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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김대중의 골프히스토리] 위대한 골퍼, 톰(Grand Old Man of Golf) ①

 

(조세금융신문=김대중 골프앤파트너 대표) 톰의 아버지 존(John)은 방직공이다. 그래서 [그림1]과 같은 방직공의 집(Weaver’s Cottage)에서 태어났다, 톰이 태어난 곳을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빈센트 반 고호가 1884년에 그린 A Weaver’s Cottage를 참고하면 톰의 어려운 성장 환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집은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장 바로 근처였고, 세인트 앤드류스는 아주 가난한 동네였다. 과거의 영광만이 남아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만, 골프장만이 과거 영광을 대변해 주고 있는 도시가 바로 세인트 앤드류스였다.

 

톰의 아버지 존은 마을에서 유명한 방직공이지만, 존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골프장캐디를 했었고, 골퍼이기도 하다. 당시에 방직공은 아주 유망한 직업이었기 때문에 톰도 아버지를 따라 방직공이 되었을 수도 있었지만, 골프를 아주 어린 나이부터 자연스럽게 접해 온 톰에게 골프장이 놀이터이자, 골프 자체가 놀이였다.

 

세인트앤드류스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골프 클럽을 잡았고, 톰은 5살에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6살 무렵부터 골프를 치고 놀았다고 한다. 톰도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젠틀맨들의 클럽을 들고 다니는 캐디를 하게 된다.

 

스승이자 친구인 앨런

 

14살(1835)에 그의 운명이 골프로 향하게 되는 만남이 시작된다. 바로 챔피언 골퍼 앨런 로버슨이 세인트 앤드류스 링크스에서 운영하는 공방의 도제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앨런과 톰은 나이 차가 6살밖에 나지 않는다. 시작은 앨런에게 캐디, 페더리 볼 제작, 골프 클럽 제작, 골프 등을 배운 제자이지만, 20살이 넘어가면서 그의 골프 실력이 일취월장하며, 앨런의 최전성기 골프 파트너가 된다.

 

앨런은 톰에게 골프를 가르쳐준 스승이다. 볼 컨트롤을 쉽게 할 수 있는 그립을 잡는 방법, 바람에 세기에 따라 샷을 높게 치거나 낮게 치는 방법, 샌드 벙커에서 탈출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저녁 10시가 넘어가도 골프 경기를 했다.

 

핸디를 주면서 가르쳤는데, 앨런은 돈 내기를 하지 않으면 골프가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꼭 돈 내기를 했다. 돈을 잃어도 톰은 공방이 아닌 코스에서 앨런과 함께 플레이 하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톰의 나이 16살부터는 세인트 앤드류스의 젠틀맨 골퍼 대부분을 이길 수 있었다.

 

당시 골프 경기는 토너먼트 대회 대신에 챌린지 매치(Challenge Match)가 많았는데, 두 명이 한 팀이 되어 경기하는 포썸(Foursum) 매치 플레이1)로 치뤄졌다. 기존 골프 볼보다 1/5이 싼 새로운 볼이 등장하면서 골프가 대중화되기 시작했으며, 1852년 세인트 앤드류스까지 기차가 놓이게 되면서 챌린지 매치를 구경하기 위해서 영국 전역에서 세인트 앤드류스에 갤러리들이 몰려들게 만들었다.

 

1) 포썸 매치 플레이는 2명이 한 팀이 되어 한 개의 볼로 경기하는 것으로 매 홀마다 승자를 결정하고 최종 합계로 이긴 홀이 많은 팀이 이기는 경기 방식이다.

 

이 때 챔피언 골퍼는 한 명, 바로 앨런이었고, 앨런 다음으로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2번째로 골프를 잘하는 프로가 바로 톰이다.

 

이 둘의 관계는 1840년대 톰이 20대가 되면서 더욱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게 된다. 골프 장비 제작에 있어서 스승과 제자 관계였고, 앨런으로부터 골프를 배우면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불패의 팀을 만들게 된다. 포썸 파트너이자 친구 같은 사이가 된 것이다. 톰은 1842년 골프 경기로 돈을 벌게 되면서, 비로소 골퍼로서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1830년에 세인트 앤드류스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영웅이 등장한다. 바로 휴 라이온 플레이페어 경(Sir Hugh Lyon Playfair)이다. 과거의 영광만이 가득했던 세인트 앤드류스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기 돈을 투자해서 사람들이 여행 와서 골프를 칠 수 있도록 골프 코스를 아름답게 만들었으며,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도 만들었다.

 

톰이 태어날 당시만 해도 가난했던 동네가 플레이페어 경의 투자가 시작되면서 또 다른 투자를 이끌어냈고, 이를 통해 많은 돈들이 몰려 들고, 계속해서 투자가 일어나면서 점차 부자 동네로 바뀌게 된다. 1852년 세인트 앤드류스에 기차가 생기면서 영국 전역에서 온 골프 여행객들로 붐비면서 자연스럽게 더 많은 캐디들이 필요한 동네로 변모하게 된다. 이제 돈이 넘쳐나는 동네가 된 것이다.

