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박영복의 신용장 위조방법 신용장은 어떻게 위조했는가 ? 신용장 통지은행과 융자은행간에 신용장 대사가 허술한 점을 이용하였다. 홍콩에 있는 중국연합은행(中國聯合銀行 UCB)과 관계를 가진 외환은행이 문제다. UCB에서 외환은행에 L/C를 보내오면 외환은행이 중소기업은행 등에 이러한 L/C가 왔다고 고지해 준다. 통지를 해주고 그 마스터 L/C를 박영복에게 건넨다. 외환은행 담당자가 “직접 보내겠다”고 하면, 박영복은 “L/C를 가져야 지방지점에도 가고 상공부에도 가니, 마스터 L/C를 가져야 일이 된다”고 말했다. 박영복은 홍콩의 수입상인 교포 김경평(金慶平)과 공모하여 UCB를 통하여 특수조건부 신용장을 개설하였다. 통지은행 외환은행에서 박영복 관계인들이 받아다가 이것을 조건부를 삭제하고 아무 조건이 없는 크린 L/C처럼 가장하였다. 박영복은 외환은행을 통하여 정당히 수령한 특수조건부 신용장을 감추고 대신 위조신용장으로 시중은행에서 수출금융을 받아 냈다. 총 위조신용장은 81건에 달하였다. 그런데 특수조건내용은 “이 신용장에 의한 수출대금의 지급은 별도 개설은행이 수출품의 수량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여러 은행을 뒤흔든 박영복의 사기행각 1972년 4월 하순경 중소기업은행. 을지로지점에 영창식품(永昌食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는 은행장실을 제 사무실처럼 드나드는 젊은 실업가 박영복(朴永復·39)과 관계된 회사인데 당좌대출 요청을 해왔기 때문에 본점에까지 올리게 되었다. 본점 심사부에서 심사를 하다 보니 퇴계로지점에서 이미 취득한 현대통상(現代通商) 대출담보물과 동일물건이 이 당좌대출신청서에 담보로 제시된 것이 아닌가? 그 담보부동산은 대구시 신청동 대지 895평. 이를 발견한 사람은 강동기 과장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융자를 알선한 박영복과 관계된 모든 대출담보에 대해서 등기부를 한번 열람해 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해서 법무사를 시켜 열람케 되었다. 앞의 담보가 허위였다는 것이 밝혀짐은 물론, 다른 허위담보도 드러나 6억 5100만원이나 되었다. 즉시 은행장에게 보고되었고 은행장도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4억 5800만원이라는 융자가 나가 있었다. 수출금융이 2억4000만원, 일반대출이 2억 1800만원이었다. 문제의 화근은 사고발견을 했으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한편 삼호(三護)의 정재호(鄭載護), 왜 편타대출에 의존하려 했던가. 1965년 3월 2일 국회 재경위로 돌아가 보자. 역시 고흥문 위원. “…삼호재벌이 오늘날 그러한 지경에 도달했다고 하는 것이 어디서부터 병이 되었느냐 그 원인을 조사해본 결과, 외자도입법에 의해서 장기차관을 해 가지고서 방직기라든가 기계를 수입을 해 들여와야 될 것을 무역 베이스로 차관을 해서 그 기계를 들여와 수출과 생산을 한다는 상공부의 조건부로 제일은행에 보증을 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세요. 적어도 500만 달러라고 하는 거액의 자금이 3년 이내에 방직기가 들어와 수출을 해서 그것이(차관) 상환된다고 그러면 이 나라에서 사업안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삼호재벌의 단기차관 병(病)과 정부의 과오(過誤)를 동시에 지적하고 나섰다. 단기차관 원리금상환기일이 도래하니 대지급금이 발생하고 한도초과 대출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은행은 은행법 제27조 4호 위배가 된다고 아우성이고 편타대출로 이를 메울 수밖에 없었다. 삼호는 제주도 목장, 퇴계로에 있는 동화통신건물, 제일화재 주식 등등 모든 재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흥한화섬(주)에 닥친 첫 번째 난관은 당국의 외국차관에 대한 지급보증허가가 예상 밖으로 지체된 일이었다. 인견사 생산시설 도입에 대한 허가신청을 낸 것이 1962년 12월 20일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원료화학공장과 발전시설 차관에 대한 지급보증을 발급 받은 것이 무려 1년 11개월이 지난 1964년 11월의 일이었다. 당초 화신산업(주)은 차관도입에 소요되는 기간을 3개월로 잡았다. 차관도입업무에 백지상태와 같았던 당국의 실무진은 한편으로 공부를 해가며 추진할 수밖에 없어서 이처럼 시간의 차질을 가져왔던 것이다. 두 번째 난관은 내자(內資)의 잘못된 책정이었다. 처음 당국의 내자책정은 8억 4000만원인데, 기술진의 정산 결과는 6억원이 늘어난 14억원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차액은 인견사공장에 대한 양측의 견해차에서 빚어진 것이다. 당국에서는 펄프에서 인견사를 뽑아내는 비스코스 원액공장, 방사공장, 후처리공장 등 주공장의 건설만을 계상한 것이지만, 흥한화섬(주) 기술진에서는 인견사 제조용 주요약품은 국내공급이 어렵고, 이류화탄소(二硫化炭素) 같은 약품은 위험방지를 위해서도 자가제조가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상업자본가 박흥식은 누구인가? 그러면 3억 2000만원의 거액 편타를 쓰고 있었던 화신의 박흥식은 어떤 인물인가? 박흥식(朴興植)은 1903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출생하였다. 