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조선과 쓰시마 번 사이의 거래는 사대교린이라는 외교적 틀 속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에, 수출입 물품의 가액에 일률적인 비율을 적용해 국가가 징수하는 근대적 의미의 관세는 없었다. 오늘날처럼 수입·수출 가액에 비례해 국가가 일괄 과세하는 체계가 아니라, 공무역의 하사·교환, 사무역의 개시 운영, 물품별 현물 징수, 관행적 부담금·수수료·뇌물이 뒤섞인 구조였다. 그러나 사무역(개시)에서는 왜관 무역을 관리하는 조선 관리들, 즉 훈도(*일본어 통역관 겸 실무책임자)나 별차(*훈도의 보좌역)들이 거래를 중개하며 일부 사례에서 구전·편의 제공·비공식 상납(*인정)이 발생했다. 또한 조선의 일부 상인 집단은 무역상의 특권을 누리는 대신, 공납·조달 의무·역 부담을 지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외무역은 단순한 상업 행위라기 보다 외교적 접대, 구휼, 질서 유지의 성격이 강했고, 국가가 상업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를 이유로 경제적 실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대마도에 대한 통제와 무역 이익의 조정은 실제로 함께 작동했다. 일본 상인이 조선에 들어올 때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조선과 대마도(쓰시마 번) 사이의 무역은 ① 국가간의 예물 교환 성격인 공무역, ② 왜관내 시장에서 상인들끼리 거래인 사무역, ⓷ 비정기적인 구청, 구무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공무역은 조선-대마도간 외교의례에 결합된 정기적 교역으로 쓰시마 도주가 조선 국왕에게 바치는 예물(진상)과 그에 대해 조선 정부가 주는 답례품(회사)의 형태이다. 실질적으로는 쓰시마 번이 필요로 하는 쌀, 면포 등을 조선 정부가 지급하고, 조선은 일본의 구리, 황 등 전략 물자를 확보하는 '국가 간 거래'였다. 공무역은 조선과 대마도 측이 합의한 정량·정목에 따라 이루어진 제한적 교역으로, 물품의 종류와 수량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공무역(公貿易) 이외에, 조선 관리의 입회 아래 허가받은 양국 상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거래인 개시무역(開市貿易), 밀무역 상인[잠상(潛商)]들의 불법적 거래인 밀무역이 있었다. 사무역도 원칙적으로는 공무역보다 자유로웠지만, 실제로는 왜관의 장소·시기·참여자·통행 범위와 품목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뒤따랐다. 사무역인 개시(開市)무역은 부산의 왜관 내에 설치된 '개시대청'에서 정해진 날짜에 정기적으로 조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대마도(쓰시마섬)는 일본 본토보다 한국(한반도)에 훨씬 더 가깝다. 지리적으로 일본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지만, 거리상으로는 한국과 더 인접해 있다. 한국(부산)과의 거리는 약 49.5km이고, 일본 본토(후쿠오카)와의 거리는 약 132km로, 부산까지가 일본 후쿠오카까지보다 약 2.7배 가까운 셈이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고속선을 타면 약 1시간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면적은 제주도의 38% 정도이고 거제도의 약 1.8배이며, 2025~2026년 기준 대마도(쓰시마시)의 인구는 약 25,000명 ~ 27,000명 사이이고, 대부분 일본인이지만, 한국인이 약 100명 안팎 사는 거로 알려져 있다. 고대~고려 시대에 대마도는 대부분 산악으로 토질이 척박하여 농사가 잘 안되고 경작지가 겨우 3% 정도밖에 안 되어 식량 확보를 위해 한국(고려)과의 교역이 필수적이었다. 초기에는 고려와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으나,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이들의 근거지가 되어 고려 연안을 약탈했다. 고려·조선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1389년(창왕), 1396년(태조) 등에 박위 등을 보내 대마도를 정벌하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3년 동안의 조선에서의 꿈같은 권력을 맛본 묄렌도르프는 이후 천진 해관 도대, 상해 해관 조책처 부국장으로 청국 해관에서 근무했지만, 이전 지위보다도 낮은 직급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고종은 끊임없이 서신과 밀사 파견 등으로 국정에 대해 그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는 비공식 자문 역할을 계속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다시 1888년 5.14일 제물포에 상륙한 묄렌도르프는 몇차례의 어려움을 겪은 뒤 6월에 고종을 알현하고 재임용을 타진하고 당초 계약상의 그의 권리를 언급했다. 왕은 여러 어려움을 말하고 천진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그러면 전보를 보내겠다고 했다. 그 후 청국 해관에 있으면서도 조선으로의 복귀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부인이 자녀들과 독일로 떠난 뒤 1901년 54세에 닝보(寧波)에서 사망하여 상해에 묻혔다. 묄렌도르프가 고요한 승리감과 기쁨을 느꼈고, 조선에서의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드는 것이 연좌제의 폐지이다. 