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5 (금)

  • 맑음동두천 -3.6℃
  • 맑음강릉 3.0℃
  • 맑음서울 -1.9℃
  • 맑음대전 0.2℃
  • 맑음대구 1.7℃
  • 맑음울산 2.7℃
  • 맑음광주 3.9℃
  • 맑음부산 3.9℃
  • 맑음고창 2.7℃
  • 구름조금제주 8.0℃
  • 맑음강화 -1.6℃
  • 맑음보은 -0.3℃
  • 맑음금산 0.3℃
  • 맑음강진군 4.5℃
  • 맑음경주시 2.3℃
  • 맑음거제 3.9℃
기상청 제공

문화

[전문가 칼럼] 중원의 책봉과 그 영향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조공은 중심국(종주국)인 중국에 대하여 제후국(번국)인 속국의 충성을 나타내는 위계 구조였다. 황제는 제후국의 조공을 통하여 상징적인 통치권을 인정받았고, 제후국은 지배 영역의 종주권에 대한 중원의 확인을 받았다. 동아시아는 조공과 책봉으로 환경의 변화에 순응하면서 각 국가가 독자적인 통치를 수행하였다.

 

조공에 따른 책봉의 역사

 

최초 책봉의 기록으로 근초고왕이 동진(東晉)에서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받았다. 송(宋)은 전지왕에게 책봉하면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한단계 승격시켰다. 백제의 관료로 신하였던 부여례가 관군장군부마도위불사후장사(冠軍將軍駙馬都尉弗斯侯長史)를 받고, 장무가 용양장군대방태수사마(龍驤將軍帶方太守司馬)를 받았다(472년).

 

양나라는 무령왕에게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百濟王, 521년), 성왕에게 지절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524년)을 수여했다. 성왕이 양나라에 시경(詩經) 전문가를 요청했고, 양무제는 예학의 권위자인 육후(陸詡)를 보냈다.

 

위덕왕은 동제에서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570년)과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571년), 수나라에서 상개부의동삼사대방군공(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581년)을 받았다.

 

당나라에서 무왕은 ‘대방군왕백제왕(帶方郡王百濟王)’과 사후에‘광록대부(光祿大夫)’, 의자왕은‘주국대방군왕백제왕(柱國帶方郡王百濟王)’과 사후에‘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얻었다. 웅진도독 부여융은‘광록대부태상원외경사지절웅진도독대방군왕(光綠大夫太常員外卿使持節熊津都督帶方郡王)’, 사후에‘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을 받았다.

 

신라 지증왕이 국호(新羅, 503년)를 정하면서 중국에서 책봉을 받았다. 진덕여왕(648년)은 중국식 의관을 착용하면서 당나라와 일체감을 조성했다. 김춘추는 공식적인 사대 관계를 맺으면서 당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여 신라 말까지 군신 관계를 형성했다. 신라는 자체 연호를 폐기하면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했고(659년), 법흥왕 이후 사용하던 불교식 시호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고려의 왕건도 후당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사대의 표시였던 대통사와 분황사

 

백제의 대통사와 신라의 분황사는 양나라와 당나라의 지원과 협력을 얻으려는 노력의 상징물로 추정된다. 백제는 양나라 양무제의 연호인 대통(大通, 527~529년)을 사용하여 대통사(大通寺)를 창건했다(삼국유사). 법화경에 나오는 대통불로 공주 대통사지와 부소산성에서 ‘대통’이 기록된 기와를 찾았다.

 

대통사는 명칭이 알려진 최초의 백제 사찰로 연꽃무늬 수막새가 사용되었다. 수막새 뒷면과 수키와 앞부분을 연결하는 중국 남조계의 기술을 반영하였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와 일본의 아스카지(飛鳥寺)의 기와에 영향을 미쳤다.

 

신라에서 선덕여왕이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인 분황사(芬皇寺)를 세웠다(삼국사기).

 

三年春正月 改元仁平 芬皇寺成

“3년 봄에 연호를 인평으로 고치고 분황사를 세웠다.”

 

신라는 분황사가 건립되던 시기에 당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받아들였다. 당나라에서 들여온 단령과 관모가 조선시대까지 관료의 집무복으로 사용되었다. 분황사탑은 중국 전탑을 모방하여 7층 또는 9층 탑으로 세웠다(634년). 탑 1층은 4면에 감실(龕室)을 만들고, 탑의 입구에 인왕상, 돌사자와 돌물개상을 배치했다. 한동안 분황사탑과 유사한 벽돌탑이 8세기까지 세워졌다.

