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정권에 따라 관가에선 밀물‧썰물이 밀어친다. 편중 인사가 곧 보복 인사로 뒤바뀐다. 그렇게 영남과 호남, 경북과 경남 인사들이 별을 잃고, 별을 달았다. 5월 10일 윤석열 정부의 출범은 국세청에도 새 시대를 의미했다. 5월 13일, 윤석열 대통령의 명에 따라 국세청장 지명자 김창기가 세종시 국세청 본부로 이동했다.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떤 인물인가. |
김창기 국세청장 지명자는 1967년 경북 봉화 두문리의 유지 고 김사욱 씨의 자녀 넷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 김사욱 씨는 경북 유지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자녀 교육을 위해 대구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보수 정당의 뿌리이자 경북의 심장. 서울 강남구, 대전 유성구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교육의 도시.
경북고(1899년 개교), 계성고(1906년 개교), 영남고(1935년 개교), 능인고(1940년 개교), 대건고(1946년 개교), 대륜고(1950년 개교), 성광고(1953년 개교), 심인고(1957년 개교), 대구고(1958년 개교), 청구고(1964년 개교) 등 대구 명문고들은 경쟁하듯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재계인, 금융인, 군인, 스포츠 인사들을 다수 배출했다. 누가 얼마나 배출하느냐에 따라 학교의 권위가, 집단의 힘이 달라졌다.
◇ 김창기의 뿌리, 청구고
김창기 지명자는 대구 청구고 20회 졸업생이다. 대구 권력은 오래된 고등학교에서 점차 젊은 고등학교 출신으로 이동해갔는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중년에 접어든 청구고는 비슷한 연배의 대구고와 더불어 대구 인맥의 주요 축으로 부상했다.
청구고의 선구자는 이명박 정부시절 국회 비례의원과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이주호 전 장관이었지만, 청구고의 싹을 틔운 것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경선 캠프 상황부실장과 공보특보를 맡은 신동철 씨였다.
신동철 씨는 2013년 대선 공신으로서 2013년 3월 박근혜 정부 출범과 더불어 대통령실 정무수속실 국민소통비서관에 임명됐으며, 2014년 6월 대통령실 정무비서관에 올랐다. 그의 부상은 청구고들의 든든한 보증수표였다.
또 하나의 파란은 2014년 4월 새누리당 당내 대구시장 후보경선에서 승리한 청구고 출신 권영진 후보(현 대구시장)였다.
박근혜 정부 이전까지 대구시장에 경북고 이외의 인물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문희갑·조해녕·김범일 등 경북고 출신이 대구시장 민선 1기부터 5기까지를 싹 휩쓸었다.
승리의 주 요인은 서상기‧조원진 등 친박계 인사들끼리 붙으면서 표가 갈린 것이지만, 청구고가 권영진 후보를 밀은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청구고 출신인 조원진 경선 후보는 3학년 때 전학을 간 것이 발목을 잡았다.
권영진 후보의 승리는 오래된 학교에서 새로운 학교로 바뀌어가는 대구 정계의 흐름을 극명히 드러냈다.
그러나 이 약진은 김창기 지명자에게 의도치 않은 역풍을 일으켰다.
◇ 청구고, 대구고와의 대립
2015년 12월 검찰총장 인사에서 여론은 청구고 쇼크 상태였다.
청구고는 2014년 8월 강신명 경찰청장을 배출한 상태였는데 2015년 12월 검찰총장에까지 김수남 대검 차장을 올린 것이었다. 청구고의 검경 독점으로 정계가 들끓었다.
일각에선 김수남 검찰총장의 임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기한다.
김수남 검찰총장의 형인 김흥남 당시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이 경북고 출신이었기에 청구고 쏠림을 우려하는 TK 민심을 설득시켰다는 이야기다.
다른 측면에서 대구고 독점을 막기 위해 청구고를 뽑았다는 설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당시 최경환 부총리가 검찰총장으로 밀고 있었던 것은 그의 대구고 후배인 박재성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최경환 부총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대외적인 실세 1위였다.
