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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신탁 속 세상] 고인 뜻대로 못하는 유산처분…유언대용신탁이 해결한다

가족 간 유산분쟁 빌미 사전 제거
가업승계 방안으로도 부상
15% 의결권 제한은 개선해야

보험이 대량 생산된 캐쥬얼이라면, 신탁은 개인형 맞춤옷과 비슷하다. 둘 다 위험을 주제로 한 상품이지만, 신탁 속에는 더욱 다앙햔 개인의 삶과 모습을 담아낼 수 있다. 신탁이기에 장애인·미성년자·범죄 피해자 후견 문제, 고령자가 노후나 치매 대비도 ‘맞춤형’으로 설정할 수 있다. 초고령화, 저출산 사회에 근접할수록 신탁은 개인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컨설턴트로도 변화하고 있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로부터 실제 경험한 사례를 제공받아 신탁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봤다. /편집자 주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신탁은 자신의 재산관리를 타인(신탁회사, 수탁자)에게 맡기는 제도를 말한다. 명의가 잠시 신탁회사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실제 재산관리를 어떤 방향으로 할지 언제, 어떻게 처분할지는 재산을 맡기는 당사자(위탁자)가 설정하게 된다.

 

신탁이 정형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중세 유럽 십자군 때였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들이 자신의 어린 자녀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재산을 성실히 관리되도록 믿을 만한 사람이나 교회에 맡기는 유스(Use) 제도에서 시작됐고, 이 성실한 관리자, 성실한 집사의 모습이 현대 신탁의 뿌리가 됐다.

 

현대 신탁에서 가장 주목되는 영역은 ‘유언대용’ 영역이다.

 

고령자가 나 살아생전에 재산을 신탁회사에 맡기고, 생전 동안 신탁회사에 맡긴 재산으로부터 생활비를 받아 쓰고, 사후에는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신탁회사가 처분하는 방식이다.

 

고인이 자신의 삶을 보장받으면서 자식들에게 부양부담을 주지 않고, 사후에도 자식들이 유산분쟁으로 싸우는 것을 방지한다.

 

오랫동안 장학사업을 한 70대 A씨도 그러했다.

 

A씨는 젊어서 애를 낳지 못하여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 세 살배기 아들을 한 명 업어 키웠다. A씨는 친부모에게 미안해 양자로 들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식처럼 아들을 키웠다. 법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아들이라고 인정하면 됐지.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법은 달랐다. 호적상 가족은 A씨의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해외에 살다보니 왕래가 없고, 자식은 셋이 있다.

 

A씨가 건강이 악회되자 그 조카 한 명이 꽤 큰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한다는 명목이었다.

 

거절하니 조카는 어차피 A씨가 돌아가시면, 여동생과 조카들에게 A씨의 재산이 돌아가니 기왕이면 미리 당겨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A씨는 이제야 덜컥 아들 생각이 났다. 물론 세상을 떠난 후 여동생과 조카에게 어떻게 해줄지 생각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길렀고, 가족으로서는 유일하게 찾아오며 자신을 보살피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니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신탁은 A씨에게 안성맞춤의 수단이었다.

 

자신의 살아생전 생활비는 자신이 보유한 건물에서 충당하고, 사후에는 아들에게 넘겨주도록 했다. 자신이 보유한 오피스텔도 사전증여로 아들에게 넘어가도록 짰다.

 

보유한 재산 일부는 장학재단에 넘어가 사회공헌에 쓰고, 여동생 일가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법적상속분에 맞춰 상속되도록 했다.

 

하나 리빙트러스트 관계자 말에 따르면, A씨는 신탁 설정이 마무리된 후에야 아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조카들에게도 떳떳해졌다며 마음이 편해졌다고 밝혔다.

 

 

◇ 유언 묵살하는 법정상속분

 

A씨와 유사한 사례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도 자신의 은인이었던 사촌누나를 위해 신탁을 통해 마음을 전달했고, 자녀들의 반대로 호적에 올리지 못한 사실혼 배우자의 노후생활을 위해 신탁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유산문제는 자녀들 간 분쟁과 때로는 자녀나 조카들의 패륜으로까지 이어진다.

 

유언대용신탁은 단순히 사망 이후 신탁이 이행되는 유언신탁과 달리 생전에 신탁이 이행돼 고인의 뜻을 고스란히 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행법에서는 유류분, 소위 최소 법정상속분이란 개념이 있고, 봉양했던 가족들의 기여분을 매우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례는 천안함 용사의 사례였다. 고인은 부친과 살다가 천안함에서 순직했다.

 

이후 보상금이 나오자 고인이 어렸을 때 곁을 떠난 모친이 나타났다. 유류분에 따라 보상금에 대한 법적상속분을 주장할 수 있다며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뻔뻔한 모친의 주장에 여론이 들썩였고, 법무부까지 나서 개선방안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민법의 권위자들을 모아 특별조직까지 꾸렸고, 보고서도 전달됐다. 그러나 개선법안은 만들어지지 않고 법무부 선에서 묵살 됐다.

 

해당 TF단장은 과거 취재에서 “TF검토 결과 현행 유류분 제도의 취지는 이해될 만하나 결점이 있어 상당부분 보완할 필요가 있고, 이에 대한 근거도 충분히 전달했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이후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그런데 지난 1월 수원지법 성남지원, 10월 수원고법에서 매우 의미 있는 결론이 나왔다.

 

생전에 신탁회사에 위탁된 유언대용신탁 재산분은 상속재산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두 개의 판결은 신탁재산은 원칙적으로 유류분 산정의 기초가 되는 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기존 법리 위에 있다는 것을 일정부분 재확인시켰다.

 

법조계와 세무업계에서는 유언대용신탁을 경영권 분쟁 없는 승계를 위한 가업상속수단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만, 넘어야 할 장벽이 있다. 의결권 15% 제한룰이다.

 

유언을 통한 주식은 지분율에 무관하게 피상속인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신탁으로 맡긴 주식은 지분율 15%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한다. 금산분리 원칙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학계와 업계에서는 금산분리 원칙은 경영권을 이용해 금융사에 맡겨진 타인의 돈으로 산업분야의 회사를 무분별하게 지배햐는 것이 막기 위해 생겼지만, 신탁으로 맡긴 주식은 온전히 개인의 재산이며 타인의 재산이 아닌데 어째서 의결권을 제한하는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심지어 과거에는 상속목적으로라도 지분율 20% 넘게 신탁회사에 맡긴 경우 금융위에 사전승인을 받도록 했지만, 최근 금융위는 유권해석을 통해 사전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회신했다. 신탁한 재산이 순수히 개인재산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지난 9월 6일자 금융연구원 금융브리프의 '기업의 안정적 승계를 위한 유언대용신탁 활용방안' 보고서에서 서병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업의 지배구조 안정성과 금융회사의 수수료 수익원 확보 차원에서 신탁된 주식의 의결권 제한 등 관련 규정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서 연구위원은 “유언대용신탁은 상속세를 줄여주는 가업상속공제 제도와 달리 과세 관련 형평성 이슈가 없으므로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한 기업 승계를 장려하더라도 여론의 부담이 없다”라며 “중장기적으로 가업 승계 지분에 한해서는 유류분 제도 정비 필요성을 검토해야 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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