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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동아시아 자본의 빅데이터, 부여백제 여행] ⑬농업자본에 따른 사회의 분화

약탈경제와 잉여경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인류는 수렵·채집생활에서 시작하여 유목생활과 농경활동으로 발전하였다. 유목생활은 가축을 키워서 식량으로 사용하거나 농업수단, 이동수단, 단백질 공급원, 자원 등으로 활용되었다.

 

사육되는 가축은 성질이 온순하면서 성장이 빠르고, 한 세대가 짧으면서 수직적인 집단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유목생활은 넓은 북방의 초원지대를 배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했고, 기후변화에 식량을 찾아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탈경제가 발전하였다.

 

유라시아는 동서 횡축으로 이동하면 식량작물(보리, 쌀, 밀)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농업은 소비하고 남은 식량을 저장하여 잉여경제를 형성할 수 있다. 식량이나 토지의 소유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분화되고 계급이 형성되었다. 경작지가 커질수록 농사에 필요한 남자들의 노동량은 증가하였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자들은 더 많이 출산해야 했다.

 

몽골초원과 흥안령에서 시작된 유목사회와 약탈경제

 

몽골고원, 시베리아와 만주는 바다 난류의 영향이 적어서 동일한 위도의 타 지역보다 춥고, 인접한 한반도에 북서계절풍으로 추위를 전달하고 있다. 만주 이북의 흥안령(興安領)은 유목민족들의 태동지이면서 유목생활의 터전이었다.

 

 

흥안령 지역에서 힘을 축적한 민족은 만주에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중원과 한반도에 진출했다. 중원은 한번도 남방 민족의 정복을 받은 적이 없지만, 고대부터 만주와 몽골고원의 국가형성에 따라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한반도도 이 지역에서 국가가 발원할 때마다 항상 시련과 침략을 겪었다.

 

만주의 송눈평원은 송화강의 지류인 넌강이 연결된 비옥한 흑토지대로 수렵과 목축, 농경활동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쿨룬 부이르 초원은 물과 풀이 풍부하여 유목민족들간 목초지다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유목민족인 몽골계(선비, 오환, 거란과 몽골), 퉁구스계(숙신, 읍루, 말갈, 여진), 예맥계 등이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그렇지만 유목생활은 자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축의 사육이나 수렵 활동의 특성상 잉여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한 사회를 형성하면서 주변 민족에 쉽게 동화되거나 흡수되었다. 한반도에도 유목민족인 말갈족이 남한강과 북한강의 중상류지역의 고원지대에 거주했지만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수도작 농업을 바탕으로 국가 기반의 형성

 

동아시아는 여름과 겨울에 풍향이 정반대인 몬순(monsoon, 계절풍)지대로 병동사가 발전하였다. 인도에서 시작된 쌀 재배는 기원전 6000~5000년전부터 북위 40도 이남까지 확산되었다. 벼의 품종인 인디카(indica)는 양자강 이남, 자포니카(japonica)는 양자강 이북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4000년의 조와 피, 기원전 3000년의 콩 종류가 중국의 동북지방에 나타나고 있다.

 

양사오문화(仰韶文化)는 기원전 5000~3000년 사이에 조와 수수 등을 재배하면서 목축과 사냥, 물고기잡이를 병행했다. 룽산문화(龍山文化)는 기원 전 3000년~2000년경 황하 중하류에서 번성했다.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는 복합 농경이 황하의 낙양(洛陽)평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김포의 가현리 토탄층에서 기원전 2000년의 쌀과 조의 탄화물이 검출되었고, 일산 가와지는 한반도 최초의 볍씨로 기원전 3000년전부터 재배했다.

 

청동기시대부터 본격적인 농경생활이 이루어졌다. 초기 농업은 수도작을 위하여 드넓은 평야보다 계곡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구릉지에서 이루어졌다. 주요 주거지도 물이 나올 수 있는 큰 산이나 하천 주변이었고, 이러한 지역은 홀 또는 골로 표현했다. 삼국사기에 농경이 활발했던 백제는 초기에 밭농사를 하다가 점차 늪지대(澤)에서 벼농사(稻田)를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도작을 위하여 연못(池)과 방죽(堤)을 쌓아서 물을 저장했는데 벽골제도 이때 만들어졌다. 일본서기에 한반도 이주민들이 일본의 저수지 축조에도 깊이 간여했다.

 

물관리가 절대적인 수도작 문화에서 비를 기원하는 용(龍)신앙이 뿌리깊게 자리하게 되었다. 국가도 풍년과 번영을 기원하면서 백제의 경우 왕실의 상징으로 흑룡과 방계에 황룡을 문장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민간신앙은 고등 종교인 사찰의 대웅전이나 미륵전에 용을 형상화하거나 용모양의 대들보를 만드는 전통을 만들기도 했다. 줄다리기는 용을 형상한 것으로 비를 얻으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농업과 잠업에 의한 국가기간 산업의 형성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우경은 생산량의 증대로 잉여경제를 형성하면서 사회의 분화와 경작지 확대를 위한 정복활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귀족들은 정복지역의 토지를 개간하고 국가에서 받은 식읍과 사전으로 대토지를 소유했다. 사찰도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많은 토지와 재화를 소유했다.

 

일반인도 토지를 소유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국가는 경작지를 기준으로 토지 소유에 관계없이 조세미를 수취하면서 농업중심의 경제를 장려했다.

 

 

 

 

 

또 다른 농경문화가 잠업이다. 중국은 기원전 3000년부터 누에를 이용하여 옷감을 얻었다. 한반도는 삼한(三韓)시대부터 양잠과 견직물이 보급되었다. 삼국지(三國志)에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서 옷을 해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고구려동명왕과 백제 온조왕 시기에 농상(農桑)을 권장하였고, 백제의 초고왕은 양잠법과 직조법을 일본에 전했다. 잠업이 중요한 산업으로 장려되었기 때문에 과거 산에서 자라는 소유주가 분명하지 못한 뽕나무도 보호를 받았다. 그렇지만 뽕나무는 활을 만들거나 나무나 수레의 멍에를 만들 때 사용하여 오래된 노거수가 적다.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친잠례(親蠶禮)를 거행했다. 궁궐에도 뽕나무를 심었는데 오래된 노거수가 궁궐이었던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에 남아 있다. 또한 국가가 누에를 키우고 종자를 나누던 잠실(蠶室)을 설치하였다. 송파의 잠실과 강남의 잠원은 잠실이 있었던 지역으로 잠원동(잠실리)에 조선 초기에 심은 뽕나무가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는 북방의 유목사회와 남방의 농경사회가 만나는 교착점으로 약탈경제와 잉여경제를 동시에 형성하였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공존하면서 유라시아와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은 샤먼이 먼저 정착했고, 농경생활이 본격화되면서 비를 다스리는 용(미르)신앙이 발전하게 되었다. 잉여생산과 토지를 매개로 계급이 분화되고 농경문화와 농경자본을 형성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조선 중기까지 이러한 순환시스템이 지속되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여파로 농업경제가 무너지면서 조선후기의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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