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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전문가 칼럼] 백제 문화의 토대는 어디인가?

초기 낙랑 중심에서 후기 남조 중심으로

 

(조세금융신문=구기동 신구대 교수) 동아시아의 지배적인 집단은 몽골계(선비, 오환, 거란과 몽골), 퉁구스계(숙신, 읍루, 말갈, 여진), 그리고 예맥계 등이 서로 경쟁하거나 공존하면서 국가와 문화를 형성하여 왔다.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는 예맥족(濊貊族)은 길림성과 요녕성 일대의 예족와 맥족으로 구분되는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고대 문헌에 함께 병기되어 있다. 고대의 고조선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백제를 예맥족으로 간주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은 예맥족이 세운 국가이다.

 

백제 지역은 청동기시대에 예맥족이 이동하여 토착 세력인 고아시아족과 혼합된 민족 구성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4~5세기에 요동-평양-황해 동부-경기 파주, 강화-부여(송국리)를 거쳐서 남쪽으로 내려가거나 대전-전주-장수-승주-여천(적량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일부는 쓰시마와 북규슈에 정착하여 야요이문화를 남겼다. 예맥인이 이동했던 경로는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이뤄진 무문토기의 발견 지역과 일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간 융합과 문화의 통합이 백제의 토대가 되었다.

 

예맥족과 고조선

 

맥(貊)은 천산산맥 동부에 형성된 여러 종족이나 국가의 역사 공동체로서 북쪽의 오랑캐인 북적(北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주요 활동 영역인 요서지방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요동지방과 송화강 유역까지 확장되었고, 대릉하 유역에 고조선을 세웠다.

 

고조선은 농경과 청동기를 바탕으로 국가를 형성했고, 철기문화의 한나라와 대립하였다. 은나라 말기에 중국계 유민들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고, 진나라 말기에도 많은 유민들이 유입되었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 발전의 토대로 한반도의 토착민들과 융합하면서 성장하였다.

 

생활 용구로 사용했던 토기(미송리식 토기)는 납작한 바닥, 입구가 점차 벌어지는 몸체, 그리고 띠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형태였다. 대표적인 양식인 돌널무덤이 청천강 이북에서 요녕과 길림 지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고조선은 철기를 사용하면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경제가 발전하였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 기원전 128년에 군장(軍將)이 고조선을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하자 한나라는 그 지역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했다.

 

 

군현제와 낙랑군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이 중계무역으로 강해지자 고조선을 침략하여 1년간 항전 끝에 왕검성을 함락하고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다(기원전 108).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강력한 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했다.

 

군현제는 전국을 크게 군(郡)으로 나누어서 다시 군 아래에 여러 현(縣)을 두어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였다. 지방 분권적인 봉건제보다 중앙 집권적인 군현제는 지배세력의 강력한 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세워진 한사군은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진번군(眞番郡), 현도군(玄菟郡)으로 구성되었다. 후에 낙랑군이 임둔과 진번을 통합하고, 현도는 만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요동의 독자 세력인 공손씨가 낙랑군을 나누어 진번 지역인 한강 이북과 황해도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위나라가 공손씨 정권을 멸망시키면서 진나라에 인계되었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었다.

 

낙랑과 대방의 문화는 백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덤 양식인 전축분은 서역의 아치형 천정과 아치식 입구를 벽돌로 구성하였는데 공주 백제 송산리고분군의 6호분과 무령왕릉이 해당된 다. 고분의 부장품은 청동기‧옥기‧토기‧도기‧목기‧철기‧기타 명기(明器) 등이다.

 

박산향로는 바다 가운데 신선들이 사는 산동성의 박산(태산), 즉 봉래산을 닮았는데 1993년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도 비슷한 형태다. 신비로운 동경은 용호(龍虎)‧금수(禽獸) 계열과 내행화문경(內行花文鏡) 등을 조각하거나 새기고 있는데 무령왕릉에서 3개의 동경이 발견되었다.

 

 

 

 

북부여와 남부여

 

예맥족의 고조선이 멸망하자 유민들이 한반도로 들어가거나 예(濊)족 중심으로 동쪽에 부여를 건국하였다. 해부루(解夫婁)가 부여를 통치했는데 후에 천신인 해모수(解慕漱)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다스렸다(삼국사기, 삼국유사).

 

예는 기원전 2~3세기경부터 송화강, 압록강, 함경도와 동해안 일대에서 살았다. 동명왕이 남하하여 녹산(길림)에 부여(夫餘)를 세울 때 선주민 집단으로 길림의 서단산(西團山)문화를 창조하면서 부여의 주요 세력이 되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천제와 하백의 후손인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를 나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주몽신화는 동명신화를 차용하여 여러 부족의 전승 관계를 정리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셋째아들 연남산의 묘지명에 부여의 시조로 동명을 기록하고 있다. 최초 동명묘는 북부여에 설치되었으며, 고구려 태조왕도 북부여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는 명묘가 설치된 만주의 졸본을 중시했고 장수왕 때 평양에 동명왕릉을 세웠다.

 

백제는 ‘동명’ 혹은 ‘우태’를 시조로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우고 매년 정월에 국왕이 참배했다(삼국사기).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에 나라를 세웠고(북서, 수서), 시조 구태묘(仇台廟)에 해마다 4번의 제사를 지냈다(책부원귀). 동성왕은 천지신과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성왕(523~554년)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국호를‘남부여국’으로 변경했다.

 

 

 

 

초기 반도는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만나는 지역으로 혼합된 의식과 문화를 가지고 발전하였다. 백제를 건국했던 초기 세력들은 만주에서 한반도, 다시 일본열도로 이동하면서 국가를 형성하면서 발전했다.

 

그 주심의 백제는 예맥족을 중심으로 북방계 부여문화, 한사군 중국문화와 남방계 농경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의 역사에서 고구려나 신라보다 다양한 문화를 구축하였다. 그 시작은 북방의 예맥족 이주민과 고조선의 유산, 한사군의 문물, 남조 문화의 유입이 어우러진 문화적 크로스로드였다.

 

 

 

 

 

[프로필] 구기동 신구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

•(전)동부증권 자산관리본부장, ING자산운용 이사
•(전)(주)선우 결혼문화연구소장
•덕수상고, 경희대 경영학사 및 석사, 고려대 통계학석사,

리버풀대 MBA, 경희대 의과학박사수료, 서강대 경영과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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