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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대중 골프교실⑫] 최초의 캐디는 누구일까? <下>

<연재순서>

 

1. 캐디는 무슨 일을 할까?

2. 그래서 얼마나 벌까?

3. 골프장에서 캐디가 정말 필요한 이유?

4. 왜 캐디가 부족할까?

5. 캐디에도 종류가 있다.

6. 어떻게 하면 캐디가 될까?

7. 캐디교육의 새로운 트랜드(Trend): 인턴 캐디 제도

8. R&A 골프 룰(Rule)로 본 캐디

9. 캐디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골프 룰(Rule)

10. 캐디는 언제부터 있었나?

11. 역사적으로 캐디의 역할은 어떻게 바뀌었나?

12. 최초의 캐디는 누구일까?

13. 가장 유명한 캐디는 누구일까?

14. 캐디 고용보험 시행이 골프장업계에 미치는 영향은?

15. 앞으로 캐디가 나아갈 방향은?

 

(조세금융신문=김대중 골프앤 공동대표) 

 

미국 최초의 캐디

 

그렇다면 최초로 미국에서 캐디 생활을 했던 사람의 이름은 존재할까? 애석하게도 기록이 없다. 골프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던 19세기 말에 동시 다발적으로 미국 전역에서 골퍼들이 증가했음을 감안하면 수백, 수천의 캐디 중 누가 먼저인지를 규정짓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순이다.

 

골프의 역사를 바꾼 가장 커다란 사건은 1913년 US Open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골프가 대중화되었으며, 골프가 유럽 특히 영국 중심에서 미국으로 옮겨간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영국의 자존심 해리 바든(Harry Vardon, 1870-1937)과 캐디 출신이며 아마츄어 골퍼인 미국의 프란시스 위멧(Francis Ouimet, 1893-1967)과의 연장승부를 벌인 경기로 2005년 ‘내 생애 최고의 경기(The Greatest Game Ever Played)’라는 이름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이 경기에서 프란시스 위멧의 캐디가 바로 [그림 2]의 에디 로워리(Eddie Edgar Lowery, 1902-1984)라는 10살 소년이다. 로워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노련한 캐디 역할을 했으며, 위멧의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로워리는 미국에서 열린 공식 골프 경기 기록에 남겨진 최초의 캐디[i]로 알려져 있고, 후에 백만장자가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난한 환경에 태어난 해리 바든도 10대 때 캐디를 했었고, 프란시스 위멧 또한 가난한 이주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메사츄세츠주 브룩클린의 더 컨츄리 클럽(The Country Club)의 17번 홀 건너편에서 살았기 때문에 11살부터 캐디를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최초의 캐디

 

한국 최초의 캐디는 누구일까? 조선골프소사에 의하면, 한국에 골프가 처음 전해진 것은 1900년으로 고종 황실의 고문으로 온 영국인들이 함경남도 원산항 세관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놓고 골프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1921년 조선철도국 산하 조선호텔부속시설로 효창원 내 9홀 규모의 골프코스로 개장하였으나 코스가 협소해서, 코스 밖으로 날아간 볼로 인해 골퍼와 행인 간에 다툼이 잦았다고 하며, 4년 뒤 1924년 청량리로 이전하여 16홀 코스를 개장하고 경성골프클럽을 설립하였다.

 

1930년에 한국 최초 정규 18홀이 지금의 어린이대공원 자리인 군자리에 서울컨트리클럽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골프와 왕릉에는 많은 연관관계가 있다.

 

용산구에 있던 효창원이 효창원 골프장(1921)으로, 성북구에 있던 의릉이 청량리 골프장(1924)으로 광진구 유릉이 군자리 골프장(1929), 고양시에 있던 서삼릉이 한양골프장(1964), 뉴코리아골프장(1966)으로 노원구에 있던 태강릉이 태릉골프장(1966)이 되었다.

 

1921년 효창원골프장에서 클럽을 들고 다니던 소년들이 한국 캐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영국과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골프계의 전설들도 캐디 출신들이 많다.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오픈에서 우승한 연덕춘(1916-2004), 그의 제자였던 한장상(1941- ), 한국프로골프협회 최다승인 43승을 기록한 최상호(1955- ), 박세리 이전 한국프로골프의 선구자였던 구옥희(1956-2013)도 캐디 출신이다.

 

기록으로 보면 한국최초의 캐디는 연덕춘으로 그의 나이 14살이던 1930년에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의 캐디 보조로 시작하여 클럽을 매고 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골프를 배워 한국최초의 프로골퍼 1위가 되었다.

 

골퍼가 아닌 캐디로서 골프장에서 정식으로 모집하여 국내 캐디 1호가 된 사람은 최갑윤이다. 그는 15살 중학생이던 1957년에 미군들이 골프 연습을 하는 곳에서 볼을 주워 주는 대가로 팁을 받았다고 하며, 1960년에 개장한 서울 C.C.의 정직원이 되었고, 1963년에 정식 캐디가 되었다.

 

1960년대 골프장이 증가하면서 캐디의 수요가 점차 늘게 되면서, 여자 캐디들이 등장하였고, 그 후 한국에서는 캐디가 여성들의 직업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다음에는 “가장 유명한 캐디는 누구일까?”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프로필] 김대중

• 2019년~현재: (주)골프앤(www.golf-n.co.kr) 공동대표

• 2010년~2019년: 스프랭캠프 대표

• 건국대학교 국제무역학과 박사과정 수료

•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 일본 국립 츠쿠바대학(筑波大学)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 前) 한국무역협회, 홍익대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 강사

• 저서: 인터넷마케팅길라잡이, 인터넷창업길라잡이, 인터넷무역실무 등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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