그런데 이미 대구고는 2014년 8월 임환수 국세청장, 2015년 7월 이완수 감사원 사무총장을 앉힌 상태였다. 박재성 서울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이 되었다면 대구고가 검찰청,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권력기관 중 셋을 거머쥐는 셈이 된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대구고는 이순진 합동참모의장,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 곽병훈 청와대 법무비서관, 민병호 청와대 뉴미디어비서관,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 본부장, 조현천 국군기무사령관, 이만희 경기경찰청장, 임경구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장 등 군과 사정, 금융에까지 곳곳마다 손을 뻗어두고 있었다.
야당만이 이러한 속사정을 거침없이 후벼팠다.
“대구고 공화국도 아니고, 특정 고교 출신들이 권력과 모든 것을 장악해서 되겠습니까?”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2015년 9월 국정감사)
“임환수 국세청장,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 이완수 감사원 사무총장, 이순진 합참의장 내정자 모두 대구고 인맥입니다. 이것이 우연한 결과입니까?”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2015년 9월 국정감사)
게다가 대구고의 라이벌로 부상한 청구고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김수남 전 검찰총장은 이명박 정부 서울중앙지검 3차장에서 미네르바 사건을 맡으며 정권 눈에 들었고,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2012년 5월부터 10월까지 경찰청 정보국장을 맡으면서 이명박 정부 정보경찰로 이름을 날렸다. 이명박 정부를 거쳐 성장한 청구고가 박근혜 정부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 그렇지만 국세청장은 대구고였다
김창기 지명자는 2012년 5월 이명박 정부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에 파견돼 날개를 달았으며, 대통령실에서 부이사관에 특승을 한 후 2013년 2월부터 박근혜 정부 초기 지하경제양성화 TF팀장을 맡았다.
지하경제양성화 TF는 업무내용이 바로 대통령실로 보고되는 중요한 부서였는데, 박근혜 정부는 지하경제양성화를 증세 없는 복지의 첨병으로서 내세웠다. 김창기 지명자는 이 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2014년 7월 고위공무원으로 승진했다.
그 역시 이명박 정부에서 성장, 박근혜 정부에서 꽃을 피울 듯 했다.
2014년 8월 임명된 국세청장이 임환수 씨가 아니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다.
임환수 국세청장은 사람 보는 눈이 탁월했지만, 그의 치하에서는 행정고시 29회~35회 중 33회 한승희 정도만 국세청장의 명맥을 이을 수 있었다.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컸던 그는 대구고 후배인 임경구(전 국세청 조사국장)를 중심으로 행정고시 36회 라인을 키웠다. 36회가 커질수록 김창기 지명자를 포함한 행정고시 37회는 억눌렸다.
“임환수 국세청장은 행시 37회에 별로 신경을 안 썼어요. 어느날 들으란 듯이 그러더라고요. 수가 많아서 누구는 승진 못 하겠네. 행시 37회, 38회가 많으니까. 그 소리 듣고 납작 엎드려 숨 죽이거나, 어떻게든 눈에 들려고 노력한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임환수 국세청장은 마음 속으로 결론 내려놓고 인사를 했어요.” (익명의 전직 공무원)
강민수 대전지방국세청장, 정철우 국세공무원교육원장 등 다른 행시 37회 동기처럼 거의 좌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김창기 지명자도 2015년 미국 국세청 파견, 2016년 중부지방국세청 징세송무국장, 2017년 중부지방국세청 성실납세지원국장 등 좌천도 아니고 영전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렀다.
김창기 지명자가 문재인 정부에서 핍박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김창기 지명자가) 문재인 정부에서 핍박받았다고? 아니지, 박근혜 정부 경찰청장, 검찰총장이 청구고였고 대구시장도 청구고였죠. 임환수 청장님이 그것만으로 인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후배도 아닌 청구고를 키워줄 필요는 없다고 본 거죠.” (익명의 공무원)
문재인 정부에서 김창기 지명자는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여정을 보냈다. 지휘 책임을 물어 징계를 받기도 했지만, 홍조근정훈장을 받으며 오점이 지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인사에서 1급 승진에 성공했다.
