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_ 하영순 유리 벽을 월장한 햇살이 전해 주는 따뜻함을 받아 입춘대길이라 쓴다 개나리도 목련도 이 소식 전해 듣고 작은 입술 달석 달석 하겠지 미소 짓고 싶어 시베리아 말발굽 소리 천지를 진동할 때 길게 느껴지던 겨울이 어느새 꼬리 감추고 양지 바른 언덕배기 노란 아기 민들레 배시시 예쁜 눈으로 미소 지으니 대지는 벌써 가쁜 숨을 내쉰다 [詩 감상] 양현근 시인 입춘이라는 말이 이렇게 먼저 웃을 수 있다는 걸 이 시를 읽으면서 알게 된다 하영순 시인의 「입춘」은 계절을 말로 설명하지 않고, 몸으로 전해준다 유리 벽을 넘은 햇살 하나가 겨울의 경계를 가볍게 지우고, ‘입춘대길’이라는 말이 기도가 아니라 생활이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 시베리아의 말발굽 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데도 노란 민들레는 먼저 웃고 있다 봄은 이렇게 늘 성급하고, 그래서 믿음직하다 이 시의 입춘은 선언이 아니라 대지가 먼저 내쉬는, 조금 가쁜 안도의 숨이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그 겨울, 남춘천역_양현근 대합실의 나무의자는 먼지를 끌어안고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펄펄 내리는 눈은 길을 지우고 새벽을 껴입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역무원이 느릿느릿 잠을 털며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잔기침소리에 타닥, 타닥 불길이 일었다 허연 입김을 내뿜는 아저씨를 배경으로 등 굽은 노인이 급하지 않은 이정표를 뒤적거렸다 기차는 오지 않고 눈발은 풍경을 하얗게 지우는데 발목이 젖은 사람들 난로에 둘러앉아 온기를 껴입었다 외진 순대국밥집에서 며칠 눈에 파묻혀 막걸리나 몇 사발 걸쳤으면 싶은 날 대설주의보 소식이 분분하게 날리고 어느 설해목 아래 젖은 상처 부둥켜안고 한 사나흘 모진 눈발로 마저 휘날렸으면 싶은데 내내 소식은 오지 않았다 소복하게 기다림이 쌓여갈 때쯤 난로 위의 주전자는 들끓는 입김을 허공에 풀어내고 한 그릇 국밥 같은 소리가 선로 위를 달려오고 부풀어 오르는 발자국들 먼 길 가는 노인의 보따리에 창틈으로 스며든 외풍이 시린 엉덩이를 슬쩍 걸친다 초행길도 같이 기대어 가면 화르르 봄꽃도 될 거라고 몰려오는 졸음이 말없이 그 바람을 당겨 덮고 있다 울퉁불퉁한 사연을 견딘 멍 자국 가뭇한 유리창에 막 나온 국밥처럼 뜨거운 입김이 공손하게 얹
선인장_안이숲 꿈은 걸어 다니지 않는다 한자리에 서 있다 한자리에 앉아 사람을 향해 뿌리내린다 한번 찔리면 전갈보다 위험한 말 몇 년 전 생각에 찔린 상처가 다 아물지 못한 채 옆구리께 붙어 수분 없이 살아남았다 무뎌지지 않는 애인의 철없는 불만은 뾰족해요 마디를 뚝뚝 흘리며 급하게 달려온 땀방울은 뾰족해요 직장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까지 잘 마른 상처들은 모두 뾰족해요 짧게 솟아나는 것이 길게 휘어지는 것보다 날카롭고 무섭다 짧아서 응축된 독소 삶이 목말라, 쌓여 가는 갈증이 피부병처럼 돋아난다 그리움을 찌를 수 없어 스스로를 찌른다 해도 지독하게 꿈을 찔리면 푸른 심장에 독을 키우는 가시가 불쑥, 돋아나기도 한다 ― 안이숲 시집, 『요즘 입술』(실천문학사, 2023)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가시로 쓴 생존의 독백 안이숲의 「선인장」을 읽는 동안, 우리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자꾸만 숨을 고르게 됩니다. 언어가 거칠어서가 아니라, 그 시선이 너무나 투명하게 정곡을 찔러오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읽는 경험은 다 아문 줄 알았던 상처의 딱지를 무심코 건드리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그 통증은 즉각적이지만, 아픔 뒤에 찾아오는 것은 현실을
새해 첫날에 _김정수 새벽에 출근하던 아내가 사진 한 장 찍어 문자를 보내왔다 예쁘지? 저렇게 달 가까이 빛나는 별 첨 봐 환한 그믐달과 샛별이 날이 밝아오는 줄도 모르고 서로를 씻겨 주고 있다 우리는 언제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더라? 처음 같이 목욕하던 때처럼 쑥스럽게 부끄럽게 마중하다가 개밥바라기와 비너스를 생각하다가 오늘도 갈 곳 없는 날 자책하다가 고마워! 추운데 잘 다녀오라는 답장도 못 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베란다에서 달달 벌벌 떨고 있다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날카롭게 차오르는 말과 상처 잘 여미는 일 젊은 날의 약속 희미해지는 순간까지 그냥 사는 일 남들보다 일찍 늙은 직장 진작 스러져 아득하고 아뜩해도 새해 아침 하늘욕조에선 신혼 첫날밤의 어둠이 빛나고 있다 ―김정수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2020)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이 시는 새해의 첫 아침을, 거창한 다짐 대신 사진 한 장으로 엽니다. 