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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비록 ⑯] 영원한 맞수 ‘국세청 사람들’<上>

(조세금융신문=김종규 논설고문 겸 대기자)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자리시샘 다툼은 별반 달라진 게없다. 개개인의 과학적인 데이터와 원칙적인 기준이 잘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그간 권력형 배후세력 작용은 국세청 인사관리행정에 난맥상을 만든 훼방꾼이 됐다.


국세청 공무원의 인적구성 특징도 타 부처보다 별로 특별하지 않다. TK·PK라고 불리는 영남지역, 호남지역, 그리고 수도권역 등 중부지역으로 구성된 것도 대동소이하고 행시, 세무대학, 일반 공채, 특채 등 임용구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속내를 파고들어 가면 색깔이 영판 달라진다. 철통같은 전통과 인사문화가 떡 버티고 있다. 지연 · 학연 · 혈연 등 끼리끼리 연줄대기 근절이 불완전상태이고, 본청 중심의 행시출신 대거 활보라든가 그리고 현업세무 관서에 일반·공채, 세무대 등 특채출신들이 건재하다.


게다가 세무전문성에다가 경륜까지 품고 있으니, 더할 나위없는 재정역군이자 엘리트 집단 군(群)이다. 국세청 개청을 계기로 많은 엘리트 세무공무원을 양성 · 육성했으나, 되레 그 엘리트 마인드가 지역 간, 임용 간에 자리다툼의 핵이 돼버렸다. 라이벌의 불씨로 돌변했고 영원한 맞수로 둔갑한 작태들이 판을 쳤다.


1970~1980년대 본받을 엘리트 표상으로 부각된 장재식 국세청 차장과 배 도 국세청 차장을 롤 모델로 삼아, 썩 투명하지 못했던 당시 인사행정의 곡절을 조세금융신문(월간 조세금융)창간기념 특집을 통해서 되짚어 보았다.


야성이 강한 호남출신 장재식 서울청장 부임 8개월 만에
본청 간세국장에 좌천전보됐고 급기야 전매청으로 쫓겨나
‘장재식(당시 국세청 간세국장)이는 김대중 이와 가깝다는 설이 있음’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올린 첩보보고서에 쓰여 진 내용이다.


장 차장은 끝내 한국주택은행장으로 쫓겨나 공직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배 차장을 모략하는 투서들이 있답니다. 별다른 내용도 없는 투서들이라고는 합니다만…” 김수학 4대 국세청장의 귀띔이다.


1980년 8월경에 배 차장은 신용기금 이사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두 사건 모두 김 청장 재임기간(1978년 12월 26일~1982년 5월 20일)에 이뤄진 사건인 관계로 ‘차장 밀어내는 청장’이 돼 버린 거나 진배없게 일파만파 번졌다. 배 도 차장은 후진을 위한 용퇴가 퇴진명분이고, 장 차장은 세금 문외한인 김 청장이 조세전문가를 구미에 안 맞는다고 쫓아냈다고 가슴에 새기었으리라는 뒷얘기가 무성했다.


1970년은 장 과장에게 이변을 낳게 한 해이다. 오정근 국세청장(2대)의 부임이 그렇게 만들었다. 5.16주체 세력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기로 소문난 오 청장은 장재식 국장을 서울 지방국세청장으로 전보·발령했다. 텃새 강하기로 이름난 ‘국세청 사람들’이 짖어대기 시작했다.


야성(野性)이 강한 호남출신 인사를 서울청장 자리에 앉힐 수 있느냐는 지적질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결국 서울청장 부임 8개월 만에 본청 간세국장으로 좌천돼 옮겨 앉게 됐고, 급기야는 재무부 외청인 전매청 제조담당관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고재일 전매청장이 국세청장 기용임명계기로 길 탁 트여
장 국장을 국세청차장으로 전격 승진발탁 2인자 자리에 앉혀

장재식 국장에게는 1973년은 관운대통의 길이 열린 해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최고신임을 받고 있던 고재일 전매청장이 국세청장으로 기용·임명됐기 때문이다. 고 국세청장(3대)은 마침내 장재식 국장을 국세청 차장으로 전격 승진 · 발탁했다. 거대 국세청의 제2인자의 자리를 일거에 차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사람(장재식 국장)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바 없지만, 유능하고 실력 있는 인재를 부정이나 범법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증거도 없이 야당 중진과 가깝다는 ‘설’만으로 부당하게 처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장 국장에 대한 고 청장의 인물평가다.


호남출신 푸대접에 가슴 쓰다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장 차장은 영원한 라이벌들과의 다툼 마당인 국세청 사람들의 지적질에서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게 된다. 장 차장은 재임 6년여 기간동안 고 국세청장의 깊은 배려 속에서 공정한 인사행정 집행을 보좌하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


예를 들어, 당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즉, SKY대 우선승진 인사가 하나의 인사기준으로 집행되고 있었다.
“출신학교가 인사의 일반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장 차장의 강력한 주장이다. 이 때문에 고 청장도 자기신념을 꺾었던 적이 있었다는 얘기가 압권이다. 이로써 SKY대 우선 승진 인사기준이 시정됐다는 실화가 퍽 인상적이다.