용강이라면 임진란 때 명장 김경서(金景瑞)가 태어난 고장이며 조선 난시에 한 때 천하를 뒤흔들던 홍경래(洪景來)가 난 곳도 바로 여기다. 박흥식은 8세 때 집에서 배우던 한문공부를 그만두고 용강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나이 14세 때 진남포상공학교에 진학하려 했는데 비운이 그에게 닥쳐왔다. 형 박창식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관한 부친이 당시 39세의 장년으로 별세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상업분야에 뛰어들었고,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의 첫 사업은 싸전이었다. 나이 17세. 당시 이 땅은 온통 일본 상품의 소비시장으로 전락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제국주의는 악명 높았던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있었는데 이것은 식량공급기지로서 한국을 전락시키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식량의 절대 부족량을 한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은행, 몇몇 재벌회사에 편타대출 1965년 2월 25일. 제48회 임시국회가 30일 일정으로 개회되었다. 그런데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금융 특혜’ 문제를 회의 벽두부터 들고 나왔다. 그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1963년 대통령 선거 때 화신산업(和信産業), 삼호방직(三頀紡織), 판본방직(阪本紡織) 등이 합계 15억원의 정치자금을 냈으며 이를 위하여 이들 3개 재벌 회사에 145억원의 특혜 여신을 해주었다. 이들에 대한 특혜가 고위층에서 직접 지시되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인 공화당의 해명은 즉각 나타났다. “신문에 보도된 앞의 회사들에 대한 145억원의 특혜는 그중 80%가 지급보증이기 때문에 현금 대출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융자는 수출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하여 자유당 정부 때로부터 있어 왔던 것이며 우리나라와 같이 내자 동원이 어려운 데서는 불가피하다. 또한 편타대출은 금융기관에서는 흔히 있어 온 일이며 화신(和信)의 조흥은행에 대한 것은 그 정도가 좀 지나쳤을 뿐이다” 이 편타대출이란 무엇인가. 야당의 이중재(李重載) 의원은 “편차(偏差)인지 뭔지, 그거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금리현실화 사흘 뒤인 10월 2일 장 부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정기예금의 증가와 연체회수, 자금가수요의 감소, 고리채축소, 부동산 투기의 감퇴 등은 물가의 안정과 기동성 있는 행정력의 강화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 신문사설은, “금리현실화는 실시 일주일 동안의 경과로 보아 대체로 성공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금융통제권 밖에서 국민경제를 좀먹어오던 시중사채금리에 도전해서 단행된 고금리정책은 유통의 주류를 공공금융기관으로 환원시키는데 획기적인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공공금융기관의 공신력 회복은 금융정상화의 기반을 굳히게 됨으로써 이제까지 금융대출을 특혜로 생각하던 폐풍도 줄어들고, 항상 문제가 되어온 금융자금의 가수요를 덜게 하는 한편, 예금증대로 수신내 여신 원칙이 바로 잡힐 것 같다.” 금리현실화에도 불구하고 염려했던 물가앙등, 사채금리상승, 금리정책 등의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목표였던 내자동원 측면에서도 8일 만에 저축성예금이 25억원 이상 증가, 당초 기대를 넘는 성과를 나타냈다. 10월 17일 시민회관에서는 금융사상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경제개발 시급했던 군부, 금리 카드 만지작 1965년 9월 30일. 사채(私債)에 비해 매우 낮은 은행의 예금이자와 대출이자를, 사채이자와 비슷하게 접근시킨다는 명목하에 예금이자는 정기예금의 경우 연 15%에서 30%로 올리고, 대출이자는 일반대출의 경우 연 16%에서 26%로 대폭 인상한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금리현실화조치가 단행됐다. 왜 금리현실화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라는 국가 주도 산업화 과정을 이끌어 나갔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연평균 성장률 7.1%로서 이를 추진하는 설비투자증가율은 22.6%로 짜였다. 그 재원은 국내 조달 9.2%이고, 해외 차입 13.4%. 이 계획이 안고 있는 문제는 5개년 동안 1850억원에 달하는 외자의 원활한 도입과 인플레이션 없는 내자조달이었다. 그러나 당초 재원 조달계획은 당시의 국민저축능력을 넘어선 데다, 1962년 통화개혁에 따른 경제활동의 위축과 1963년 농산물의 흉작이 뒤를 따른 것도 금리현실화 배경이었다. 