새벽 출근길 아내가 보내온 달과 별, 그 작은 빛이 집 안의 잠까지 조용히 흔들어 깨웁니다. 환한 그믐달과 샛별이 “서로를 씻겨 주고 있다”는 문장은,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하루를 살며시 닦아 주는 일임을 맑게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온 세상이 연두빛 봄날이다. 연두의 봄날, 희망의 그날처럼 환하다. 그 환한 빛을 따라 작은 물켜들이 마음 가운데 손바닥만한 녹색 등을 켜들고 있다. 무겁고 칙칙한 계절을 건너오느라 지치고 상한 영혼들에게 재잘거리며 말을 건다. 조금 쉬엄쉬엄 가라고, 조금 어렵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중얼거린다. 지난 몇 달간 우리는 갈등과 극한의 대립이 광장에서 맞부딪치는 것을 보았다. 정치, 경제, 사회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내 편과 남의 편으로 나누고, 여기서부터 선과 악을 구분하려 든다. 계층 전반에 걸쳐 만연된 불평등의 시대에 이념의 대립까지 겹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공존이라는 소중한 가치에 대하여 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공동체가 자기 주장만을 앞세워 계층적 극단주의로 내몰리는 사회 병리적 현상들을 곳곳에서 우리는 목도한다. 해묵은 이념 논쟁과 함께 저출생과 고령화, 경제‧사회적 양극화, 세대간 갈등요인까지 폭발직전이다. 이와 같이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와중에 글로벌 관세폭탄과 신 팽창주의로 대변되는 소위 ‘트럼프 스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지난 석 달간 우리는 세계의 리더라고 하는 미국의 변심과 트럼프의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8국 가운데 우리나라 인구의 평생 기대수명이 10년 만에 19계단 뛰어올라 일본에 이은 2위를 기록했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2022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3.5년으로 나타났다. 기대수명이란 그해 태어난 아이가 생존할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수명을 의미하는데, 남성 80.5세, 여성 86.5세로 각각 예측됐다. 이와 같은 기대수명은 OECD 38국 가운데 1위인 일본(84.7년) 다음인 2위이자, OECD 국가 평균(80.5년)보다 3년 긴 것이다. 10년 전인 2010년에는 80.2년이었으니 지난 10년간 3.3년간이나 늘어난 셈이니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 역대 왕비 46명의 평균수명이 51세에 불과하고, 양반가 여성의 평균수명이 45.3세에 불과했다고 하니 참으로 격세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 및 보건수준 향상과 국민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진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2.7개, 국민 1인당 연간 외래 진료 횟수는 14.7회로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갈등(葛藤)이란 칡을 뜻하는 갈(葛)과 등나무를 뜻하는 등(藤)이 합쳐진 말로 이와 같은 갈등상태에 놓인 칡과 등나무의 경쟁은 보통 한 나무가 고사한 후에야 끝을 맺는다고 한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두 식물이 다른 나무 등을 감아올라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칡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등나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올라가는 것은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방식대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고집하다 보니 두 식물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추구하는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과 충돌하는 상태를 우리는 갈등이라고 한다. 인간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역사이다. 노동력과 기술력의 차이에 따라 생산량이 차이가 나게 마련인데, 이와 같은 생산물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인류 역사에서 투쟁의 기본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최근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갈등구조에 놓여 있다. 