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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칼럼] 권력과 자본의 탈출, 최치원과 김시습의 사상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도가사상은 노자와 장자, 민간신앙, 음양오행설, 신성설 등이 복합적으로 합쳐져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의 도교의 발전과정을 정리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신라말 최승우(崔承祐), 김가기(金可記) 등이 당나라에서 종리권(鍾離權)에게 도교 사상을 전수받은 이후 최치원(崔致遠), 고려의 이명(李茗), 조선의 김시습(金時習) 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의상대사의 선법(仙法)이 권청과 설현 등을 통해 김시습으로 이어졌고, 김시습은 홍유손, 정희량, 윤군평 등에게 전했다.

 

또 다른 도교를 정리한 조선시대의 청학집(靑鶴集)은 도인들의 행적과 담론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 근원을 환인, 환웅, 단군에 두고 있다. 혼란했던 19세기 말에 도교에 기반을 둔 단군신앙과 정감록 사상이 신흥종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교에 입문했던 인물들은 그 시대의 권력과 자본을 초월하여 신선 사상과 풍류 생활을 추구했다.

 

최치원의 풍류와 김시습의 수련

 

당나라에 갔던 김가기는 과거에 급제하고 신선에 이르는 복기법(服氣法)을 수련하여 수행에 힘썼다. 그의 비석인 ‘종남산신라김가기석각(終南山新羅金可紀石刻)’는 그가 수련에 성공하고 천상의 선계로 올라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헌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신라로 돌아와서 아찬(阿飡)에 오르면서 어지러운 신라 말의 사회를 개혁하려 했으나 6두품출신의 한계와 귀족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라 말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전국을 돌아 다니며 은거하면서 풍류 생활을 했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지었다. 세종대왕이 다섯 살인 김시습의 능력을 칭찬하고 비단을 하사했다. 그의 이름은 논어의 첫 구절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얻었다. 세조가 계유정난(1453년)으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북한산 중흥사에서 방문을 잠그고 두문불출했다. 사육신(死六臣)이 죽자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었고, 21세에 출가하여 춘천의 청평사와 설악산 오세암에서 설현에게 도교사사상을 전수 받았다.

 

고려와 조선에서 춘천 청평사는 도인들의 거점이었고, 오세암은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수련하기 좋은 장소였다. 김시습과 한용운은 이곳 오세암에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썼다.

 

“10년 동안 떠돌이로 떠돌아 보니 이내 몸은 밭둑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 험하고 위태하니 말없이 꽃떨기 냄새나 맡으리라” 그는 수락산 동쪽에 폭천정사를 짓고 10여년을 생활했는데 금류폭포 상단의 너럭바위에 ‘금류동천(金流洞天)’이라는 암각문을 새겼다.

 

 

그의 ‘금오신화’는 속세의 명리를 좇지 않는 순수한 인간을 표현하면서 현실의 고뇌와 내면의 충동을 그렸다. 59세(1493년)에 만수산 무량사(無量寺)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이이는 김시습전에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요동하는 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불자에게 불교, 유생에게 유학, 도인에게 도교를 말하면서 다른 사상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삶을 이해할 수 없지만 생육신으로서 그의 죽음을 서러워한다. 매월당은 환경이나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처음과 끝이 언제나 똑같은 참마음을 추구했다.

 

와유와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조선후기에 주요 사상이었던 유교세계에서 밀려난 지식인들이 개인 수련을 명목으로 풍류를 즐겼다. 때로는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을 구경하고, 손에 잡히는 책을 읽거나 그냥 할 일없이 서성거린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 예전에 갔던 곳을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려서 옛날에 갔던 곳을 즐겼다. 와유(臥遊)는 송(宋)나라의 종병(宗炳)이 사람이 늙고 병들면 유람했던 곳을 다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산천과 명산을 그림으로 그려서 방에 걸어두었다는 일화에서 나왔다.

 

김홍도(1745~1806)는 일상의 생활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여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웃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작품인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는 선비가 서책, 청동기, 문방구 등에 둘러싸인 채 당비파를 연주하고 있다. 그 당시 선비들은 와유의 매개물로 화분, 분재 또는 수석(假山)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에 한편의 시로 설명하였다.

 

“紙窓土壁終身布衣嘯詠其中”

(종이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언정,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은 채, 거기서 시를 읊조리며 산다네)

 

19세기 말부터 사회가 혼란할 때 전북 모악산 일대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에 최재우(1824~1864년)의 동학, 1901년 강일순의 증산교, 1916년 박중빈의 원불교 등이 일어났다. 1924년 동학 일파인 시천교의 김연국이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신도 약 2000여 명을 데리고 계룡산 신도안 일대에 정착하여 종교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상당수가 각종 신비주의적 세계와 지상천국을 제시하고, 교리전파, 영향력 확산, 신도 확대, 재정 확충 등으로 조직을 확대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일반인들도 사회의 경쟁관계에서 밀려나거나 도태되면서 신흥종교에 몰입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최치원과 김시습은 세속의 권력과 자본에서 밀려나자 사회를 떠나서 자신만의 세계를 추구했다. 산천을 유람하면서 세상을 잊고 초월적인 종교적인 삶을 살았다. 사회가 혼란하거나 힘들 때 종교적인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고도경제사회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권력과 자본에서 박탈된 젊은 층은 결혼을 늦추거나 무출산으로 대응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80년대의 적극적이고 혁신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누군가 희망을 던져 주어야 한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경희대 경영학과, 고려대 통계학석사, University of Liverpool MBA,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경희대 의과학박사과정

•국민투자신탁 애널리스트, 동부증권 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한국과학사학회 회원,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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