 앞으로 달려가서 호소했다.

 

“앞으로 운수업을 해보려는 젊은이입니다. 전남지역의 코로나 택시 판매전략을 갖고 있으니 5분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그는 대기시켜 놓은 차를 타고 회사까지 따라갔다.

젊은 청년의 끈질긴 호소에 마음이 움직인 김 사장은 그를 사무실로 불러 들였다. 김철호는 그 자리에서 약속했다.

 

“1년 이내에 광주에서 코로나를 100대 이상 굴러다니게 하겠다.”

 

이 말을 듣던 김 사장은 그 자리에서 코로나택시 10대를 주라고 직원에 지시했다. 그는 광주로 내려와 금강운수를 설립했다. 1968년의 일이었다. 부친이 남겨준 유산 2000만원을 전부 투입하고 운수업을 시작했다.

 

혜성같은 사나이, 김철호

 

사업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운수업에 손을 댄지 1년 반만에 나타났다. 10대로 시작한 운수회사가 130대로 불어났다.

 

그는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후에 서울로 올라와 김창원 사장을 만나 코로나 100대를 요청했다. 김창원 사장은 1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킨 김철호에게 말했다.

 

“당신은 앞으로 사업가로 대성할 것이 틀림없다.”

 

신진자동차를 조립해 판 이래 100대의 차를 일시에 판매한 사람은 김철호 씨뿐이었다. 당시 금호그룹 박인천 씨가 경영하던 광주고속 다음으로 거액의 세금을 납부했다.

 

사업에 자신을 얻자 그는 1969년 금강운수를 광주에 남겨두고 800만원을 소지하고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 퇴계로 동양빌딩 10층에 금강개발을 세웠다. 지금 세검정에 있는 7층짜리 예그린아파트도 금강개발이 건축한 건물이다.

 

김철호 씨는 사업을 계속 확장시켜 나갔다. 춘천 효자동에 있는 군납공장을 인수하고 사업을 급속도로 키워나갔다. 금강개발을 세운 뒤에도 구로동에 공장을 빌려 테이프를 만들고 잠실에 부동산 투자도 했다. 또 1970년에는 현대중건(現代重建), 1971년 현대미건(現代美建)을 세우고 건축업에 본격화했다.

 

그러나 급하게 팽창한 규모에 비해 경영능력이 따르지 못해 경영은 기울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경영을 맡긴 금강운수는 부도가 났다. 춘천의 군납공장도 날아갔다. 동업자간에 법정시비가 붙어 곤혹을 치렀다.

 

사업에 실패한 그는 1971년 국회의원에 출마를 시도했다.

무소속으로 자신의 고향인 임실에서. ‘혜성같은 사나이, 용감한 전북인’이란 벽보를 붙이고 힘껏 뛰었다. 그러나 투표전날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입후보를 사퇴했다.

 

그러나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목재회사인 현대신건재회사에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다시 월급쟁이로 새 출발했다. 그는 2년간 이 회사에서 모은 돈으로 1976년 화재로 타버린 성동지하상가를 인수했다. 이 상가는 1530평 규모였고 이를 사서 4800만원을 투자하여 복구공사를 했으나 상인들과 분규가 터져 소유권마저 잃었다.

 

1978년에는 관광사업에 꿈을 두고 2000만원에 명성관광을 세웠는데 1979년 4월 부도로 300만원의 빚을 지고 은신을 했다. 결국 김철호 씨는 10차례의 형사입건되었고 이중 5번이 집행유예, 벌금 등의 처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서 1979년 8월 오성컨트리클럽을 인수했으니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그는 ‘콘도미니엄’이라는 신상품을 개발하고 레저산업 분야에 남다른 혜안이 있었고, 무섭게 뻗어 나갔다. 양평에 있는 용문산을 개발하여 레저타운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지리산에 케이블카 건설을 계획했다.

 

1981년 12월 롯데호텔에서 ‘경로사상선양을 위한 청산(靑山)서예전’을 열어 그 이익금을 대한노인회(회장 이규동)에 전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문제의 소문이 났던 것인데, 김철호 씨는 오히려 철저하게 사업에 이용했다.

 

청산이란 김철호 씨의 호이다.