기존의 지역 간의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갈등,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갈등에 더해 최근에는 신·구세대 간 갈등, 젠더 간 갈등이 우리 사회의 통합을 가로막고 건전한 성장을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코로나19로 일상이 엉망진창이 된 느낌이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들이 꼬이고 엉켜서 쉽사리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소한 것들이 주는 작은 행복이 문득 그립다. 알고 보면 바이러스는 우리 인류 역사와 함께 공존해왔고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진화해온 것이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왔을 따름이다. 중세 말 유럽의 경제적 침체를 더욱 가공스럽게 만든 것은 흑사병이었다. 흑사병의 원인인 페스트균은 쥐 등의 설치류에 기생하던 쥐벼룩을 중간 숙주로 하는 박테리아로, 몽골 제국의 킵차크 칸국 유목민들이 쥐와 접촉하면서 그 감염이 시작되었다. 1347년 말 마르세유에 도착하고, 1348년경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다. 흑사병이 할퀴고 간 도시는 인구가 절반으로 줄고,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당시 유럽 인구 7000만명중 2500만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으니 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는지 짐작할 만하다. 100%에 가까운 치사율에 대한 공포는 흑사병 자체에 대한 무지로 인해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의사들이 권고한 최선의 처방은 “빨리 떠나라. 최대한 멀리 가라. 그리고 될 수 있는 한 늦게 돌아와라”였다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지난 여름 유례 없는 긴 폭염의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때 아닌 가을장마가 찾아와 곳곳을 물바다로 만들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기후는 뚜렷한 4계절 대신에 긴 여름과 짧은 겨울, 그리고 연중 고온다습한 아열대 기후로 변해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구온난화로 얘기되는 기후변화가 몰고 온 변화이다. 지구온난화는 말 그대로 지구 표면의 평균기온이 상승하는 현상이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저널 《네이처 지오사이언스》 2011년 1월호에 발표된 기후변화 관련 연구 결과에 의하면, “기후변화 추세는 앞으로 최소 1000년 동안 지속될 것이며, 서기 3000년께는 남극대륙 서부 빙상이 완전히 붕괴해 지구 해수면이 최소 4m 상승할 것이다. 또한 기후변화 추세는 앞으로 1000년 동안 중단되거나 역전되지 않으며, 북아프리카는 육지의 건조현상이 30%나 심해져 사막화를 겪게 될 것이고, 남극대륙 주변 바다는 수온이 최고 5℃나 올라 광대한 남극대륙 서부지역 빙상이 붕괴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같은 예상대로 지구의 평균기온은 최근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8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발표한 기후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살아 있는 쇠똥구리 50마리를 구해오면 5000만원을 지급합니다.’ 환경부는 지난 2017년 말 이런 입찰공고를 낸 바 있다. 쇠똥구리 한 마리에 10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어렸을 적에 흔하게 보던 쇠똥구리가 이제 돈이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생물자원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사례다. 1993년 발표된 생물다양성협약(CBD: Convention of Biological Diversity)과 이의 실천적 내용을 담은 ‘나고야 의정서’가 2010년 채택됨에 따라 생물자원 보존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나고야 의정서는 2010년 10월 일본 나고야총회에서 채택됐으며 2014년 10월 평창총회에서 발효됐다. 한국은 2017년 참여국이 됐으며, 올해까지 전세계 126개국이 비준했다. 나고야 의정서는 쉽게 말하면 ‘유전자원의 이용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의 공정하고 공평한 공유’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약속이다. 참여국은 다른 나라의 생물자원을 이용해 각종 제품을 만들 경우 그 나라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반대로 로열티를 받고 자국의 생물자원에 대한 사용을 허용할 수도 있다. 다양한 생물자원은 더 이상 누구나 이용할 수 있
