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_유지소 썩은, 썩어가는 사과가 젖을 물리고 있다 하루의 시간도 한 해의 시간도 막바지 능선을 타넘는 야산 언덕에서 썩은, 썩어가는 사과가 아직 푸른 힘줄이 꿈틀거리는 젖가슴을 반쯤 흙 속에 파묻고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사과가 다 떠난 사과나무에게 사과를 잊은 입, 잎들이 열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병든, 병들었다고 버림받은 사과가 저를 버린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썩었다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사과가 시린 나뭇가지 끝에서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평생을 아낌없이 내어준 늙은 나무, 삭풍에 시달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에게 젖을 물려주는 행위로 읽혀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냐 사랑은 이처럼 온전하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서 이기심이나 이해타산을 벗어난 진정한 가르침을 본다.
청계 폭포 _강은교 나 늙고 늙었다 흰 머리칼 시간의 장대에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인다 쭈글거리는 살은 어둠의 장식 같은 것 혀는 꿈꾸고 꿈꾼다 돌의 날개 밭을 지층들이 부활의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어느 밤엔가는 천둥소리 흩날리며 번개의 은빛 장대 휘두르리 나 늙고 늙었으나 네가 껴입은 내 눈썹 도도히 흐르는 부활의 동굴에서 그가 일어서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서리 장대하게 장대하게 펄럭이리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불멸의 시간에 매달려 장대하게 펄럭거리는 폭포의 성난 목소리를 기억한다 비록 지금은 늙고 흰 머리칼 성성하여 무한낙하의 고통과 상실의 시대를 건너가지만 우레처럼 쏟아져 내려가 언젠가는 너른 땅위에 새로운 생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리라 그 빛으로 푸르게 푸르게 일어서리라
수몰 지구 _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우는 것 마음이 한 켠으로 쏠리는 것도 때로 지나치면 과부하가 걸리는 법이다 적당히 둑을 쌓고 넘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고 물길을 터줘야만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리지 않을 터이다 예고없이 장맛비는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치는 밤이다 네게로 향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수문을 열어보지만, 언제 비가 그칠지, 언제 태풍이 끝날지 모른다 다만, 그때까지 허술한 마음의 댐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칠 일 _이병률 칠 일만 사랑하겠다 육 일이 되는 날 사랑을 끝내고 뒷일도 균열도 없이 까무룩 잊고만 싶다 완전히 산산이 사랑하겠다 문드러져 뼈마디만 남기고 소멸하겠다 칠 일이 되는 날 꽃나무 가지 하나 꺾어 두 눈을 찌르고 눈이 멀겠다 까맣게 먹먹하겠다 헤아릴 무엇도 남기지 않도록 지문을 없애겠다 눈이 맵도록 이불까지 유리잔까지 불살라 태울 것이며 칠 일 동안의 정확한 감정은 절벽에 안겨 떨어지리라 칠 일이 지난 새벽부터 폭우가 내리고 그 홍수 닿는 것에 숲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자격으로 첫 번째 해가 뜬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재물이 연애의 조건이 되고 재력이 장식품처럼 거래되는 세태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딱 육일간만 사랑하겠다 그리고 칠 일 째 되는 날 모든 것을 통째로 비우고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얼마나 처절한 모순인 것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는 다짐인지도 모른다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이 난무하는 세태에 대한 준엄한 울림이다
푸른 밤 _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까마득한 밤을 숱한 불면으로 보내고 무수하게 많은 길을 미친 듯이 걸어 다녀보지만 매양 길어 올린 것은 그대에게 가는 별빛일 따름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수많은 길을 걷고 또 걸어보지만 나의 생애는 네게로 가는 한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모든 것이 끝난 ‘검은 밤’이 아니라 아직 푸른 꿈이 있는 ‘푸른 밤’이다.
나뭇가지 _곽해룡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앉아서 울 때는 꿈쩍도 않더니 새가 떠나자 혼자서 오랫동안 흔들린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뭐든지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르는 법이다 떠나고 나서 아쉽고 보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랴 나뭇가지의 작은 흔들림에서 삶의 지혜와 세상이치를 배운다 새 한 마리가 우리에게 주고 간 선물이다
결근사유_복효근 목련꽃 터지는 소리에 아아, 나는 아파라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에 花르르 피어나는 봄꽃들로 부산하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할 것 없이 순서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봄꽃들로 칙칙한 세상이 모처럼 환하다 발칙하게 터지는 목련의 하얀 미소에 어느 누군들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순백의 저고리가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결근사유가 되고도 남을 법 하다
스테이플러_윤성택 기차는 속력을 내면서 무게의 심지를 박는다, 덜컹덜컹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입 벌린 어둠 속, 구부러진 철침마냥 팔짱을 낀 승객들 저마다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다 한 생이 그냥 스쳐가고 기약 없이 또 한 생이 넘겨지고 아득한 여백의 차창에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얼굴들 철컥거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촘촘한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간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구부러진 철길이 허리를 펴는 동안 승객들은 졸고 있거나 혹은 창밖 풍경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여백의 차창 너머 지나 온 반생이 아득하고, 기약없이 넘겨지는 나머지 여백의 빈 창, 오늘도 무심한 기차는 단단한 스테이플러를 박으며 생의 한 칸을 건너 다른 칸으로 제 무게를 옮겨심는다
당신_김륭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神이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사랑은 모든 것을 품는 우주다. 사랑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주고도 아깝지 않고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늘 허기가 지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한 당신은 내게 신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순간이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_이명윤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 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엉겁결에 튀어나온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뇌리 속에 잊혀져가는 어머니의 손맛을 내 몸이 스스로 기억해 낸 말이다 나 오늘, 속살까지 뜨거워지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은 그냥, 수제비 어때, 입맛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 오늘 외롭다는 말이다 진짜 배고프다는 뜻이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사는 일이 힘들고 팍팍할수록 유년의 추억이 그립게 마련이다. 하얀 쌀밥이 수제비 한 그릇에 담긴 어머니의 따뜻한 손맛과 고향의 정감이 가득 담긴 수제비 한 그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수제비가 먹고 싶다는 말,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맛이 그립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속살까지 뜨거웠던 그 유년의 강가에 가보고 싶다는 말이다.