종전에는 정치범들 즉, 고위직 관리들이 사형 선고를 받으면, 그들의 가족 모두에게도 유죄 선고를 내려, 사내아이들은 노예가 되고,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묄렌도르프의 조선 해관은 세금·무역 관리를 체계화하는 등 조선 근대화의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이 강대국들 경쟁의 무대에 홀로 서서 자국 이익을 우선에 둔 경쟁적인 열강들 속에서 자립의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조선을 “속국”처럼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청나라, 임오군란 이후 근대화된 군사력으로 압박하여 조선을 자국 영향권으로 끌어들이려 한 일본, 일본을 견제하고 부동항 확보를 위하여 남하 정책으로 조선에 접근한 러시아, 통상 확대와 이권 확보에 혈안이 된 미국·영국 등, 열강의 자국 이익 각축과 격동의 시대에 조선 정부는 자국을 둘러싼 이러한 열강 구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한 치의 오차나 허술함이 없는 판단력과 행동을 보여 주어야만 했었다. 묄렌도르프는 중국이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며,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중국·일본·러시아의 삼각 균형 구도에서 러시아가 효과적인 견제 세력으로 필요하고, 조선이 우선, 열강들과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부인 로잘리가 쓴 묄렌도르프의 자서전에 의하면 1884년 12월 일어난 갑신정변 10일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열강들의 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묄렌도르프를 초빙한 조선정부는 그를 어떻게 대했을까?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오기 한 달 전 그가 초안을 작성하고, 마건충과 조영하(*조씨 항렬상 조대비의 조카뻘이 되나,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사촌으로 잘못 알고 있음)가 철저히 검토한 고종의 칙령(임명 선언)과 그 부속 문서(고용조건 명시)의 주요 내용을 보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조선 정부와 묄렌도르프의 고용계약서(*칙령 및 그 부속 문서)에는 묄렌도르프의 직책과 그 권한에 대하여 규정하였다. 그의 직책은 통리아문 참의(*외교통상부 차관보)ㆍ외아문 협판(*외교부 차관)ㆍ해관 총세무사(*관세청장)ㆍ전환국 총판(*조폐공사 사장)으로, 조선 정부의 외교 교섭 및 해관 운영 등을 담당 수행하는 것으로, 이러한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각국의 제도를 비교 연구하여 처리하되, 월권행위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해관 운영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조선인을 채용하되, 부득이하여 외국인을 고용할 경우에는 조선 정부의 허가를 얻어 채용하여야 하며, 전단(專斷)을 불허한다. 수납한 관세는 조선 정부가 이를 관리하도록 하고 묄렌도르프는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조선 정부에서 목인덕(穆麟德), 또는 목 참판으로 불린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는 1847년 2월 17일 독일 북부 옛 마르크 브란덴브르크 지방의 한 귀족 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1865년 할레(Halle) 대학에서 법학과 언어학, 동양학을 공부하였고, 법학 박사학위(Dr. Jur)를 받았다. 그는 능통한 중국어 실력자이며 탁월한 히브리어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고, 키가 아주 크고 몸이 억센 학생이었다. 8개 외국어에 능통하였으며. 대학 졸업 후 1869년 북독일 연방총리실 영사관 근무를 신청하였는데 친척으로부터 중국 해관에서 독일인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22세 때인 1869년 청으로 건너왔다. 그 당시 독일에서 중국으로의 여행경로를 보면, 1869년 8월 19일 귀를리츠를 출발, 베를린 – 할레- 드레스덴 - 프라하 – 브륀 – 비엔나 – 트리에스트 – 크레타 - 알렉산드리아 – 수에즈 – 아덴 (이상 4주 소요)- 갈 – 칼카타 – 실론- 페낭 - 싱가포르 – 홍콩 – 상해로 2달이 걸렸다.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1869년 10월 27일 상해 해관에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우리나라의 관세평가제도는 어떻게 발전되었을까? 1. 1949년 관세법 제정 전의 시기(- 1949년) 관세법이 제정된 1949년 이전까지는 역사적 자료, 기록이나 연구가 부재하고 미비하여 알 수가 없으나, 그 시대 상황에 따라 나름대로의 평가 방법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세계관세사에서 보는 대로, 근대 세관제도 도입 이전에는 국경·항구에서 통과물품에 세금을 부과하였을 것이고, 물품에 대한 과세가격 평가는 물품의 수량·중량 또는 임의가격으로 기준이 있었을 것이나 일반적이거나 통일된 기준은 거의 없었고, 시대별, 지역별로 제각각이었고 자의성이 컸으며 일부 국가 내에서도 일관성이 없었을 것이다. 19세기말 개항기에 일본·중국·미국 등과의 통상조약에 따라 관세부과를 시작하였으나, 관세평가 기준은 임의· 관행적이었을 거로 추정하며 일제강점기부터는 일본 관세(평가)제도를 적용하였을 것이고, 관세평가는 정부에서 내려 주는 과세가격 고시·기준가격 중심으로(*조선 시대에도 같은 방식이었음), 실질거래 가격 반영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본다. 2. 