(조세금융신문=양현근 시인) 지난 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발병한 지 6개월 만에 전 세계 코로나 누적 확진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1918년 400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이후 2018년의 에볼라 바이러스까지 십여 차례의 세계적인 전염병이 유행했지만 이번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은 인류역사상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의 치사율은 역대 전염병 중 가장 낮다. 그런데도 인류가 두려움에 떠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감염의 공포’ 때문이다. 사망률은 낮지만 누구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는 곧 두려움으로 연결된다. 현대 사회는 1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혼밥, 혼술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지만, 한 손에 휴대폰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불안감이 먼저 앞선다.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어떤 큰 이벤트가 있을 것 같은 중압감, 세상과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낙오될 것만 같은 불안감은 커넥트(connect)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코로나19는 기존의 세상 질서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코로나 이후 세상은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구분될 거라는 전문가
젖 _유지소 썩은, 썩어가는 사과가 젖을 물리고 있다 하루의 시간도 한 해의 시간도 막바지 능선을 타넘는 야산 언덕에서 썩은, 썩어가는 사과가 아직 푸른 힘줄이 꿈틀거리는 젖가슴을 반쯤 흙 속에 파묻고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사과가 다 떠난 사과나무에게 사과를 잊은 입, 잎들이 열꽃을 피우는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병든, 병들었다고 버림받은 사과가 저를 버린 사과나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썩었다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사과가 시린 나뭇가지 끝에서 대롱대롱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평생을 아낌없이 내어준 늙은 나무, 삭풍에 시달리는 앙상한 나뭇가지에게 젖을 물려주는 행위로 읽혀진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냐 사랑은 이처럼 온전하게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내어줄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서 이기심이나 이해타산을 벗어난 진정한 가르침을 본다.
청계 폭포 _강은교 나 늙고 늙었다 흰 머리칼 시간의 장대에 매달려 깃발처럼 펄럭인다 쭈글거리는 살은 어둠의 장식 같은 것 혀는 꿈꾸고 꿈꾼다 돌의 날개 밭을 지층들이 부활의 동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어느 밤엔가는 천둥소리 흩날리며 번개의 은빛 장대 휘두르리 나 늙고 늙었으나 네가 껴입은 내 눈썹 도도히 흐르는 부활의 동굴에서 그가 일어서는 것처럼 그렇게 일어서리 장대하게 장대하게 펄럭이리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불멸의 시간에 매달려 장대하게 펄럭거리는 폭포의 성난 목소리를 기억한다 비록 지금은 늙고 흰 머리칼 성성하여 무한낙하의 고통과 상실의 시대를 건너가지만 우레처럼 쏟아져 내려가 언젠가는 너른 땅위에 새로운 생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리라 그 빛으로 푸르게 푸르게 일어서리라
수몰 지구 _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는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우는 것 마음이 한 켠으로 쏠리는 것도 때로 지나치면 과부하가 걸리는 법이다 적당히 둑을 쌓고 넘치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하고 물길을 터줘야만 어느 한 순간 무너져 내리지 않을 터이다 예고없이 장맛비는 쏟아지고, 태풍이 몰아치는 밤이다 네게로 향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수문을 열어보지만, 언제 비가 그칠지, 언제 태풍이 끝날지 모른다 다만, 그때까지 허술한 마음의 댐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다