징 _박정원 누가 나를 제대로 한방 먹여줬으면 좋겠다 피가 철철 흐르도록 퍼런 멍이 평생 지워지지 않도록 찡하게 맞았으면 좋겠다 상처가 깊을수록 은은한 소리를 낸다는데 멍울 진 가슴 한복판에 명중해야 멀리멀리 울려 퍼진다는데 오늘도 나는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서쪽 산 정수리로 망연히 붉은 징 하나를 넘기고야 만다 징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한번 울어보지도 못하고 모가지로 매달린 채 녹슨 밥을 먹으면서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징소리는 제 몸의 상처가 깊을수록 가슴속에서 길어 올린 소리로 멀리 퍼져나간다. 상처 없이 완성되는 삶이 어디 있으랴 징채도 한 번 제대로 못 잡고, 그렇다고 목청껏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붉은 징 같은 삶이 곧 서민들의 삶 아닐까 싶다. 언젠가 가슴 한복판에 명중하는 징소리를 꿈꾸며 오늘도 처마 밑에 쭈그려 앉는다.
청산도_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 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
다시 꽃피는 아침-양현근 무서리 가득한 언덕을 지나 푸른 이파리의 한 시절이 눅눅한 어둠 걷어내며 저리 뜨겁게 돋아나요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무딘 뿌리들 다짐하듯 반짝이고 있어요 이제 우리, 서로를 감싸 안은 낮은 어깨동무로 한 생애의 현기증을 반듯하게 건너가요 서두르지 말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그저 넉넉한 차림새로 새벽 새들의 지저귐과 꽃피는 날들의 이유를 함께 생각해요 나를 열어 그대를 받고 밤새도록 우리를 품어 저 산처럼 펄럭이면 너른 들판의 빈자리에는 금세 새벽 강물의 뒤척이는 소리로 가득하겠지요 첫, 사랑 같은 지극함이 들어차겠지요 한 시절 꽃피고 싶은 풍경이 저리도 환하게 경배하듯 밝아 와요 두 날개 바스락거리며 우리들의 배경에 안녕, 안녕, 반짝이는 햇살을 부려놓아요 지금은 별들이 서둘러 귀가하는 둥근 새벽 참말로 기쁜 우리들의 너른 벌판이거든요 깊은 산 너른 강을 휘돌아 풀꽃 향기 터지는 푸른 아침이거든요 [시인] 양 현 근 1998년 『창조문학』 등단 시집 『수채화로 사는 날』 『안부가 그리운 날』 『길은 그리움 쪽으로 눕는다』 『기다림 근처』 등 2009년 『시선』작품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詩 감상] 양 현
고장난 자전거_권혁웅 고장난 자전거, 낡아서 끊어진 체인 손잡이는 빗물에 녹슬어 있었네 고장난 자전거, 한때는 모든 길을 둥글게 말아쥐고 달렸지 잠시 당신에게 인사하는 동안에도 자전거는 당신의 왼쪽 볼을 오른쪽 볼로 바꾸어 보여주었네 자전거는 6월을 돌아나와 9월에 멈추어 섰지 바퀴살 위에서 햇살이 가늘게 부서지네 내가 그리는 동그라미는 당신이 만든 동그라미를 따라갔지 우리는 그렇게 여름을 질러갔지 고장난 자전거, 9월은 6월을 생각나게 하네 뜯어진 안장은 걸터앉았던 나를 모를 테지만 녹슨 저 손잡이는 손등에 닿은 손바닥을 기억하지 않겠지만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뜨거웠던 한 시절을 지나 와 지금은 담장에 기대 선 고장 난 자전거 한 대에서 순환의 처연함을 읽는다. 쉬면 넘어지고, 멈추면 녹스는 것이 사랑의 진리이고 삶의 정직한 원칙이다. 6월에서 9월로 건너간 계절의 순환, 자전거 바퀴, 그리고 에로틱했던 사랑까지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순간이다. 누군가의 뜨거운 계절을 지나 악착같이 움켜쥐려 했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고장난 바퀴살에 가늘게 부서지는 햇살이 둥글다.
물방울_고성만 저기 저 푸른 비단을 구르는 진주 방울 좀 보아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나무 끝 잎사귀 위 사뿐 내려앉아 무지갯빛 밝혀주는 물의 방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손잡이가 없어 서성 서성이네 詩 감상 _양현근 시인 비 온 뒤 나무이파리에 매달린 영롱한 물방울이 마치 푸른 비단위를 떼구르르 구르는 진주처럼 곱다 들어가고 싶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들어갈 수 없다는 시인의 마음이 순수하다 못해 아름답다 그 무지갯빛 맑은 방속으로 누가 감히 길을 낼 생각이나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