 

물론 골프 경기에 대한 베팅 금액도 커지게 된다. 돈이 골프 시장에 들어오면서, 톰에게는 돈을 벌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찾아오고, 앨런과 톰의 원 팀은 골프 비즈니스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최고의 흥행 카드였고, 그 당시 젠틀맨 사이에서 유행이었던 챌린지 매치가 성행하게 되면서 1840년대 세인트 앤드류스가 다시 부흥기를 갖게 되면서 외부로부터 많은 젠틀맨들을 불러 모으게 되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게 된다. 물론 골프의 대중화에 철도가 굉장히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것보다 골프 자체의 짜릿한 매력으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인기있는 스포츠가 된다.

 

참고로 챌린지 매치는 단순하게 골프 경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걸린 프로 경기였다. 프로선수를 응원하는 후원자들이 있었고, 관중들끼리 서로 내기 돈을 걸고, 선수들을 응원하는 경기로 자리잡게 되며, 이러한 프로 선수들 중에 톰은 처음에는 앨런의 도움으로 프로 골퍼가 되지만, 점차 자신의 골프 커리어를 만들어가게 된다.

 

1843년 세인트 앤드류스를 대표하는 앨런이 머슬버러의 신예 윌리 던(Willie Dunn)의 도전을 받고 20라운드 챌린지 매치에서 이기면서 챔피언 골퍼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 경기에 엄청난 관중이 몰렸으며, 이 중 많은 관중들이 누가 이길지 내기에 돈을 걸었다고 한다. 1840년대 앨런과 톰은 엄청난 챌린지 매치 팀으로 ‘천하무적(invincibles)’으로 불렸다고 한다.

 

물론 챌린지 매치에는 스폰서들이 있어서 승자에게 엄청난 금액의 돈을 받을 수 있었다. 1849년 앨런과 톰 팀과 윌리와 제이미 던 형제 팀간의 챌린지 매치에는 그 당시 400파운드(현재로 환산하면 약 1억원)의 상금을 걸고 시합을 했었고, 보통 챌린지 매치에는 약 100파운드 정도의 상금이 걸렸다고 한다.2)

 

2) [출처=agsgolfvacations.com]

 

챌린지 매치가 열리면 전국 신문에 뉴스로 소개될 정도로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그림2]은 1855년 톰과 같은 시대 활약했던 선수들 모습이다. 앞 줄에 무릎에 손을 얹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퍼팅을 쳐다보고 있는 최강 앨런과 앨런 바로 뒤에 서 있는 파트너 톰, 그리고 톰의 왼쪽에 있는 톰의 영원한 라이벌 윌리 파크 시니어(Willie Park Sr.), 퍼팅 중인 앨런의 라이벌 윌리 던(Willie Dunn)이 보인다.

 

 

톰은 1848년 새로운 기술에 대한 시각 차이로 인해 앨런과 결별하고 1851년부터 프레스트윅

(Prestwick)에서 새로운 골프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앨런의 그림자를 벗어나서 새로운 톰 모리스 왕국을 만든 계기가 바로 프레스트윅으로 이전이다.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톰, 그의 가족과 지인들이 전부 모여 있던 세인트 앤드류스를 떠나 아무 것도 없던 프레스트윅으로의 이전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세인트 앤드류스에서는 항상 앨런 다음이 그의 위치였고, 더욱이 앨런과 좋지 못한 관계로 헤어지게 됨으로써, 그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후원자인 제임스 오길비 페어리(James Ogilvie Fairlie3)의 요청으로 프레스트윅으로 옮겨가게 된다.4)

 

3) 제임스 오길비 페어리(1809-1870)는 스코틀랜드 아마츄어 골퍼이며 엄청난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지주로서, 올드 톰 모리스의 멘토다. 그가 모리스를 얼마나 좋아했는 지는 그의 아들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아들 이름이 바로 제임스 오길비 페어리 모리스(James Ogilvy Fairlie Morris, 1856-1905, 스코틀랜드 프로 골퍼)다. 1851년 프레스트윅 골프 클럽 창립 멤버이며, 1860년 최초로 디 오픈을 조직한 사람 중 한 명이다.

4) [출처=theopen.com]

 

톰의 나이 30세인 1851년 세인트 앤드류스에서 낳은 장남(?) 후에 골프계의 신성이 될 태어난지 두 달된 토미와 와이프 아그네스(Nancy Agnes)와 함께 프레스트윅으로 이주한다. 프레스트윅은 이제 건설되고 있는 골프장으로 톰이 그린 키퍼(Green Keeper)와 클럽 관리자, 볼 제작자, 클럽 제작자 역할을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앨런과 함께가 아닌 독자적으로 12홀 코스를 디자인했다. 이 코스 디자인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전체에 코스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된다.

 

톰이 프레스트윅에서 코스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의 후원자인 제임스가 당시 로얄 앤 앤션트 골프 클럽(Royal and Ancient Golf Club)의 캡틴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원으로 세인트 앤드류스, 머슬베러, 프레스트윅에 걸쳐서 벌어진 챌린지 매치에 계속해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프로필] 김대중 골프앤 공동대표

•(현)캐디평생교육원 원장
•(현)골프앤포스트 발행인/편집인
•(전)한국무역협회, 가톨릭관동대 강사
•일본 쓰쿠바대학 경영정책과 석사과정 특별연구생 / 미국 UC Berkeley Extension 수료
•저서 《캐디학개론》, 《캐디가알아야할모든것》, 《인터넷마케팅길라잡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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