시가역산의 시기(1949-1964) 1948년 정부수립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20세기 초, 각국 세관의 자의적인 평가 관행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나 국제연맹(1920-1946)의 주도하에 그러한 관세평가 절차의 불공정성을 해결하려는 초기 시도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만 제시하는 데 그쳤다. 관세평가에 관한 통일된 시스템을 찾는 노력은 거의 이상적인 꿈에 머물렀다. UN이 창설(‘45.10.24)된 후에야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기회가 생겼다. 브레튼 우즈 체제하에서 23개국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체결하고(제네바 라운드,1947년), 56개국 대표자들이 쿠바의 하바나에 모여 국제무역기구(ITO: The 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의 헌장에 대한 협상에 착수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관세평가에 관한 일반 원칙에 대한 합의가 1947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유엔 무역·고용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세 평가에 관한 국제적 규범은 1948년 ’국제무역기구(ITO)를 위한 하바나 헌장‘ 제35조에 명시되었다. 유사한 평가 조항이 1947년 GATT 제7조에도 포함되어 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제안한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미국에서 수입되는 자동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려면, 자동차(과세물건)의 과세가격(차량가격+운송비+보험료를 합산한 금액)에 이미 공표되어 있는 15%의 관세율로 곱한 관세를 계산해 수입 화주(납세의무자)로부터 징수한다. 과세물건, 납세의무자, 관세율, 과세표준(과세가격)을 관세부과의 4대 요건이라 한다. 이 요건 중에서 핵심은 세율과 과세표준이다. 그러나 세율은 이미 국제적 협약으로 정의된 상품 분류(HS code)에 따라 입법 절차를 거쳐 확정되어 있다. 반면, 과세표준은 수입통관 과정에서 매번 개별 과세물건에 적정한 금액이 평가되어야 한다. 관세법에 의하면 관세의 과세표준은 수입 물품의 가격 또는 수량이므로, 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자동차의 가격이나 수량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수량을 과세표준으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오늘날에는 대부분 국가가 일반적으로 과세표준을 가격으로 정하여 운영한다. 수입품에 부과되는 세금을 계산하는 기준인 과세표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수입품 가액에 일정 비율(%)을 부과하거나(종가세), 10병에 1병, 100리터에 10리터 등 과같이 중량이나 부피와 같은 물리적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한자 ‘관세(關稅)’는 국경의 관문에서 걷는 세금을 의미하며, 근대 이전 한국과 중국에서도 주로 국경 통과 시 부과되는 통행세 개념으로 사용되었고, 또 역사상 실제 징수한 사례들이 보인다. 그러나 근대적 의미의 관세는 1842년 난징조약에서 청나라가 영국 상품에 일률적으로 5%의 세율을 적용하기로 하면서 본격화되었고, 이때 중국이 도입한 영국의 세관/관세 제도가 개항과 함께 조선과 일본에도 도입되었기 때문에, 영국 세관의 역사를 알면 우리나라의 세관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 소개한다. 영국에서 관세는 국가의 관세로서 제도화되기 훨씬 전부터 지방 베이스로 발생되었으며 국경관세(통과세, 수출입세)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프랑스로부터의 주 수입품인 포도주 20통에 1통 비율의 종량세를 징수하면서 관세 제도가 발전하였다. 12세기까지는 관세는 각 지방의 권력자에 의해서 징수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215년 대헌장(Magna Carta)에 서명한 존왕이 부족한 전쟁경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1203년에 <항구에 있어서의 관습적인 세는 지방 관료의 손을 거치지 말고 직접 국가의 재무부 장관에게 납부해야 한다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중국을 개항시킨 대표적인 항구가 상해였으며, 1853년 9월 상해에서 소도회(小刀會)가 태평천국군의 상해 진격에 호응해 상해 현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상해 강해관(江海關)의 기능이 정지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9월 9일 상해 주재 영국 영사와 미국 공사는 기능이 상실된 강해관을 대신해 자국 상선으로부터 각기 관세를 징수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청군이 상해를 수복하면 거둔 관세를 강해관에 넘기겠다고 선언한 ‘임시제도(the Provisional System)’가 성립됐다. 