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박정규 기자)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어느 작가는 이 속담을 ‘독서는 머리로 떠나는 여행이고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고 풀었다. 나는 몸으로 하는 독서 가운데 으뜸은 단연 ‘자전거 해외여행’이라고 꼽는다.
자전거 해외여행은 도보여행이나 자동차 여행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시공간을 보여주며 오지의 정치, 사회, 경제, 역사, 문화 등을 체험 가능토록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자전거 해외여행에 매료된 것은 3년 전부터다. 베트남 북부 지역 오지 2000km를 탐험하는 자전거여행 노막 패스(NOMACH PATH: Northern Majesty Challenge) 프로그램(캠프비엣/투어코치)을 개발해 운영하고 있는 갑장 황상현 코치를 만나면서부터다. 북베트남 소수민족 마을 오지들을 찾아 자전거로 탐험하는 황상현 코치는 100세 시대 반백을 넘긴 60세 청년이다.
그가 최근 ‘푸르엉(PU LUONG) E-바이크 여행 코스’ 개발에 나섰다. 푸르엉은 베트남 북부 타인호아(Thanh Hóa)성에 위치한 자연보호구역으로 계단식 논들이 장관을 이뤄 ‘자연이 예술을 만드는 곳’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그곳에는 타이족과 므엉족이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다.
‘마이쩌우’에서 푸르엉으로 DT 432도로를 달리다
‘푸르엉’이라는 지명은 타이족 언어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푸르엉은 하노이(Hà Nội)에서 약 187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황 코치는 푸르엉으로 가기 전 타이족의 마을 마이쩌우(Mai Châu)에 도착했다. 마이쩌우는 하노이에서 약 140km 떨어져 있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와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깊은 산골 오지 마을이다. 도시에서 그를 따라온 숨가쁜 문명과 빠른 속도의 디지털 시간은 어느새 멈추고 아날로그 시간이 ‘감사함’으로 펼쳐졌다.
이튿날 아침, 그는 MTB 자전거에 올라타 푸르엉을 향했다. 마이쩌우에서 푸르엉까지는 약 50km 거리.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CT02 길은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는 정돈된 길이었고, DT 432길은 험하고 업다운이 심한, 그러나 매우 매력적인 길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52km의 DT 432길을 택했다. 마이쩌우에 올 때마다 꼭 한 번 달려보고 싶었던 길이었다. 출발 직후부터 약 12km의 업힐(오르막길)이 기다렸다. 페달을 밟는 그의 굵은 힘줄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산 사이를 타고 흐르는 계곡 바람이 식혀 주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가파른 업힐 구간을 지나니 가벼운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완만한 구간이 나타났다. 그의 몸은 익숙한 듯 자전거를 타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잡념들은 사라지고 멍한 상태로 페달질만 반복할 뿐이었다.
황 코치에게 지금은 모든 것이 ‘감사함’이다. 오늘 여정의 마지막 푸르엉까지 약 10km를 남겨둔 지점에서 가파른 다운힐(내리막길)이 펼쳐졌다. 다운힐은 힘들었던 업힐에 대한 보상이다. 브레이크를 쥔 검지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면서 힘을 뺀 어깨로 가볍게 달렸다. 산 아래 펼쳐지는 푸르엉 계곡의 풍경이 서서히 한눈에 들어왔다.
고도 약 600m에 위치한 푸르엉은 자연보호구역이다. 사람이 가장 살기 좋은 고도라 일컬어지는 이곳은 타이족과 므엉족이 오래도록 삶을 이어온 곳이다. 황 코치는 푸르엉의 가장 중심 마을인 돈 마을(Bản Đôn)에 숙소를 정했다. 계단식 논이 가장 잘 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방을 택했다. 멍 때리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명상이 되는 곳이다.
자연이 예술을 만드는 곳 푸르엉 ‘돈 마을’
돈 마을에는 80여 가구, 28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곳 작은 소수민족 마을의 아침은 안개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너머로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전통 가옥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을 길을 걷는 아이들, 바구니를 이고 진 여인들, 그리고 계단식 논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소와 농부…. 워낭 소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여지는 풍경 하나 하나가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이 예술을 만드는 곳이라고 하나 보다. 베트남 북부 손닿지 않은 마지막 청정 오지라 불리는 푸르엉은 자전거를 탄 황 코치 조차도 그림 속 인물로 그려 넣었다. 그가 푸르엉에서 이른 아침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코므엉 마을(Bản Kho Mường)이었다.
자연보호구역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이곳은 백타이족(Thái Trắng)이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온 마을이다. 기둥 위에 지어진 전통 가옥 아래에는 돼지와 들소가 머물고, 그 위에서는 가족들이 일상을 이어간다. 소박한 집들이 계곡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중심을 지나 산으로 둘러싸인 푸른 벼 논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침묵 속에 잠든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코므엉의 명물 박쥐동굴(hang Dơi Kho Mường)이다. 그는 반돈 마을에서 출발해 코므엉 마을을 탐방한
후, 반우오이(Bản Ươi)와 포도안(Phố Đoà)을 잇는 산길을 따라 자전거로 돌아왔다. 자연과 삶이 가장 아름답게 교차하는 길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간 곳은 히에우 마을(Bản Hiêu). 반돈 마을에서 약 10km 떨어져 있다. 히에우 계곡은 석회질이 풍부한 물줄기로 나무뿌리를 서서히 석회화시켜 마치 돌처럼 굳게 만들었다.
마을 깊숙한 숲속에는 히에우 폭포(Thác Hiêu)가 있다. 맑은 물이 떨어지는 폭포 아래에서는 약 1m 깊이 정도의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 있어 아이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그 물줄기를 따라 아래에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우거진 숲속에서는 새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교향곡이었다.
포도안 시장, 소수민족 삶이 모여드는 곳
포도안 시장(Chợ Phố Đoàn)은 생기가 넘치는 공간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진 전통시장으로 킨족(Kinh), 므엉족(Muong)과 타이족(Thai), 인근 산악 지역 주민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교환하고 소통한다. 지금도 화폐 없이 물물교환이 가능한 곳이다. 시장은 오전 6시부터 시작하여 오전 11시까지 열린다고 하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시장이 끝난 시간이라 아쉬움이 컸다.
황 코치는 푸르엉의 가장 깊은 곳인 손–바–무어이(Sơn–Bá–Mười)를 지났다.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이며, 세 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이곳은 ‘낙원 속의 낙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반돈 마을에서 약 15km 떨어진 이곳은 험한 고갯길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다.
복숭아꽃이 해마다 두 번 피는 독특한 기후, 석회암 산악 생태계, 수천 년 된 원시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은 푸르엉의 마지막 보루다. 황 코치는 그곳에서 걷고 멈추고 담았다. 잠시 잊고 있었던 스스로의 내면도 다시 꺼내 돌이켜 보았다. 소수민족 사람들의 미소, 안개 낀 논,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산 너머로 지는 해…. 그 모든 순간이 명화가 되었다.
‘내가 먹은 음식이 내 몸을 만들고 내가 읽은 책이 내 마음을 만든다.’ _작가 유시민
맞다. 두바퀴 오지탐험 자전거여행에서 먹게 되는 소수민족 전통의 토속 음식들과 안장에 앉아 달리면서 몸으로 읽는 독서…. 육(肉)과 영(靈)을 새롭게 하는 양식 (糧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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