배 행정관 혼자서 물 위 기름 뜨듯 따돌릴 텐데… 그 판이 어떤 판인데….
이 낙선 비서관 “세무서장 나가서 일해 봐…적임자라고 합의 보았다”

1965년 초 대통령비서실 일원으로 일하고 있던 배 도 청와대 행정관은 이낙선 민원비서관(훗날 초대 국세청장)의 부름을 받고 방으로 찾아갔다.


“당신 세무서장으로 나가서 일해 보라” 이 비서관의 느닷없는 명령조의 말이다.
“세무행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자신이 없는데요”라고 배 행정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부해서 알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깨끗한 세무서를 만들어 보라는 얘기요. 당신이 적임자라고 합의를 봤으니 잔소리 말고 공부해 보시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정진우 비서관(훗날 감사원 사무총장)이 한 수 거들고 나섰다.


“쉬운 일은 아닌데… 혼자 나가서 물 위에 기름 뜨듯이 따돌릴 텐데… 그 판이 어떤 판인데… 어려운 일 맡게 되는 구먼…”


당시 조세행정은 인사부정은 물론 권력자들과 연계 고리가 형성돼있었다. 돈 먹고 봐주는 세무행정 하나만이라도 고쳐보자는 청와대의 뜻 때문에 세무공무원에 대한 비리·부정 뿌리 뽑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참에 배 행정관이 시범적으로 뽑힌 것이다. 배 행정관의 인사는 청와대의 ‘맞춤인사’ 분위기와 딱 맞아 떨어졌다.


1965년 8월 드디어 용산세무서장으로 발령 받고 난 후 얼마 안돼서 조세행정특별조사반(반장 : 이낙선 청와대 비서관)이 발족됐다. 신직수 검찰총장 추천으로 정영래 검찰청 부장검사가, 이석제 감사원장 추천으로 유응의 감사원 감사관이, 그리고 파견된 경찰 쪽 인사들을 포함하여 청와대 비서관들이 주축이 돼 구성됐다.


약 6개월간 활동하다가 국세청 발족(1966.3.3)과 함께 그 업무가 끝났는데, 그 당시의 특별조사 반은 국세청 발족의 모태가 된 셈이다. 유형석(훗날 국세청 조사국장), 박영호(훗날 중부국세청장), 김유복(훗날 국세청 총무과장)등 감사원 사무관급 감사관들이 국세청으로 대거 전입되어 왔고, 그 기능과 인력이 거의 그대로 다 넘어왔기 때문이다.


전국 6대도시 주무자급 대상 전면인사 조치 칼날 ‘정조준’
김 기자, 잘 왔어요. 암행감찰이 떴대… 얼른 봉투 건네 줘

배 도 용산서장은 국세청 초대 총무과장으로 발령받았고, 그 후 3개월 쯤 지나 모종의 인사혁신 칼날 향방을 극비리에 짜고 D-day를 설정했다. 전국 6대 도시 세무서 주무자급(지금의 6급 팀장급)을 전면인사 조치한다는 방침에 혁신의 칼날 끝이 정조준 되어 있었다.


국세청 훈령 제1호(임용권의 일부 위임에 관한 건)로 주사급에 대한 지방청장 인사전보권을 본청장이 회수해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극비리 인사작업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습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예를 들면, 영등포서 법인주무가 해남서로, 소공서 법인주무가 하동서로 하향전보 인사 발령됐다. 오늘날의 이른바 ‘적폐청산 인사행정’의 철퇴나 다름없다.


당시 시내 법인주무급이면 국회의원 몇 명씩은 배후 배경(빽)인물로 뒤를 받쳐올 정도로 정치적 바람이 세무공무원 사회에 만연되었기 때문에 극비리 인사집행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의 인사혁신 칼바람을 한 바탕 치르고난 배 도 국세청 차장의 소회가 지금 이 시대에도 그렇게 합당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혜안(慧眼)이 아닌가 싶다.


제도적으로 따져보면 신고납세제가 시행되기까지는 세무공무원의 재량권 탓에 세무비리·부정 활거가 공개된 비밀처럼 횡행했다. 특히 지역담당제의 토착화가 현장세무비리를 더욱 키우는 듯 느끼게 해왔다. 비단 국세청뿐만이 아니겠지만, 유달리 부정비리가 두드러지게 감지되어온 것도 지역담당 세무공무원의 현장세무조사가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사후평가가 옳다고 생각되어진다.


1980년대 무렵, 인정과세 전성시대라 할까. 추계과세행정이 만연된 때다. 설이나 추석명절 때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떡값’ 주고 받기가 풍습인 양 온 나라를 휘저어 놓고 있을 때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 일명 촌지(寸志)가 유행처럼 성행한 시대다.


영업세 행정 즉, 대중세 행정이 추계과세 탓에 지역담당공무원의 재량권이 난무했고, 이로인해 과세일탈이 세무부정과 더불어 뒤범벅이 된 시기였다.


어느 명절 즈음, 본청 출입기자였던 나(글쓴이)는 모처럼 일선세무관서 동향을 취재할 기회가 생겼다. 해박한 세법지식을 갖춘 김 아무개 서울청 관내 E세무서 과장(사무관)을 취재대상 인물로 찍었다.


“김 기자, 잘 왔어요. 암행감찰이 떴대.”
눈이 휘둥그레진 김 과장은 캐비닛 문을 열고 두툼한 흰 봉투를 꺼내더니, 나에게 얼른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세청 비록 17편]이 11월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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