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인공지능(AI) 열풍이 견인하던 글로벌 증시 랠리가 조정 국면에 들어섰다.
AI 대표주들의 밸류에이션 부담이 부각되면서 투자심리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고평가 논란이 비트코인 등 위험자산으로 번지며 시장 전체가 불안정한 흐름을 보이는 중이다.
시장 전반에서 그간 ‘AI 프리미엄’이 다소 과도했다는 경계 신호가 본격화되고 있는 셈이다.
◇ 뉴욕 증시 급락…밸류에이션 고점 경계 확산
4일(현지시간) 뉴욕 증시가 기술주 중심으로 일제히 하락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가 1.17%, 나스닥이 2.04% 떨어졌고 주요 AI 관련 종목인 엔비디아(-3.9%), 테슬라(-5.1%), 팰런티어(-7.9%) 등이 동반 급락했다.
특히 팰런티어는 3분기 매출(11억8000만 달러)과 주당순이익(21센트) 모두 시장 예상치를 웃돌았음에도, 이미 높아진 기대치를 충족하진 못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여기에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의 실제 인물인 헤지펀드 매니저 마이클 버리가 팰런티어와 엔비디아에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취한 사실이 알려지며 불안심리를 자극했다.
마이클 버리는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AI와 기술기업들의 주가에 거품이 끼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또한 캐피털그룹의 마이크 기틀린 CEO 역시 “기업 실적은 탄탄하지만 문제는 밸류에이션”이라며 “지금의 주가는 싸거나 공정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미국 투자은행 BMO캐피털 마켓도 “주가가 역사적 고점 부근에서 조정의 명분을 쌓고 있다”면서 “최근 랠리의 폭이 지나치게 좁아졌다”고 분석했다.
◇ AI 열풍 식으며 아시아 증시도 흔들
조정 국면은 아시아 시장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5일 한국 코스피 지수는 장중 3900선이 무너졌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6~7% 떨어졌다.
일본 닛케이225 지수도 6거래일 만에 5만선을 내줬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고 금리 방향이 불확실한 가운데 외국인들이 주식을 팔아치우면서 시장이 흔들리고 있다. 돈의 흐름(수급)과 환율, 투자심리가 동시에 나빠지는 전형적인 조정 장세다.
환율은 빠르게 뛰었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장중 1446원까지 오르며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미국 금리 경로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험회피 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 가상자산까지 흔드는 ‘AI 피로감’
AI 투자 열기가 식어가면서 조정 분위기는 가상화폐 시장으로도 옮겨가고 있다.
비트코인은 지난 6월 이후 처음으로 10만달러 선이 붕괴되며 9만9000달러대까지 밀렸다. 이더리움도 12% 가까이 떨어지며 3100달러대에서 거래됐다.
미국 경제방송 CNBC는 이에 대해 “AI가 주도한 증시 랠리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면서 기술주 투자자들이 가상화폐를 포함한 위험자산 전반에서 자금을 회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 경제매체 블룸버그는 “투기적 모멘텀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비트코인이 이번에도 주식시장과 보조를 맞춰 하락하고 있는 것”이라며 “AI 열풍이 꺼지면서 비트코인 또한 투기 자금 이탈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분석했다.
미국 뉴욕 월가에서는 AI 투자 열기가 지나치게 빠르게 올랐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AI가 시장의 성장을 견인한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 상승 속도가 기업의 실적 개선이나 수익 창출 능력을 앞지르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에 따라 주요 투자은행과 자산운용사들은 AI 관련주에 대한 기대치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낮추고, 실적 기반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골드만삭스 데이비드 솔로몬 CEO는 “향후 12~24개월 내 주식시장이 10~20%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시장이 상승한 뒤에는 되돌림이 오고, 투자자가 다시 재평가하는 시기가 오게 된다”고 말했다.
모건스탠리 테드 픽 CEO도 “거시 충격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의 10~15% 조정은 오히려 건강한 신호”라고 언급했다.
이들의 발언은 최근의 하락세를 단순한 주가 급락으로 보기보다는, 과열된 시장이 체질을 다지는 조정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 “버블은 아직”…AI 기업 체력 여전 시각도
국내 전문가 중 일부는 AI 버블론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배재규 한국투자신탁운용 사장은 “AI 버블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며 “위기가 올 것 같으니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에 머무른다는 전략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주가수익비율(PER)은 20~30배 수준으로 버블은 아니라고 본다”며 “설사 버블이 오더라도 그 단계에서 망하지 않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철도와 인터넷 투자 붐이 꺼질 때도 공급망 기업은 충격이 작았다. AI 시대에도 반도체처럼 기반을 공급하는 기업은 살아남는다”면서 AI 생태계를 구성하는 인프라 공급 기업의 체력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의견을 전했다.
◇ AI 랠리의 숨 고르기…이제 ‘제값 찾기’ 단계로
AI 투자 사이클의 향방은 혁신에 대한 기대치가 실제 실적으로 얼마나 뒷받침되느냐에 달려 있다. 기대가 앞서면 랠리가, 실적이 뒤따르지 못하면 조정이 찾아온다.
지난 2년간 엔비디아와 팰런티어 등 핵심 AI 관련 종목은 성장 스토리만으로 밸류에이션이 급등했는데, 이제 시장은 실질 현금흐름으로 그 기대를 검증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AI는 여전히 산업 구조를 바꿀 ‘게임 체인저’이지만, 밸류에이션의 정상화 과정은 불가피해 보인다.
앞으로 글로벌 증시의 향방을 가를 핵심 변수는 두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앙은행의 금리 경로이고, 두 번째는 AI 산업의 성장이 실제 현금 창출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먼저 금리 방향은 시장의 밸류에이션을 직접적으로 결정한다. 성장주는 대부분 ‘앞으로 벌 돈’의 가치를 미리 반영하는 구조다. 이익이 지금이 아닌 미래에 발생하기 때문에 시장은 이를 현재가치로 할인해 평가한다. 따라서 금리가 높아지면 현재가치는 줄어들고 그만큼 주가는 하방 압력을 받는다. 반대로 금리가 낮아지거나 인하 기대가 살아나면 유동성이 회복되면서 성장주 전반에 다시 리레이팅(밸류에이션 재평가) 흐름이 나타날 수 있다.
최근처럼 미국 연준의 고금리 장기화 기조가 이어지면 외국인 투자자들의 자금이 빠져나가고 국내 기업들의 주가 부담도 커지게 된다.
또 다른 주요 변수는 AI 기업들의 성장세가 단순한 매출 확대에 그치지 않고, 수익성과 현금흐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AI 산업은 막대한 초기 투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매출이 늘더라도 한동안은 설비 확충과 인프라 구축 비용이 수익성을 갉아먹는다.
하지만 일정 규모를 넘어선 기업은 매출 증가가 고정비 부담을 낮추며 영업이익률 개선으로 이어지고, 결국 잉여현금흐름(Free Cash Flow)이 플러스로 전환된다.
이 단계에 진입한 기업만이 단순한 성장 스토리를 넘어, 실제로 현금을 벌어들이는 구조를 갖춘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결국 AI 산업의 지속 가능성은 기술의 진보 속도보다 그 혁신이 수익과 현금흐름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얼마나 빨리 구축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 두 요건이 충족되면 현재의 조정은 일시적 흔들림에 그치겠지만 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실적이 뒤따르지 못할 경우 이번 하락은 AI 종목에 붙었던 프리미엄이 빠지고, 보다 보수적인 기준으로 다시 가격이 매겨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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