그리하여 경제개발계획 2차 연도인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3, 4비가 완공되더라도 질소비료의 절대부족이라는 갈증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탁반 강요반으로 또다시 비료공장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1987년 이병철의 사망 직전에 나온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한국비료 공장건설과 관련하여 회고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병철에게 농민들에게 값싼 비료를 공급하기 위한 공장을 꼭 지어달라고 간청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발단은 1964년 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이병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장은 이제 일을 피하지 말고 새 사업을 일으켜 경제재건에 적극 참여해주시오.” 이렇게 운을 뗀 박 대통령은 농약공장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병철은 “기술, 자금, 시장성을 아직 검토해보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렇다면 이 사장께서 오랫동안 구상하신 비료공장은 어떻습니까.” 이병철은 그 제의에도 즉답을 피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장은 우리 정부에 협조할 생각이 없군요”라고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역부족일 뿐입니다.” “이 사장이 역부족이라면 다른 사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국회 오물투척사건삼분폭리 이면에 있는 또 하나의 암적 요소인 밀수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이다. 한국비료는 시가 1800만원 상당의 사카린 알을 불법으로 시중에 유포시키다 부산 세관에 적발됐다.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은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발단으로 거의 모든 언론사의 취재경쟁에 불을 붙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성열(金聖悅)은 경향신문 가판 기사를 읽고 “5월 말 진주의 경남일보가 보도한 것이 사실이구나”라며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은 5월 말 경남일보가 첫 보도를 했는데 대재벌이 사카린 따위나 밀수한다는 지방지의 보도가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중앙지 기자들은 반신반의한 채 사태의 추이만을 지켜보고 있던 중 경향신문 가판 기사가 난 겁니다.” 언론은 여론을 격랑(激浪)처럼 출렁거리게 했다. 제6대 국회 제58회 정기국회 회기 중인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국회에서도 ‘특정 재벌 밀수 사건’이란 안건으로 이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 장기영(張基榮) 경제부총리, 민복기(閔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사실 이 4대 의혹사건은 쿠데타 세력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김종필 씨 자신에게는 두고두고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관광객을 유치해 외화를 벌어보겠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는 평가해 줄 수도 있으나, 이면에 정치자금 조달이라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던 한 그것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최고회의도 내각도 모르는 엄청난 일들을 입안해 밀어붙이며 독주하고, “김종필, 너 혼자서 다 해먹기냐”는 식의 다른 최고위원들의 반발을 사 그를 벼랑으로 몰기도 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이러니 주변 인물들도 덩달아 날뛰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풍운아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종필은 사실상 중앙정보부의 정보망과 조직을 동원, 정치적 반대자를 반혁명으로 처단함은 물론 공화당을 사전조직하고 소위 4대 의혹사건으로 막대한 자금을 만들어 국정을 요리해 왔었다. 중정의 이런 나쁜 인상을 한결 돋보이게 한 것은 김용태, 장태화, 김종락이었다. 김용태는 김종필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자 경제담당고문이란 자리에 들어앉아 경제인들을 괴롭히는 온갖 못된 일을 도맡아 하다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군사정권 초기 정치자금 조달방법 새나라자동차 사건 증권파동사건만이 군사정권 초기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부정사건이 아니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빠찡꼬사건은 증권파동과 더불어 4대의혹사건으로서 공화당 조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사건들이다. 