 

 

 

 

 

당나라 양식의 전탑과 모전탑

 

8세기에 전탑(塼塔, 벽돌탑)과 모전탑(模塼塔)이 낙동강변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전탑은 중국의 양식으로 8-9세기에 일정 기간만 만들어졌다. 백제석탑처럼 마감하는 석재의 각과 기단부를 낮추어서 지붕을 더 길게 하면서 처마를 약간 들리게 제작했다. 옥개석의 받침부는 별석으로 분리하여 목조 가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중국 유학생, 신라내 당나라인이나 포로가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순수 전탑은 정암사 오층탑, 법흥사지 칠층탑, 송림사 오층탑 등이다. 모전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만든 탑으로 분황사탑, 제천 장락리 칠층탑, 봉감리 오층탑, 상주 상병리석심 회피석탑 등이 있다. 그리고, 석탑계 모전탑은 탑신 옥개석을 벽돌식 석재로 축조하며 탑리 오층석탑, 빙산사지 오층석탑, 선산 죽장사 오층석탑, 경주 용장사 삼층석탑 등이다.

 

 

 

 

 

나당연합군의 비문

 

백제 침략의 승자였던 소정방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했다. 비문은 제1면 24행, 제2면 29행, 제3면 28행, 제4면 36행으로 각 행마다 16자 또는 18자를 적었다. “백제가 천자의 말을 듣지 않고 이웃 나라와 불화하고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부가 정권을 농단했다. 이 보찰(寶刹)을 깎아 특별한 공을 기록하니”로 적었다. 소정방은 백제를 정복하고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했다가 재반격에서 패했다(661년 5월).

 

유인원은 소정방을 따라서 왔다가 당군의 총사령관과 웅진도독이 되었다(662년). 그는 웅진도독 부여융과 신라왕 김법민간 취리산 회맹을 주관했다(665년 8월).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공로를 새긴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663년)’가 부소산에서 발견되었다. 의자왕과 백제인들이 당나라로 압송된 사실과 부흥운동의 주요 내용, 폐허가 된 도성에 대하여 기록했다.

 

 

 

 

 

중원이 조공과 책봉의 내속으로 제후국과 중심국을 관리하면서 동아시아를 이끌어 왔다. 이러한 역학관계는 현대에 와서도 크게 변하지 않고 상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 속에서 이러한 과정들이 지속될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경될지 알 수 없지만 이웃한 국가들과불화보다 협력을 통하여 역사는 발전하여 왔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조세금융신문(tf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전문가 코너

더보기



[이명구 관세청장의 행정노트] 낚시와 K-관세행정
(조세금융신문=이명구 관세청장) 어린 시절, 여름이면 시골 도랑은 나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맨발로 물살을 가르며 미꾸라지와 붕어를 잡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허름한 양동이에 물고기를 담아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는 늘 “고생했다”라며 따뜻한 잡탕을 끓여주셨다. 돌과 수초가 얽힌 물속을 들여다보며 ‘물고기가 머무는 자리’를 찾던 그 경험은 훗날 관세행정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물가에서는 마음이 늘 편안했다. 장인어른께서 선물해 주신 낚싯대를 들고 개천을 찾으며 업무의 무게를 내려놓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나면서 낚시와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다시 낚싯대를 잡기까지 20년이 흘렀다. 놀랍게도 다시 시작하자 시간의 공백은 금세 사라졌다. 물가의 고요함은 여전히 나를 비워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낚시는 계절을 타지 않는다. 영하의 겨울에도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고 손난로를 넣은 채 저수지로 향한다. 찬바람이 스쳐도 찌가 흔들리는 순간 마음은 고요해진다. 몇 해 전에는 붕어 낚시에서 나아가 워킹 배스 낚시를 시작했다. 장비도 간편하고 운동 효과도 좋아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걸어 다니며 포인트를 찾는
[초대석] 세무법인 와이즈앤택스 최시헌 회장, 김선명 대표 "변화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최고의 세무서비스"
(조세금융신문=이지한 기자, 사진=이학명 기자) 지난 2023년에 이어 2025년에 치러진 한국세무사회 제33대와 제34대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돼 3년째 주요 회직을 수행해 온 최시헌 부회장과 김선명 부회장이 올해 1월 세무법인 와이즈앤택스를 설립하고 최고의 세무 컨설팅과 세무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본격 출범한 지 1년 가까이 됐다. 대구지방국세청장으로 국세공무원을 마감한 최시헌 세무사가 회장직을 맡았고, 세무 고시 출신의 김선명 세무사는 대표세무사로서 법인을 이끌고 있다. 여기에 김준성, 김민식, 박정준, 민규태 세무사 등 4명의 젊은 세무사가 합류해 분당 본점과 분당 서현, 경기 광주, 서울 용산 등을 거점으로 하여 활발한 업무를 전개하고 있다. 낙엽이 거리를 뒤덮고 있던 11월 중순, 분당 본점에서 최시헌 부회장과 김선명 세무사를 만나 와이즈앤택스의 설립 과정을 돌아보고, 향후 법인을 어떻게 이끌어 갈 예정인지 알아봤다. Q. 우선 성공적인 법인 설립을 축하합니다. 올해 1월 각자 활동하시던 세무사사무소를 합쳐서 새로운 세무법인을 설립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최시헌 회장) 저는 20년 연말 대구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공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