칠 일 _이병률 칠 일만 사랑하겠다 육 일이 되는 날 사랑을 끝내고 뒷일도 균열도 없이 까무룩 잊고만 싶다 완전히 산산이 사랑하겠다 문드러져 뼈마디만 남기고 소멸하겠다 칠 일이 되는 날 꽃나무 가지 하나 꺾어 두 눈을 찌르고 눈이 멀겠다 까맣게 먹먹하겠다 헤아릴 무엇도 남기지 않도록 지문을 없애겠다 눈이 맵도록 이불까지 유리잔까지 불살라 태울 것이며 칠 일 동안의 정확한 감정은 절벽에 안겨 떨어지리라 칠 일이 지난 새벽부터 폭우가 내리고 그 홍수 닿는 것에 숲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자격으로 첫 번째 해가 뜬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재물이 연애의 조건이 되고 재력이 장식품처럼 거래되는 세태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딱 육일간만 사랑하겠다 그리고 칠 일 째 되는 날 모든 것을 통째로 비우고 모든 것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겠다는 다짐이야말로 얼마나 처절한 모순인 것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는 다짐인지도 모른다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이 난무하는 세태에 대한 준엄한 울림이다
푸른 밤 _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까마득한 밤을 숱한 불면으로 보내고 무수하게 많은 길을 미친 듯이 걸어 다녀보지만 매양 길어 올린 것은 그대에게 가는 별빛일 따름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수많은 길을 걷고 또 걸어보지만 나의 생애는 네게로 가는 한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우리의 만남은 모든 것이 끝난 ‘검은 밤’이 아니라 아직 푸른 꿈이 있는 ‘푸른 밤’이다.
나뭇가지 _곽해룡 새가 날아가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새가 앉아서 울 때는 꿈쩍도 않더니 새가 떠나자 혼자서 오랫동안 흔들린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뭐든지 가까이 있을 때는 소중한 줄 모르는 법이다 떠나고 나서 아쉽고 보내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어디 한 두가지랴 나뭇가지의 작은 흔들림에서 삶의 지혜와 세상이치를 배운다 새 한 마리가 우리에게 주고 간 선물이다
결근사유_복효근 목련꽃 터지는 소리에 아아, 나는 아파라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에 花르르 피어나는 봄꽃들로 부산하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할 것 없이 순서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봄꽃들로 칙칙한 세상이 모처럼 환하다 발칙하게 터지는 목련의 하얀 미소에 어느 누군들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순백의 저고리가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 결근사유가 되고도 남을 법 하다
스테이플러_윤성택 기차는 속력을 내면서 무게의 심지를 박는다, 덜컹덜컹 스테이플러가 가라앉았다 떠오른다 입 벌린 어둠 속, 구부러진 철침마냥 팔짱을 낀 승객들 저마다 까칠한 영혼의 뒷면이다 한 생이 그냥 스쳐가고 기약 없이 또 한 생이 넘겨지고 아득한 여백의 차창에 몇 겹씩 겹쳐지는 전생의 얼굴들 철컥거리는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촘촘한 침목을 박으며 레일이 뻗어간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구부러진 철길이 허리를 펴는 동안 승객들은 졸고 있거나 혹은 창밖 풍경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여백의 차창 너머 지나 온 반생이 아득하고, 기약없이 넘겨지는 나머지 여백의 빈 창, 오늘도 무심한 기차는 단단한 스테이플러를 박으며 생의 한 칸을 건너 다른 칸으로 제 무게를 옮겨심는다
당신_김륭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神이다 詩 감상_양현근 시인 사랑은 모든 것을 품는 우주다. 사랑이 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주고도 아깝지 않고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늘 허기가 지는 게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한 당신은 내게 신이다. 그러나 자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