새나라자동차 사건, 이 사건은 1961년 12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라인이 재일 교포 재산을 끌어들여 국내에 자동차공장을 건설, 특혜를 줌으로써 자금을 조성하자는 구상에서 비롯되었다. 중앙정보부 석정선 제2국장 등의 아이디어로 일본제 소형자동차의 부품을 수입, 국내에서 조립하는 새나라공업주식회사라는 공장을 설립한다는 아이디어가 김종필 부장에게 먹혀 들어간 것이 의혹사건의 출발이었다. 당시 서울시내에서 굴러다니던 대중용 택시는 시발택시였다. 군용지프를 개조한 시발택시는 50대 이상 세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 중의 하나다. 초기에는 꽤 인기를 끌었지만 상자 곽처럼 생겨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자동차 공업도 육성할 겸해서 날씬한 일제 소형차를 들여와야 한다는 것이다. 포섭대상으로 떠오른재일 교포는 박노정 씨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230억환의 증권금융 요청에 대해 한은 임직원과 금융통화운영위원회(금통운위) 종합된 의견은 ‘이 융자는 부당하므로 금통운위에서 일단 부결하여 이를 정부에 회부, 정부 단독으로 수행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5월 24일 개정된 한은법에 따라 재무부장관의 금통운위 의결사항 재심요구권 및 재심의도 부결되었을 때 대통령이 최종 결정한다는 조항에 의거, 금통운위가 부결하여 정부(대통령)가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는 얘기였다. 어차피 수행될 때 되더라도 막을 수 있는 데까지는 막아보자, 아니 막는 시늉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판이 벌어지자 이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부에 회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천병규 재무장관이 직접 주재하는 금통운위가 5월 30일 오전 10시 10분에 열렸다. 참석자는 민병도 총재, 송찬규, 임석춘, 서재식, 임익두, 정문기, 김병원, 정인욱 위원 등이었다. 회의는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도중에 12시부터 10분간 긴장을 풀기 위해 휴회를 가질 정도였다. 증권금융의 당사자인 한은 총재가 가타부타 한마디도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무차별 공매매로 30억환 ‘구멍’ 금융통화위원회 개최 그런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겨우 열흘도 못돼 거래소는 다시 30억환의 증권금융을 요청하게 되었다. 월말은 닥쳐오는데 수도결제자금이 없어 다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4월 27일 거래소가 재무부에 띄운 공문은 이렇다. “지난 번의 청산자금 및 보통거래 대행결제자금으로 20억환을 한도외로 배정해 주신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지난 4월 20일 주주총회에서 40억환 증자결의에 의하여 35억환은 구주주에게 할당하고 잔여 5억환은 프리미엄부로 일반 공모하게 되어 최소한 50억환이 증자될 것이 예상되는바, 20억환 배정으로 자금이 다소 완화는 되었사오나 앞으로 수도결제의 원활을 기하기 위하여는 30억환 정도의 자금이 필요되옵기, 죄송하오나 당소 사정 고찰하시와 30억환을 추가로 한도외 배정해 주심을 앙원하나이다. 상환은 5월 상순경 20억환, 5월 하순경 30억환을 상환예정이옵기 첨신하나이다.” 무차별 공매매로 4월말 결제자금으로 필요한 금액은 114억환에 달했다. 그러나 증권금융 등 은행대출금을 포함하여 증권거래소
<전편에 이어> (조세금융신문=이국영 前 은행감독원 검사역) 4월 1일자로 시행에 들어간 개정 증권거래법은 거래방식을 종전의 실물거래와 청산거래 대신 실물거래와 보통거래로 바꾸었다. 보통거래는 매매가 성립되면 2개월간은 매수자가 대금을 결제하지 않아도 거래소가 대신 결제를 해주고 이자를 내면 주식을 인도할 수 있는 제도, 증권거래소가 일종의 여신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금리를 부담시켜 실물인수를 통한 실물거래를 유도하여 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선진국과는 달리 당시는 오히려 투기를 더욱 조장하고 증시과열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매일 주가가 토끼뜀을 하는 판에 몇 푼 안 되는 금리가 무슨 대수인가, 오히려 매일 차액을 정산하는 부담이 없이 두 달 동안 벌 수 있으므로 투기꾼들에게는 더욱 유리했다. 더욱이 보통거래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대형결제를 해야 하는 증권거래소가 그 엄청난 자금을 감당해 낼 도리가 없다. 파동에 은행권이 휩쓸려 들어가게 된 것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거래소가 증자를 해야 할 필연성도 여기서 나왔다. 거래소는 자본금 6억환에서 1차로 4억환을 늘린데 이어 4월중에 2차로 40억환을 증자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