하지만 5개월 후 이 임시제도가 폐지된 후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영국은 그때 거둔 관세액 전액을 청 해관에 넘기지 않았고 미국은 그 일부 금액만 넘겼을 뿐이었다. 이후 중국측은 원래 위치에 해관을 세워 운영을 재개하려 했으나 영국공사가 반대하자 선박에 수상(水上)해관을 설치하는 등 임시로 해관 운영을 시도했으나 이마저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영국측에서 중국측에게 강해관을 원래의 영국 조계 내에 설치하고 수세 업무를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조건으로 해관 사무를 외국인이 담당하는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아편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이 중국을 개항시켜 자국 상품을 아시아에 수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대표적인 항구가 상하이였다. 이곳에서 중국 상인들은 영국산 제품을 동아시아 각지로 재수출하였다. 특히 일본은 이러한 주변국의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대처하면서 1877년에 나가사키와 부산 간에 정기 직항로를 개설, 상해에서 건너온 영국산 면제품을 조선에 독점 중계무역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중국 상인들이 앞서 누려오던 무역 기득권을 서서히 빼앗아 갔다. 그 당시 조선 내로 물자가 출입하는 통로는 크게 두 곳이었다. 하나는 남쪽 동래부이며, 다른 하나는 북쪽 의주부이다. 이 두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기존의 무역구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1876.2. 27일 체결된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다. 동년 8. 24일 상동 조규 부록(附錄) <통상 장정(무역규칙)>을 체결하였는데, 조·일은 수입세와 수출세를 징수하지 아니한다는 관세 폐지 각서를 교부했다. 1858년 체결된 미·일수호조약은 협정관세는 오직 일본 정부에게만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편무조약이었으나, 조·일수호조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연구회 이사장) 일본의 관세역사 연구 학자인 조창홍교(朝蒼弘敎)는 저서 “세계의 관세사”에서 고대 그리스는 ⓵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이고 먹거리(농산물)가 부족하여 교역이 필요했고 ⓶ 주조화폐의 유통 및 모험대부(보험제도)의 보급이라는 해상운송의 위험을 헷지해주는 제도적 기반이 구축되어 있었고, ⓷ 아테네의 해군력으로 지중해를 장악하고,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등 국력의 지원으로 무역이 융성하였으므로, 징세 청부인이 징수하는등 관세제도가 발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양의 사상가 맹자는 기원전 372 – 289년 사람으로, 관세는 물자의 자유로운 유통을 저해하기 때문에 국가경제면에서 손해이고, 철폐해야 한다고 했고, 관소(세관)는 검사를 하되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는 관소(關所)의 이상상(理想像)이 확립되어 있었다. 이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란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었다. 대다수의 중국 왕조들은 정복 왕조인 원나라를 제외하면, 지배층인 농촌 지주들의 성향이 해외진출·무역과는 맞지 않았다. 농업을 국가 경제의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해외진출은 농업 노동력의 상실과 사회 생산기반의 훼손을 초래하고, 세금의 감소를 가져 온다.
(조세금융신문=이대복 한국 FTA 원산지연구회 이사장) 미국의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가 WTO(세계무역기구) 체제 종식을 선언했다. 관세와 제조업 보호에 중점을 둔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정책을 지금까지의 WTO 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라고 규정했다. 그는 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 기고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입된 브레턴우즈 체제와 이후 WTO 설립으로 이어진 ‘우루과이 라운드’ 등 미국에만 불리하게 작용한 세계 무역 질서를 개혁하려고 한다면서, 우리는 이제 '트럼프 라운드'를 목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자주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실효성이 상실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자 최대 시장이라는 점을 십분 활용하는 한편,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미국 시장을 두고 상호 경쟁적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지렛대로 삼고, 거대한 시장을 앞세워 일방적인 무역 합의를 압박하고 있다. 25. 1. 20일 시작된 미합중국 제47대 대통령 트럼프 2기에 맞추어, 한국 관세청은 “미국 관세정책 변화 대응본부”[본부장: 국장(2월) ->차장(3월) ->청장(7월)]을 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