2021년 7월 인사에서 중부지방국세청장에서 부산지방국세청장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의 1급 승진은 김창기 지명자가 문재인 정부에서 마냥 힘없는 사람은 아니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승진은 국세청장으로의 문을 연 중요한 도폭선이었다.
◇ 어떤 심정으로 그는 돌아왔나
김창기 지명자는 어려서 유복한 삶을 지냈다. 김창기 지명자의 부친인 고 김사욱 씨는 혼란의 시대에 둘째 자녀를 1980년대 미국 대학에 유학 시킬 정도의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인물이었다. 모든 것이 엄격했던 시대, 안기부는 외국으로 나가는 사람의 신원‧배경을 조사했다.
김창기 지명자도 다른 ‘기’자 돌림 형제들처럼 최고 수준의 학력을 갖췄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미국 일리노이대 석사과정 졸업을 마쳤으며, 행정고시 37회로 공직에 들었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 고학력. 경제적 어려움 없이 보낸 유년기.
‘김창기 후보자는 소탈하고 사려깊은 성품으로 화목한 직장분위기를 조성하고, 권위에 의존하기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매사 업무를 추진하는 등 조직 내 덕망이 매우 높음.’ (국세청이 작성한 김창기 지명자 경력 참고사항 일부)
그런 그도 세상의 작은 조각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냉탕과 열탕을 오가야 했다.
국세청 종목에 출전한 청구고의 대표선수. ‘겸손하고 진실된 사람’이란 보수정계의 평가는 그가 국세청장 지명을 받기 직전 어떤 몸가짐을 해왔는지 예단케 한다.
그리고 자신을 꾹 눌러왔던 그가 마침내 국세청장이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꼈을 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놀람, 기쁨, 희열, 전율, 분노….
김창기 지명자가 국세청장 지명 첫 출근 자리에서 둑 터진 강처럼 비고시 출신 세무공무원에게 거친 언사를 쏟아낸 것은 의외로 주변에 큰 놀라움을 주지 못했다.
비고시 출신 세무공무원들 일부는 “행정고시들은 대부분 다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애써 웃어 넘기기도 “행정고시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의 처사에 공감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딱히 분노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국세청장이 될 사람인데.’ 증오의 시대에 그들이 선택한 건 체념인 듯 했다.
시계를 되돌려 보면 세 명의 문재인 정부 국세청장 중 두 명은 김창기 지명자보다 비슷하거나 더한 주변의 냉소 끝에 국세청장에 올랐다. 선택은 달랐다. 누구는 더욱 권력을 원했고, 누구는 국세청장인 것에 대체로 만족했다.
김창기 지명자는 이들과 상황이 조금 다르다. 그는 정권 첫 국세청장이다. 대통령실은 정권 색채에 맞는 뚜렷한 행정을 요구할 것이다. 퇴직했다가 5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역사상 첫 국세청장이다. 고개가 위로 올라갈 이유는 충분하다. 신동철 등 청구고의 거물들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고, 지금 청구고를 이끌 대표선수는 김창기 지명자다.
‘소통을 중시하는 리더십.’ (국세청이 작성한 김창기 지명자 경력 참고사항 일부)
앞으로 국세청은 새로운 국세청장을 받아들여야 한다. 새 국세청장은 공정을 말하며 그간의 기조를 180도 꺾을지 모른다. 지시에 따르는 것은 의무이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든 이행해야 한다는 것은 뒤바뀌지 않는다. 다만, 권한이 오롯이 국세청장의 것인만큼 책임도 그의 것이며, 공무원이 아닌 국민 입장에서는 국세청장이 공정을 말할수록 더욱더 엄격한 눈으로 공정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The T‧K Strikes Back.’
2022년 5월 13일
T‧K의 적자, 김창기가 세종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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