“김철호 씨가 글씨를 잘 쓰는지 모르지만, 누가 그 사람의 글씨를 사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시 출품한 작품은 상당히 고가에 팔려 나갔다”

 

명성그룹이 있는 삼환빌딩 4층에 회장실을 꾸며놓고 이규동 씨가 마치 회장으로 취임하여 뒤를 봐주는 것처럼 가장했다. 그리고서 응접탁자용 담배라이터케이스를 홍보용으로 만들어 빈 담배갑 속에는 이규동 씨 이름이 인쇄된 종이를 넣었다. 이규동 씨 인사장도 아니고 명함도 아니지만 이 종이가 들어 있는 담배케이스를 선물로 받는 사람들은 명성그룹을 무조건 도와주게 되었다.

 

국세청은 대통령의 세무조사지시를 받고 난감해 했다. 이미 1년 전에 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도 별 뾰족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실무적으로는 전혀 재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욱이 재조사를 통해 새로운 비위사실이 드러날 경우에는 1년 전의 세무조사가 허술하였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 되므로 이래저래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한 터에 이상한 사건이 7월 31일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세무조사를 받고 있던 명성의 김철호 회장이 신문광고를 통해 ‘강호제현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다.

 

겉으로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는 등의 사과문 형식을 갖췄으나 실제 내용은 누가 봐도 세무조사를 벌이고 있는 국세청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일개 신흥기업이 국세청을 상대로 싸움을 걸다니, 그것도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국세청장을 상대로.

 

가만히 있을 국세청이 아니었다. 안무혁 국세청장은 전례없이 세무조사의 중간발표를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세무조사는 발표하는 일이 없다.

안 청장은 ‘엄청난 탈세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기업이 자숙은커녕 또다시 국민을 오도하려 하는 저의가 한심하다’면서 조사요원 50명에서 100명으로 늘리는 등 총력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러나 국세청의 중간발표는 말이 중간발표이지 딱 부러지는 내용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명성 측은 국세청의 발표문에 대해 겁을 먹기는커녕 잘못된 부분을 낱낱이 반박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국세청은 이렇다 할 조사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국세청 내부에서는 재조사 시작부터 탐탁지 않았으므로 베테랑급의 인력도 투입하지 않았다.

 

“김철호 회장이 국세청을 공격하는 신문광고를 내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랐을 겁니다. 김 회장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예요. 아마 김 회장이 그런 짓만 안했더라도 명성에 대한 세무조사는 얼마안가 그만 두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성이 상업은행 혜화동지점과 거래한 예금원장 하나가 걸려들면서 드디어 그동안 명성이 동원해 온 자금출처가 극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한다.

 

적발경위는 이렇다.

조사요원은 각 계열기업이 비치한 장부에 은행거래를 일체 계상치 않고 현금거래로만 허위로 기장을 하고 있어 장부 외에 비밀계좌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은행을 조사한 결과 62개의 비밀계좌를 발견하였다.

 

상업은행 혜화동지점에 1979년 4월 7일 개설한 명성관광 대표 신명진(申明眞, 김철호 씨의 부인) 계좌의 거래가 초기에는 미미하던 것이 갑자기 커진 것을 발견하고 조사요원 30명을 투입해 정밀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점에 자금추적이 어렵도록 현금처리를 한 것이 내부협조자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했다.

 

김동겸(金東謙) 대리가 지목된다. 일반적으로 2년이면 이동이 되는데 5년 이상 한 자리에만 말뚝 박고 있었다. 그것도 대부나 당좌가 아닌 제예금담당이었다. 출근부 체크를 해보니 한 번의 휴가도 없었다.

 

조사요원들은 급피치를 올린다.

김동겸 대리의 처 심학자(沈鶴子) 씨가 명성관광과 남태평양레저타운의 주주며, 감사로 되어 있었다. 김철호가 1975년부터 건축 중이던 서울 종로 홍지동에 있는 예그린아파트 대지가 심학자가 가등기한 사실이 발견했다.

 

포위망을 좁히듯 김동겸 대리 주변을 조사한 후 집중 추궁했다. 김 대리는 8월 6일 수기통장발행방법으로 은행을 통해 많은 자금을 조달해온 사실을 시인하게 되었다.

 

조사요원들은 곧 김대리의 가택밀실에서 사채자금조성, 부정인출시에 사용하였던 비밀 노트 1권을 찾아냈다. 이 노트에서 예금사취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프로필] 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 효도실버신문 편집국장·시니어라이프 연구소 소장

• 전)한은 사정과장과 심의실장

• 저서 「금융기관 자점감사론(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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