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

[김대중 골프교실⑩] 캐디는 언제부터 있었나? <上>

<연재순서>

 

1. 캐디는 무슨 일을 할까?

2. 그래서 얼마나 벌까?

3. 골프장에서 캐디가 정말 필요한 이유?

4. 왜 캐디가 부족할까?

5. 캐디에도 종류가 있다.

6. 어떻게 하면 캐디가 될까?

7. 캐디교육의 새로운 트랜드(Trend): 인턴 캐디 제도

8. R&A 골프 룰(Rule)로 본 캐디

9. 캐디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골프 룰(Rule)

10. 캐디는 언제부터 있었나?

11. 역사적으로 캐디의 역할은 어떻게 바뀌었나?

12. 최초의 캐디는 누구일까?

13. 가장 유명한 캐디는 누구일까?

14. 캐디 고용보험 시행이 골프장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15. 앞으로 캐디가 나아갈 방향은?

 

(조세금융신문=김대중 골프앤 공동대표) 기록으로 본다면,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이지만 캐디라는 말의 어원은 프랑스다. 물론 그 중심에는 스코틀랜드가 있다.

 

프랑스어 '르 카데(le cadet)'는 소년 또는 한 집안의 막내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가면서 영어에 '커뎃(cadet)'이라는 단어가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때가 1610년이며, 1634년부터 짧게 ‘캐디(caddie 또는 cadie)로 기록된다. 참고로, 영어 ‘cadet’은 경찰이나 군대의 간부(사관) 후보생이다.

 

‘카데’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넘어오는 계기는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1587)라는 최초의 여성 골퍼 때문이다.

 

아래 [그림 1]은 1905년에 그려진 그림으로 세인트 앤드류스 링크스(St. Andrews Links)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메리 여왕의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이 당시에는 골프 코스의 개념이 없고 골프를 즐기는 장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림 1]에서 어드레스 중인 메리 여왕 옆에 ‘카데들’이 골프클럽을 들고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당시에는 골프백이 없었기 때문에 골프클럽 여러 개를 캐디가 들고 다녀야 했다.

 

 

캐디의 역사는 메리 여왕과 함께 하기 때문에 메리 여왕에 대해서 조금은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일명 비운의 여왕 메리에 관한 이야기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거기에 프랑스 왕위 계승권까지 지닌 채 너무나도 화려하게 태어난 매리는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본 채 생후 6일만에 아버지 제임스 5세(James Ⅴ, 1512-1542)가 외숙부인 잉글랜드 왕 핸리 8세 (Henry VIII, 1491-1547)와 전쟁 중에 사망했다. 

 

생후 9개월째에 스코틀랜드 왕위를 계승해서 여왕이 되었고, 6살에 프랑스 왕자와 약혼하고 프랑스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다.

 

프랑스 왕비가 된 지 1년만에 남편인 프랑스의 왕 프랑스아 2세(François II, 1544-1560)가 죽은 후 1561년 19살에 스코틀랜드를 떠난 지 13년만에 돌아왔다.

 

메리는 선대 왕들처럼 거의 매일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그림 2] 영화 포스터처럼 키 180센치미터 장신에 얼굴은 작고 목은 가늘고 길었으며, 머리카락은 적갈색이었다고 한다.

 

그녀로 인해서 유럽의 미의 기준이 바뀌었을 정도로 사교계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메리는 왕족으로서 라틴어, 그리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그 당시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 

 

지성과 미모 거기에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적통의 왕족이었다. 이게 불행의 씨앗이라고 힘이 없는 여왕으로서 죽을 때까지 왕위 계승권 때문에 화려한 삶보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 당시 프랑스에는 스코틀랜드 스타일의 골프가 생소했으며, 골프장이 없는 프랑스에서 골프를 즐기기 위해서 풀이 잔뜩 있는 넓은 벌판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는 메리가 프랑스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고 신기한 존재였을 것이고, 젊은 메리 여왕을 경호하기 위해서 젊은 카데들이 무기대신 골프클럽을 들고 경호를 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군대의 간부후보생(cadet)이 왕족 골퍼들을 위해서 골프클럽을 들고 다녔다고 하는데, 역사적 사실로 봤을 때는 메리 이전에 프랑스 골퍼가 없었기 때문에 메리의 경호를 담당했던 카데들이 메리 이후에도 골프를 치는 왕족들을 경호하면서 골프클럽을 들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메리 여왕이 스코틀랜드로 돌아갔을 때 매리 여왕을 경호하던 프랑스 군 간부후보생(cadet)들도 같이 건너오게 되었고 그 카데들이 여전히 스코틀랜드에서 칼 대신 골프클럽을 들었던 것이 그 당시 캐디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당시 유럽은 왕족들 간의 혼맥이 매우 복잡하였으며, 메리 여왕의 경우도 할머니는 잉글랜드 왕족,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왕, 어머니는 프랑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스페인 왕조에 기반을 두고 있는 훗날 부르봉 왕가 출신으로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을 것이고,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때도 당연하게 그의 보디가드들(카데)의 호위를 받았을 것이다.

 

1565년 23살 메리는 3살 연하이자 복잡한 족친관계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Lord Darnley, Henry Stuart, Duke of Albany, 1545-1567)와 다시 결혼한다.

 

왕위를 탐내는 단리 경으로 인해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이 결혼은 후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공동 군주가 되는 제임스 1세라는 결실만을 남기고, 1567년 단리는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된다. 비명횡사한 단리 경이 죽은 후 3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메리는 당당하게 골프장에 갔고,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이 하나의 이벤트를 계기로 첫번째 민심을 잃게 된다.

 

이어서 "캐디는 언제부터 있었나? <下>편"이 계속됩니다.

 

[프로필] 김대중

• 2019년~현재: (주)골프앤(www.golf-n.co.kr) 공동대표

• 2010년~2019년: 스프랭캠프 대표

• 건국대학교 국제무역학과 박사과정 수료

•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 일본 국립 츠쿠바대학(筑波大学)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 前) 한국무역협회, 홍익대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 강사

• 저서: 인터넷마케팅길라잡이, 인터넷창업길라잡이, 인터넷무역실무 등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배너

전문가 코너

더보기



[인터뷰]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 권역별 회원 교육에 초점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임채수 서울지방세무사회장은 지난해 6월 총회 선임으로 회장직을 맡은 후 이제 취임 1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 회장은 회원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지방회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서 서울 전역을 권역별로 구분해 인근 지역세무사회를 묶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어 회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 6월에 치러질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선거 이전에 관련 규정 개정으로 임기를 조정해 본회인 한국세무사회는 물론 다른 모든 지방세무사회와 임기를 맞춰야 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물론 임원의 임기 조정을 위해서는 규정 개정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임기 조정이라는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 주목받고 있다. 임채수 회장을 만나 지난 임기 중의 성과와 함께 앞으로 서울지방세무사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들어봤다. Q. 회장님께서 국세청과 세무사로서의 길을 걸어오셨고 지난 1년 동안 서울지방세무사회장으로서 활약하셨는데 지금까지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죠. A. 저는 1957년에 경남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듯이 저도 가난한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때의 배고픈 기억에 지금도 밥을 남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